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애니메이션

서울 만화카페 '현이와 양이' 정미선 사장님

youngsports 2013. 10. 14. 18:39

[중앙일보] 

위기의 골목상권, 강소상인에게 배우자 (20)
만화방서 만화만 봅니까 … 깎아주는 인심도 다 봅니다

13일 서울 영등포본동에 있는 24시간 만화카페 ‘현이와 양이’에서 정미선 사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 사장 뒤로 만화책과 소설 등 3만 권의 장서와 손님들끼리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한쪽 방향으로 배치된 소파가 눈길을 끈다. [강정현 기자]

“만화방이 무슨 대단한 사업이라고 인터뷰를 해요”라며 손사래 치던 정미선(46) 사장은 잠시 뒤 기자와 마주 앉았다. 그는 “‘문 열어 놓으면 손님 올 거고 그러면 먹고는 살겠지’ 하고 덤볐다가 퇴직금이나 창업자금 날리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다”며 “만화방 운영에 필요한, 작지만 중요한 노하우들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역 2번 출구에서 채 50m도 안 떨어진 곳, 평범한 연립주택 건물 지하에 있는 24시간 만화카페 ‘현이와 양이’에서 정 사장은 27년 만화방 경영의 노하우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99㎡(30평) 규모의 이 가게에서 정 사장은 월 매출 1300만원을 올린다.

 정 사장의 사업 전략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각 단계에는 이를 실천할 섬세한 노하우들이 접목돼 있다.

입구에 비치된 블랙보드에 정 사장이 직접 써 넣은 안내문과 만화 캐릭터(위). 손님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카운터에서 안 보이는 쪽에 놓은 서비스용 커피 머신(아래).
 먼저 1단계는 ‘일단 들어오게 하기’다. 2년 전 ‘현이와 양이’를 인수해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정 사장은 영등포 역사(驛舍)부터 올라갔다. 역사 통유리 너머로 가게를 내려다보고는 가로수나 다른 건물들에 안 가려지는 외벽 공간을 찾았다. 가게 재개업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걸기 위해서였다. 통유리 밖을 보고 섰거나 담배를 피우는 손님은 십중팔구 열차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남는 고객들일 터이니 이들을 모시자는 생각이었다. 내부 공사도 입구 쪽에 크게 손을 댔다. 자판기·냉장고·과자 매대를 안쪽 기역자로 꺾이는 벽면으로 돌리고 신간 코너를 집중 배치했다. 입구에는 불빛이 들어오는 블랙보드를 설치한 뒤 직접 손으로 신간 목록을 써 넣고 한쪽 귀퉁이에 앙증맞은 만화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신간 목록을 수시로 다시 써 넣지만 가장 큰 글자인 ‘신간 100%’는 늘 그대로 둔다. 실제 현이와 양이에는 국내에 출간되는 모든 신간 만화가 다 비치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 사장은 “한 달 평균 신간 값으로 250만~300만원이 나가지만 아깝지 않다. 손님들이 들어오고 싶게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기’다. 이 단계에서는 손님을 향한 정 사장의 배려심이 곳곳에 묻어난다. 30여 개 소파는 팔걸이가 널찍한 제품을 들여 옆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각 소파마다 2층짜리 작은 탁자를 앞에 뒀다. 아래쪽엔 발을 뻗어 올릴 수 있고 위칸에는 뽑아온 책을 올려 놓는 공간으로 쓸 수 있다. 좌석 배열도 특이하다. 모르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모든 소파가 안쪽 벽면을 보도록 한 방향으로 배치했다. 잠이 부족한 인근 직장인들을 위해 뒤로 완전히 젖혀지는 사우나식 의자 6개를 갖췄고, 눈이 침침한 장년층 독자를 위해 도수가 다른 돋보기도 2개 비치했다. 다른 가게와 달리 라이터·커피·사탕·녹차·둥굴레차도 무료로 서비스한다. 자판기를 카운터에서 안 보이는 쪽에 배치한 점도 색다르다. 정 사장은 “손님들이 주인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달 커피믹스 값으로 10만원, 6개월마다 라이터 1000개 값으로 12만원씩 목돈이 들어가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고객들이 공짜 커피 이상의 가치를 돌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 데이트족들이 서로 머리를 기대고 만화를 볼 수 있도록 가운데 팔걸이가 없는 2인용 소파를 둔 것, 여성 고객을 위한 무릎 담요, 남자친구가 만화 볼 때 심심하지 않도록 만든 여성용 잡지 진열대, ‘나는 이쑤시개입니다’라고 직접 써 붙인 이쑤시개통, 끈적끈적하게 잘 까지지 않는 사탕 대신 금세 입에 넣을 수 있는 고급 사탕을 비치한 것 등도 손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한 작은 장치들이다. 정 사장은 “이 가게에 오는 손님은 누구든지 최대한 편안하고 즐겁게 있다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뭐든 준비한다”고 했다.

