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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상에 주고 간 선물.....김수환

youngsports 2009. 2. 17. 13:12

 
사랑ㆍ용서ㆍ나눔ㆍ평화… ‘네가지 선물’ 남기고 떠나다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 순간까지 강조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였다.

이는 추기경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자 고귀한 유산이다.

김 추기경은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하고 화해와 용서의 힘, 정직과 신뢰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줬다. 추기경의 삶의 궤적은 한마디로 사랑의 행로였다.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사랑’

김수환 추기경의 반세기 사제의 삶은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였다.

그의 삶은 진홍색 주케토(성직자들이 쓰는 작은 모자)를 쓰고 교회안에 머문 성직자이기보다 세상 속에서 가난한 이들, 약한 자들과 함께 호흡한 참다운 사랑의 실천이었다.

김 추기경은 사회ㆍ정치적 혼란기인 70,80년대를 지나오면서 고비마다 정의와 양심의 외침으로 우리 사회 물꼬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으며, 시대의 아픔인 동일방직 사건, 안동교구 농민회원 오원춘 사건, 상계동 철거, 장지동 화훼마을 화재 현장 등 특히 인권이 유린된 현장에서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추기경은 몇 년 전 서울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란 주제로 특강을 하면서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자기 자신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에 대한 참사랑”이라며 사랑만이 사회적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옆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스스로 체감했다.

사제 서품을 받고 난 직후 안동과 김천 본당 사제 시절, 당시 고해성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주민의

딱한 사정을 듣고 몰래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절대적 빈곤층뿐만 아니라 입양아나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온 김 추기경은 실천적 사랑의 삶 속에서도 테레사 수녀처럼 좀 더 낮아지고 다가가지 못했음을 늘 부끄러워했다.

#고통을 뛰어넘는 힘, 용서

70년대 초에 시인 김지하가 ‘빨갱이’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 김 추기경은 변호사로부터 특별변호를

의뢰받았다. 결국 법정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추기경은 나가면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김지하가 자신을 고문한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신자들의 권유로 결국 영세를 받고 용서하게 됐다”며 “공산주의자에게는 용서가 없으니 김지하는 빨갱이가 아니다”는 논리를 펴고 싶었다는 거였다. 김 추기경이 평생 강조해온 ‘화해’는 어느 한 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도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추기경은 특히 미움과 대립으로 분열돼 가는 우리 사회를 염려했다. 지역 간,

계층 간, 노사 간 균열을 막기 위해선 이해와 양보하는 마음, 용서가 있어야 한다고 틈 날 때마다 말해왔다.

김 추기경은 또한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신자에게 강복할 때 언제나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

 

#공동체의 버팀목, ‘평화’

추기경은 천상 비폭력주의자였다. 생애 중 가장 가슴 아팠던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항상 ‘광주사태 때였다’고 답하곤 했다. “죄없는 시민들이 퍽퍽 죽어가는데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정말 가슴 아팠다”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기세등등하던 군사정권의 폭압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평화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때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진입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학생들은 그 뒤에 있을 것이오. 들어오려거든 나부터 밟고 가시오”라고 버텼다.

엄혹했던 시절 종교지도자로서 추기경의 이 같은 당당한 태도는 우리

사회의 큰 버팀목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젊은 신부들이 자꾸 시국기도회를 여는 것을 말리는 편이었다. 때문에 말년엔 민주화

세력과 다소 대립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의 참사랑 ‘나눔’

추기경은 늘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며 국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항상 끌어안았다.

가톨릭 신부와 수녀에게는 물론 신도들에게도 항상 ‘나눔’을 강조했던

추기경은 그 자신이 검박한 생활을 추구하며 모범을 보였다.

한번은 미국인 신부가 구멍 난 내의를 입고 있자 “우리 신부들 중 저런 신부가 몇 명이나 될까 모르겠다. 나도 그렇지 못해 부끄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성직자가 따뜻한 밥에, 따뜻한 잠자리를 취하며 호의호식하는 걸 늘 마땅찮아 하던 그는 한끼의 식사, 하룻밤의 안온한 잠자리가 있다면 헐벗은 이들에게 먼저 나눠야 한다고 늘 권면하곤 했다. 그 자신이 마지막까지 장기(각막)를 기증하며, ‘귀한 나눔’을 우리 앞에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추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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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신문 기사 인용

 

시대의 거인이 쓰러지고 난 다음 광야에 남아 있는 의인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남아 있지만 그들도 이제는 카톨릭 내부에서는 소수이자

이단아 취급이 되어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가 남긴 "사랑,나눔 용서, 평화"를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현재

우리 곁에 남아 있을까?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