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전형화 기자]
초록이 불타는 것처럼 선명한 숲을 지나니 그곳이 나왔다. 지브리 미술관. 일본 도쿄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성지다. 예약 없이 갈 수 없는 이곳에 특별한 건 없다. 그저 미야자키 하야오와다카하다 이사오 두 거장의 지난 생이 알알이 새겨져 있을 뿐. 옥상에 있는 거신병 인형과 사진 한 장 찍는 건 순례자라면 꼭 해야 할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사진제공=대원미디어
2010년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를 내놨을 때 그곳을 찾았다. 아쉽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없었고, 그와 반평생을 함께 해온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한국 기자들을 맞았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미국 LA에 있는 디즈니 본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작다. 오렌지 나무가 회사 부지에서 자라는 디즈니 본사와는 달리 지브리는 좁은 건물 1층 반평도 되지 않는 유리벽에서 애니메이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폈다. 이 작은 곳에서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은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이 탄생했다.
이런 애니메이션 명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시대 흐름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20일 일본 뉴스사이트 인포시크에 따르면 지난 19일 일본 전역에서 신작 '추억의 마니'를 개봉한 스튜디오 지브리는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은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하지 않고, 저작권 관리만 하겠다는 뜻. 사실상 지브리의 해체나 다를 바 없다.
지브리 스튜디오 해체는 지난해부터 공공연한 비밀 일만큼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파다했다. 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마지막 연출작이라고 내놓은 '바람이 분다'가 116억 엔(약 1178억 원)을 벌어들였지만 지브리의 또 다른 얼굴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수입이 51억 엔(약 518억 원)에 그치며 회사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사실 '마리 밑 아리에티'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내놨을 때도 위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후계자를 만들지 못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1997년 '모노노케 히메' 발표 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4년만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내놨다. 마땅히 맡길 만한 연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은퇴를 선언했다가 기획만 하기로 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연출해야 했다.
당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연출하려 했으나 이견 탓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하차했기 때문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그 후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늑대아이'를 내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로 떠올랐다.
정작 지브리 스튜디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게드전기'를 실패하고, '고쿠리코 언덕에서'를 내놨지만 좋은 평가는 듣지 못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불리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마루 밑 아리에티' 역시 썩 좋은 평가는 못 얻었다.
기자가 지브리 미술관을 거쳐 지브리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는 마침 이 즈음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2008년 '벼랑 위의 포뇨'를 힘겹게 만든 뒤 유작이라고 결심한 '바람이 분다'를 준비 중이었다.
후계자는 없고, 성장 동력도 없고, 회사는 경영난에 시달릴 즈음이었던 것이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일본에서 하청을 주는 대신 유일하게 직원들을 모두 고용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회사였다. '바람의 나우시카' 이후 이런 시스템을 고수해왔다. 다른 곳은 소수의 직원만 두고 프로젝트마다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했다가 해산한다. 지브리의 이런 방침은 일본의 평생직장과 장인정신으로 추앙받아왔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그동안 3D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세계 애니메이션 흐름에 맞지 않게 2D 애니메이션을 고수해왔다. 장인의 고집이었다.
하지만 2D 애니메이션은 인건비가 상당하다. 인건비가 경영을 압박하면서 더 이상 지브리가 버틸 수 있는 여력을 넘어섰다. 연 인건비만 20억엔(약 203억원) 정도 수준이라 매년 100억엔(약 1015억원)수입이 있어야 유지가 가능했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이미 지난해부터 직원들을 해고해왔으며, 더 이상 추가 채용은 없다는 게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알음알음 퍼졌었다.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 깊이 새겨진 명작들을 내놓은 지브리 스튜디오도 3D애니메이션 홍수라는 시대 흐름은 이겨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바람이 분다'는 제로센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미야지카 하야오 감독은 '바람이 분다'를 앞두고 한국기자들을 초대했다. 좀처럼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한국에는 '바람이 분다'를 직접 설명하고 싶었던 듯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바람이 분다'에서 미친바람이 부는 시대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진심은 적어도 한국에선 통하진 않았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당시 기자에게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3D 애니메이션에 대해 "유행은 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셀 애니메이션이 지브리의 세일즈 포인트"라며 "앞으로도 3D 애니메이션을 만든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지브리가 사랑받는 이유는 예전 것을 잘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심과 지브리의 고집은 결국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손맛이 주는 애니메이션의 따스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차가운 3D 캐릭터가 사랑 받는다. 마침 일본에선 '겨울왕국'이 역대 흥행 2위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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