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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립운동가-정치인·관료-학자 3대 걸쳐 ‘사회 지도층’ 배출한 한국의 리더 그룹

youngsports 2012. 10. 20. 18:13

 

ㆍ독립운동가-정치인·관료-학자 3대 걸쳐 ‘사회 지도층’ 배출
ㆍ하성 캠프 합류… 하준도 ‘러브콜’

장하성 고려대
교수(59)가 안철수 후보 캠프에 참여하고, 그의 사촌동생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49)가 대선 후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면서 ‘장씨 집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안철수 캠프의 외교·안보를 제외한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정당의 직책으로 따지면 삼촌이자 장하준 교수의 부친인 장재식 전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의 전신) 의원(77·14~16대)이 맡았던 정책위의장이다. 조카가 삼촌에 이어 정치판에서 후보(당)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셈이다. 장 전 의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장관까지 지냈다.

장하성 교수의 누나는 2005년부터 3년간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장하진씨(61)이다. 동생 장하원씨(53)는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으로 하나금융연구소장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등을 지낸 뒤 사모펀드 운용사 디스커버리인베스트먼트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장하준 교수는 반신자유주의론자로 한국 경제를 위한 애정 어린 주문을 해왔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살률과 비정규직 급증, 출산율 저하 등의 병폐를 불러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동생 장하석씨(45)도 형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대학 과학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독립운동과 참전 앞장선 명문가

장씨 집안은 전남의 명문가로 유명하다. 구한말 전남 신안군 장산도 일대 염전과 논밭을 가진 만석꾼 부호였다. 1915년쯤 육지로 나와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장씨 집안은 3대에 걸쳐 사회 지도층을 상당수 배출했다. 1세대는 독립운동가, 2세대는 정치인과 관료·의사, 3세대는 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장하성 교수의 증조할아버지 장진섭씨는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자식들을 외지로 유학 보냈다. 장남 장병준씨는 일본 니혼대 법과를 나왔고, 장재식 전 장관의 아버지인 둘째 장병상씨는 서울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했다. 셋째 장홍재씨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해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막내 장홍염씨는 서울 휘문학교와 중국 베이징국민대학을 다녔다. 이들이 장씨 집안의 1세대다.

장홍재씨가 광주학생운동에 앞장섰던 것처럼 다른 형제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장병준씨는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 측근으로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었고, 장홍염씨는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독립군에 몸담았다. 장홍염씨는 광복 후 반민특위 검사와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병상씨는 국내에서 철도공무원을 했지만 형과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다 수차례 일본 경찰에 끌려다니기도 했다.

할아버지 대의 독립운동 이력에 대해 장하성 교수는 “굳이 제 집안이 어떻다고 얘기하는 게 우습다.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 했다가 패가망신한 분이 많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말 훌륭한 분이 많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자식 자랑, 돈 자랑, 집안 자랑하는 사람이다. (집안은) 내 자부심이지, 자랑거리는 아니다”라면서 집안 얘기 꺼내는 것을 꺼렸다.

2세대 주축은 장병상씨의 네 아들이다. 맏이인 장정식씨(사망)는 전남대 의대 교수였고, 장하진 전 장관·장하성 교수의 아버지 장충식씨(83)는 한국은행을 다니다 도의원을 지냈다.

셋째인 장영식씨(80)는 장면 정부에서 경제비서관을 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때 두 번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한국전력 사장과 뉴욕대 교수를 역임했다. 막내인 장재식 전 장관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국세청 차장과 주택은행장을 지냈다.

장씨 가문의 2세대 인물도 한결같이 공부를 잘했다. 장정식씨는 경성의전, 장충식씨와 장영식, 장재식씨는 각각 서울대 화학공학과,
금속공학과, 법학과를 나왔으니 4형제가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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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참여 활발한 학자로도 두각

1세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2세대는 6·25 참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장병상씨가 아들 4형제를 모두 전쟁터로 보낸 것이다. 장정식씨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장충식씨는 미군 2사단 소속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당시 압록강 전투에서 기관총탄에 맞았던 장충식씨는 동료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방치했으나, 뒤늦게 미군에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다. 고등학생이던 장영식씨와 중학생이었던 장재식씨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낙동강 전선에 배치됐다.

