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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피에타’ 김기덕 감독

youngsports 2012. 10. 21. 21:18

 

이탈리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이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양평 자신의 집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평/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조국의 만남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피에타’ 김기덕 감독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밑바닥 삶을 몸으로 헤쳐가다 세상 속으로 뛰어든 사람, 외진 시골 방 한 칸짜리 집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홀로 살며 직접 만든 기계로 에스프레소 커피를 뽑아 마시는 사람, 이탈리아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등 각종 상패를 둘둘 말아 방구석에 처박아 놓은 사람을 만났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영화 <피에타>로 큰 조명을 받았지만 공개 기자회견 외에는 언론 인터뷰를 안 하셨는데,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기덕 감독님의 이미지는 상처 입은 야수였습니다. 집으로 오라고 하셨을 때 야수가 웅크리고 상처 핥는 거처를 엿보겠구나, 했지요.(웃음) 생각보다 아늑합니다.

“(장작불에 데운 매실차를 따라 주면서) 지내보면 더 아늑한데…, 잔이 좀 거뭇거뭇하지요. 제가 남들에게는 야생동물로 비칠지 모르지만, 한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곳에 사는 이유도 최소한을 쓰고 최소한의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서죠. 태양열 집적기도 설치했고요. 제가 돈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서서히 야생동물에 가깝게 가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황금사자상을 타기 전까지는 영화계와도 관객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상을 계기로 분위기가 확 바뀐 듯합니다.

“이번 수상 이전에도 국내외에서 여러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은 금과 은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제 개인의 영화에 대한 평가보다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기다리던 상이었으니까요. 나라 전체에서 애국심이 발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피에타>에도 예전 제 영화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있는데도 그걸 다르게 해석하고 장점을 찾아주시기도 하네요. 제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분들도 절 알아보고 고생했다 감사했다 인사를 하시고요. 시골 할머니들이 알아보기도 하던데요.(웃음) 이번 작품이 황금사자상을 탈 만한 영화인가 하는 논쟁이 고개를 드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요.”

 

한국영화가 기다린 황금사자상
나라 전체서 애국심 발동하는 듯
수상 논쟁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영화는 시대와 세상 느끼는 온도

-감독님도 이번 수상을 계기로 이전보다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네요. 감독님은 영화를 통해 이 세상은 정글이다, 하고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고 잡아먹는 세상, 무자비한 폭력과 야만이 관철되는 세상을 드러내기 위해 살인, 강간, 폭행, 상해 같은 끔찍한 장면을 생생히 보여주고요.

“첫 영화 <악어>부터 그랬죠. 정점에 이르렀던 게 <나쁜 남자> 아니었나 싶고요. 주한미군 문제를 다룬 <수취인불명>에도 엄청난 내부적 폭력이 나오죠. 흰색을 말하기 위해선 검은색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겉으로 보면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내면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가 뒤엉켜 가고 있는 사회거든요. 제 영화에는 깡패, 창녀 등 가장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등장하죠. 이들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경지에 가 있다, 이들이 보는 세상이 굉장히 정확할 거다 생각했어요. 이들의 거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계속되는 질곡을 보여주고자 한 거죠. 단, 초기 영화들의 장면이 좀 더 절제되었더라면, 어쩌면 좀 다른 영화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요.”

 

영화보다 9시뉴스가 더 잔인
밑바닥서 발버둥치는 깡패·창녀…
이들을 통해 사회질곡 보여주고파
삶, 자학·가학·피학의 바퀴로 굴러가

-오이시디(OECD) 가입국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더러운 속살을 까주마, 너희들이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과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마, 이런 생각 아니었나요?

“사실 제 영화의 장면보다 9시 뉴스가 더 잔인하지 않나 생각해요. 사건을 압축해서 그렇고, 진짜 내용을 볼 수 없어 그렇고. <시엔엔>(CNN)도 <비비시>(BBC)도 마찬가지고요. 보도되는 사건을 파헤쳐보면 숨겨져 있는 게 많아요.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인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인 경우도 있다는 거죠. 저에게 영화는 시대와 세상을 느끼는 온도입니다.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하면 항상 날카로움과 비겁함과 잔인함을 느끼거든요. 사람들 표정에서, 언어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상에서. 한국 사회 곳곳에 잠재적 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어요. 어느 순간 불이 붙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사회는 뒷수습하려고 하지요. 한국 사회는 극단적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입니다. 먹히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 이전부터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1960, 70년대 빈농 아버지들이 자기 아들 서울대 보내 권력, 명예, 돈을 가지려는 열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에서 공범이라고 늘 생각해요. 예컨대, 나 개인과는 무관한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이러한 사회 속에 사는 우리는 작은 역할을 하지요. 각각은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영화로 관객을 자극하여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제 영화의 끝에서 그러한 것도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려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는 자학, 가학, 피학이 바퀴를 형성해서 굴러가는 게 아닐까요? 작품에서 제가 판타지를 많이 구사합니다. 잔인한 영화로 평가 받는 <악어>나 <나쁜 남자>에서도 그랬죠.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늘 패배자고, 열패감에 시달리고, 이런 건 너무 괴로우니까. 또 문제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결말로 갔던 것 같기도 하고요.”