 마지막은 ‘또 오고 싶게 하기’다. 시간당 1500원씩 받지만 과자나 컵라면 등을 팔다보면 100원 단위의 자투리 계산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정 사장은 이런 돈을 안 받는다. “4200원인데 4000원만 주세요”하는 식이다. 이런 인심이 좋아 단골이 된 고객들은 나중엔 4800원이 나오면 5000원을 주면서 “잔돈 됐어요. 안 받으신 적도 많은데요 뭐.” 이러면서 나간다. 정 사장은 “재래시장에 가면 덤이라는 게 있고, 1200원 콩나물값을 1000원으로 깎아주는 정이 있지만, 대형마트는 몇백 몇십원까지 정확히 받잖아요. 만화가게는 대형마트처럼 운영하면 망해요. 재래시장처럼 해야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가나 역세권에 상권만 보고 차린 신식 만화카페들 가운데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하는 것은 만화방의 ‘재래시장 속성’ 파악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만화가게의 본업인 볼거리를 충분히 확보하고 정감 넘치게 손님을 대하지 않으면 아무리 고급스럽게 꾸며도 망한다는 것이다.

 정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만화 매니어는 아니었다. 고교 졸업 후 대전의 한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사표를 냈다. 다니기 싫던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전화가 계속 오자 피신하려고 간 곳이 주택가 인근의 한 만화방이었다. 1985년, 그러니까 갓 스무 살 때였다. 거기서 처음 접한 만화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다 못 보고 빌려가는데 주인이 이름도 전화번호도 안 묻고 빌려주는 게 신기했다. ‘안 갖다 주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이 들수록 미안해서라도 더 갖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이 만화방 단골이 된 뒤 직접 경영하게 됐다. 정 사장이 손을 대면서 가게가 번창하자 하루는 다른 만화방 주인이 찾아와 “가게를 바꾸자”고 했다. 정 사장은 바꾼 만화방을 다시 크게 키운 뒤 대전역 인근으로 진출했다. 대전역에서 성공을 거둔 뒤엔 인천 주안에 있는 한 가게를 인수했다. 손님이 없어 문 닫을 지경이던 이 만화방에 손님이 몰리자 하루는 건물 주인이 찾아왔다. 그는 “전 주인이 만화 산업은 이제 죽었다고 하더니 그게 아닌가 봐”라며 직접 경영해볼 뜻을 비쳤다. 현이와 양이 인수 전까지 네 번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정 사장은 한 번도 가게를 부동산에 내놓지 않았지만 ‘팔지 않겠느냐’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정 사장은 “큰돈 없는 사람들이 하는 장사라 최소한의 권리금과 실제 들어간 시설비 정도만 받고 넘겼다. 나는 다시 창업해도 성공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7년간 쌓인 깨알 같은 만화방 운영 노하우를 듣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정 사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화가게요, 안 죽었어요. 하기 나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