‘하’자를 돌림자로 쓰는 3세대 장씨 가문은 이름난 교수를 여럿 배출했다. 특이한 것은 공부만 한 책상물림이 아니라 대부분 활발한 사회참여로 두각을 나타내는 학자라는 점이다. 이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한 것은 할아버지 대는 독립운동, 아버지 대에서는 6·25 참전 등을 한 집안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하진 전 장관은 과거 인터뷰에서 “아버지 세대 영향이 컸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는 주말마다 바둑을 두면서 정치·사회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할아버지 세대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걸 보면 그런 게 집안 분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장충식씨의 맏딸 장하진 전 장관은 학생 운동권 출신 시민운동가로서 충남대 교수를 지낼 때 여성을 정치세력화하기 위해 ‘여성 정치세력 시민연대’ 창립을 주도했다. 장관을 지낸 뒤에도 국민시대 공동대표, 노무현재단 운영위원 등으로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 전 장관의 동생 장하성 교수는 10여년 전 참여연대에서 소액주주운동을 벌이면서 시민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막내 장하경씨는 광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첫 케임브리지대 교수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책 <사다리 걷어차기>를 비롯해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책을 내놓을 때마다 한국과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동생 장하석 교수는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를 거쳐 2010년 형이 교수로 있는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로 옮겼다. 이들의 아버지 장재식 전 장관은 “케임브리지대 700년 역사상 형제가 동시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례는 처음으로 안다”고 말했다.

■ 자녀교육은 아버지가 모범

지난 17일 서울 도화동 ‘한국조세문제연구소’에서 만난 장재식 전 장관은 자녀들을 훌륭한 인재로 길러낸 비법이 뭐냐고 묻자 “고스톱 쳐봤느냐.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은 30%고,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한 70%의 결과가 좋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집안 분위기는 어땠을까. 장 전 장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사랑이 지극하셨다”고 말했다. 장 전 장관의 어머니는 17살에 시집와 10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없었던 10년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분위기는 며느리를 쫓아내든지 첩을 들이든지 했겠지만 달랐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어느 구름에 비가 내릴지 모른다’는 말로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대하라고 장 전 장관 형제들을 가르쳤다.

장하준·하석 ‘천재 형제’에 대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장하준 교수는 홍대부속초등학교 3학년 때 홍대 도서관에서 어른용 책을 빌려다 읽었는데, 당시 한 시간에 250쪽을 읽었다고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한 장하준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기 1년 전인 27살 때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고교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났던 장하석 교수는 미국 10대 고교라는 마운트 허먼 고교를 2년 만에 마치며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칼텍(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전공을 바꿔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재식 전 장관은 21살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30대 때 서울지방국세청장과 국세청 차장에 이어 주택은행장까지 지냈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다. 국세청 차장 시절 그의 집은 20평 아파트였다. 장 전 장관은 “하준이는 밥 먹던 상을 물린 뒤 그 밥상 위에 책을 펴놓고 공부했다”고 전했다. 그 분위기는 아들에게 이어졌다. 지금도 장하석 교수는 자동차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휴대전화도 지난해에야 겨우 마련했다.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는 분위기는 장 전 장관이 자식들에게 보여준 최고의 교육법이었다. 장 전 장관은 지금도 차를 타면 책을 꺼내든다. 차창 밖을 볼 일이 거의 없어 새로 생긴 건물이나 길은 거의 알지 못한다. 전에는 경제 관련 책을 많이 봤지만 요즘은 <논어>와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다.

요즘 자서전 집필을 구상 중이라는 장 전 장관은 “책에 자식 자랑만 했다고 주변에서 욕할까봐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며 웃었다. 자서전의 상당 부분을 잘난 두 아들에 대한 얘기로 장식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세 차례 지내고, 장관까지 올랐지만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게 더 자랑스러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