-감독님 영화에는 악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리랑>에서 ‘악역을 잘하는 이유는 내면에 악이 있기 때문이다’란 대사는 감독님 자신과 우리 모두한테 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 대사는 굉장한 아이러니를 말한 겁니다. 제 악한 연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귀엽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물론 저 사람은 영화가 아니면 어디서 저 분노를 폭발할까 하는 사람이 몇 있어요. 그런 한편 이런 건 있어요. 동물도 어류, 조류, 포유류 등으로 나뉘고, 그 안에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있잖아요. 육식과 초식 동물은 눈빛에 차이가 있어요. 육식동물 안에도 죽은 고기 먹는 게 있고 산 짐승을 잡아먹는 게 있고. 인간들도 그러한 근성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봐요. 외국은 잔인한 범죄인의 내면을 열어보는 심리 분석이 발달해 있잖아요. 개인의 충동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의 트라우마를 보는 것 말입니다. 저도 인간의 성악을 자꾸 분해해보는 편이에요. 영화에 그걸 적용하고요.”

-<나쁜 남자>를 비롯해 작품 속 여성의 모습 때문에 여성계에서 엄청나게 공격받았습니다. 감독님의 작품 속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로 그려질 때가 많습니다.

“국내외에서 당신 영화야말로 페미니스트 영화 아니냐, 여성이 한국에서 처한 위치를 정확히 지적하는 영화가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도 많아요. 영화에서 주제와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재료와 시퀀스가 있는데, 그것을 감독의 철학이나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류지요.”

-영화계 사람들과도 많은 충돌을 겪었습니다.

“제가 시비를 걸었던 건 아니었지요. 돌이켜보면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의 간극과 경쟁에서 오는 이해 부족이었던 것 같아요. 양쪽 사이에 심리적 긴장과 게임이 있어요. 저도 제 자신이 비제도권의 대표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 너희쪽 대표선수를 내봐라,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몇 년 전부턴 그런 생각에서도 벗어난 것 같지만. <악어>가 처음 나왔을 때, 주목해야 한다고 한 평론가가 한 명이었다면 이것도 영화냐 했던 게 아홉 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유일하게 옹호했던 이가 정성일씨지요. 이후 아홉 중 몇 분도 이 사람 다시 보자라고 돌아섰고요. 출품하던 초기에는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날 비판하지,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쟤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시각도 느껴졌어요. 한 개인이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정보잖아요. 학교에서 습득한 정보만 가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의 사랑 받지 못했다, 어릴 때 생활의 영향이다 등등의 말로 제 영화를 비평했을 때는 인신공격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제 영화의 중기, 8편쯤 만들면서부터는 그런 비판에 의미를 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전히 저는 영화인 친구가 없어요. 술 한잔 함께 할 수 있는 감독도 없고요. 유일하게 이창동 감독님이 저를 동생처럼 아껴주고, 제 영화를 지지해주고, 어디 가서도 거론해주고 그러시죠. 제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데뷔한 감독 중 한두 명과는 교류를 하지만, 소위 ‘메인스트림 감독’들, 저하고 해외에 나가서 같은 무대에 서는 감독들도 사적으론 만나서 술 한잔 하는 일이 없어요. 제가 가까이 가려고 해도, 저를 그렇게 친숙하게 느끼는 것 같진 않더라고요.”

 

프랑스 가기 전엔 스스로 무시했죠
학교도 안 나왔고, 뭐도 없고…
학력없이 성공 가능한 세상 보고
내 속의 에너지도 가치 있다 믿어

-여전히 외로우시군요. <피에타> 수상 소감에서 ‘청계천에서 무거운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얘기를 조금 해주시죠.

“고향은 경북 봉화군 춘양입니다. 춘양목으로 유명한 동네지요. 1969년 아버지가 저희를 교육시킨다고 서울로 데려와서 경기 고양시 일산에 거주시켰고요. 학교에 들어갔지만 형님이 중학교 때 수업료를 딴 데 쓰면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장남보다 학교를 더 가는 건 용인이 안 되어서 저는 원예와 축산을 배우는 전수학교에 갔어요. 졸업 후 바로 공장에 취직해서 4~5년 기계 만지면서 생활하다가 해병대에 지원해서 들어갔어요. 고등학교 간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고.”

-소년 노동자로 무엇을 배웠나요? 당시 노동운동을 접할 수는 없었을 텐데요.

“노동운동과의 접촉은 전혀 없었어요. 학생 데모 때문에 길 막히고 최루탄 터지고 해서 학생들 원망 많이 했어요. ‘학생들이 공부해야지. 나 같은 애들도 있는데’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쨌든, 저는 기계를 만지면서 많이 배웠어요. 기계의 작동원리에서 엄청난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어요. 지금도 기계 만드는 걸 매우 좋아해요. 기계 안엔 모든 게 다 있거든요. 아까 자학, 피학, 가학을 이야기했는데, 고체, 반도체, 비도체와 같은 원리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학교는 못 갔지만, 공장이 학교였어요.”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한 뒤 해병대 하사관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감독님의 정신과 육체에 촘촘한 잔 근육을 만들어 준 게 아닌가 합니다.

“둘 다 육체적 노동이 기본이 되고 수직적 명령과 복종이 관철되는 곳이지요. 군대 체질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상도 많이 받았고요. 군인정신을 체화하고 그것에 매우 투철하게 살다보니 사이코란 소리를 듣기까지 했어요. 대대 전체를 엎드리게 해놓고 400명에게 이른바 ‘빠따’를 친 적도 있어요. 팔 아파 죽을 뻔했지요.”

-400명에게 ‘빠따’라…, 공장과 군대에서 몸과 마음의 틀이 만들어졌는데, 갑자기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어떤 이유와 계기가 있었나요?

“제대 후 다시 공장 일을 하기 싫었어요. 학력이 없으니 회사에 원서 낼 자격도 없었고. 길거리에서 화가 흉내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러다간 내 미래에는 아무것도 없겠구나 하는 불안에 휩싸였어요. 가진 게 잃을 게 지킬 게 없었다는 거, 이 점이 도전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나 해요.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 기회의 나라, 능력의 나라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백남준 선생님 이야기를 접했어요. 백 선생님도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니잖아요. 이분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나 자신을 돌멩이처럼 힘차게 던져 보자, 이렇게 결심할 수 있었어요. 유럽을 떠돌다가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95년 시나리오 당선되고, 96년 <악어>로 데뷔했죠.”

-<양들의 침묵>의 잔혹함과 <퐁네프의 연인들>의 환상은 지금도 감독님 영화에서 보입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에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당시 한국 영화에서는 이미지 접근이 없었는데, 저는 이미지 접근으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한겨레21>이 감독님 얼굴을 표지에 내면서 ‘잡놈 스타일’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괜찮습니다. 머슴이란 말도 많이 들었어요(웃음).”

 

삶·인간·정치 변화 시동 걸었지만
‘노무현 정신’은 완성되지 못해
실패겪은 문재인, 책임질 수 있을 것
대통령되려면 ‘친노’ 다 끌고가면 안돼

-저는 ‘범생이’의 스펙을 갖추고 있지만, ‘범생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잡놈’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범생이’가 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패배자 취급을 받고 상처받고 쓰러지고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 가기 전까지 스스로를 무시했어요. 철저히. 너는 학교도 안 나왔고, 뭐도 못했고 뭐도 없고…. 그런데 프랑스 가서 바뀌었어요. 학력, 혈연, 지연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있음을 보고 나서 내 속에서 축적된 에너지와 정보도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가졌지요. 우리 교육, 문제입니다. (스마트폰을 들며) 요만한 거에 얼마든지 넣어둘 수 있는 것을 머릿속에 담도록 요구하고 이를 출력해서 테스트하는 건 끔찍한 일인 것 같아요. 머리에 담아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화도 기술적으로 한 달이면 배울 수 있어요. 시나리오든 연출이든. 정말 중요한 영화의 재료는 삶에 대한 관찰과 목격이에요. 학교는 필요한 것이지만 10분의 1 정도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잡놈’들에게 ‘너 자신을 믿어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황금사자상 수상 뒤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했습니다. 그 이유를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관계 때문이라고 농 섞어 말했지요.(웃음)

“저는 ‘노무현 정신’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정치의 변화, 삶의 변화, 인간가치의 변화에 시동은 걸었지만 완성하진 못했어요. 문재인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완성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그가 권력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이고, 누구보다 치명적인 심리적 고통을 받았는데도 전쟁터에 나온 사람이란 점이 좋았어요. 물론 대통령이 되려면 ‘친노’를 다 끌고 가서는 안 될 겁니다.”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요?

“우리 사회의 온갖 편견에 대한 글을 써 보는 중이에요. 제목은 <일대일>. 우리가 진정 일대일로 만나고 부딪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 보고 싶어요.”

-감독님의 색깔을 살리면서도 더 성숙하고 대중적인 작품 기대합니다.

“(직접 만든 에스프레소 기계 3대를 가리키며)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하며 더 얘기해봅시다.”

 

정리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