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애니메이션

열혈강호, 18년 장수 ‘섹시 무협’ 탄생비화 “술이죠”

youngsports 2012. 11. 22. 17:10

 

장수 만화가 드문 한국에서 무협 만화 〈열혈강호〉는 잡지 연재 18년을 넘겼다. 만화가 양재현(오른쪽)씨와 스토리작가 전극진씨의 오랜 콤비 작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찰떡궁합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두 사람이지만 실제 작업을 할 때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 일쑤라고 한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리는 짝] ‘열혈강호’ 콤비 양재현-전극진

오기와 취기로 만든 게 벌써 18년 최장수 만화, 무협에 섹시·코믹함 버무려 성인 눈길 사로잡아
“완결은 언제 나오냐고요? 독자가 결정하겠죠”

 

1994년 4월 초, 서울 종로의 한 술집에선 두 남자의 이야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스물네 살 신출내기 만화가 양재현과 역시 신예 스토리작가였던 스물여섯 청년 전극진은 그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 만나 형 동생이 된 두 사람은 정성껏 만든 만화를 들고 출판사에 다녀온 길이었다. 작품을 본 출판사에선 곧 창간하는 성인 만화 잡지에 연재를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만화 시장에선 무협도, 에스에프도, 판타지도 인기가 없었는데 둘의 만화는 하필이면 이 세 가지를 모두 섞은 것이었다. 만화잡지 중에서 ‘주류’인 청소년 잡지가 아니라 독자가 적은 성인 만화지에, 그것도 자리 잡은 기존 잡지가 아니라 창간하는 잡지에 연재하라는 것은 만화가에겐 ‘좌천’ 같은 일이었다. 양재현은 그 자리에서 ‘선언’을 하듯 외쳤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드린 원고는 없애버리세요. 출판사 쪽에서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집어넣어서 새 만화를 만들어 올 겁니다.”

 

■ 하룻밤 사이에 완성된 플롯-한국 최장수 만화를 탄생시키다 바로 그날 새 만화를 구상하자며 시작한 술자리는 한없이 계속됐다. 가슴에선 오기가 치솟고, 머리에선 새 이야기가 쏟아져나와 취기를 느낄 틈이 없었다.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한 명이 이어 받아 탁구공을 주고받듯 대화가 오가면서 이야기에는 뼈대가 짜이고 살이 붙었다. 두 사람이 술집을 나선 것은 다음날 새벽 4시. 둘의 머릿속에는 한 편의 만화 플롯이 완성되어 있었다. 코믹하면서도 섹시한 무협 만화, 그림은 한껏 폼나면서도 내용은 가볍고 상큼한 만화, 그 만화가 한 달 뒤 새 성인만화 잡지 <영 챔프>에서 연재를 시작한 <열혈강호>였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자신들이 이 만화를 얼마나 오래 그리게 될 것인지.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만화의 최전성기였고, 치열한 경쟁 탓에 인기가 없으면 바로 연재에서 빠지기 일쑤여서 연재 6개월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열혈강호>는 첫 회에 바로 독자 투표 1위를 차지하더니, 다음호에도, 그리고 첫해 내내, 그 다음해에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초기 성인 만화였던 <열혈강호>는 잡지가 청소년용으로 바뀌면서 청소년 만화로 변했지만 인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재현(42)·전극진(44) 콤비의 <열혈강호>는 ‘기록적인 만화’다. 현재 58권까지 나온 이 만화는 한국 만화 판매 집계 이래 가장 많이 팔린 ‘잡지 연재 만화’(코믹스·500만부 이상)이고, 일본·타이·인도네시아·베트남·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온라인 게임으로 여러 버전이 만들어진 것은 물론이고 영화와 드라마 판권도 팔렸다. 90년대 이후 가장 성공한 한국 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만화의 꾸준함이다. 극화 만화 사상 최장수 잡지 연재만화라는 타이틀처럼 자랑스런 수식어도 없을 것이다.

〈열혈강호〉의 남자주인공 한비광(왼쪽)과 여자주인공 담화린. ⓒ전극진·양재현/대원씨아이

 

■ 김용과 시티헌터 사이-한국형 코믹 무협의 지존이 되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열혈강호> 그 자체로 살아왔다. 스토리작가인 전씨는 다른 작품도 종종 함께 하지만 만화가 양씨는 오로지 이 만화 하나만 그린다. 한국 만화계에서 만화가가 한 작품만 이렇게 오래 하는 것도, 만화가-스토리작가 콤비가 이토록 오래 공동 작업하는 것도 유례가 없다.

“둘 다 만화 전공이 아닌데도 만화가 평생의 길이 되었요. 로봇을 만들고 싶어 전자공학과에 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로봇이 아니라 로봇만화더라고요.(웃음) 처음에는 다른 만화가와 작업을 했는데 재현이가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서 바로 받아들였어요. 워낙 실력이 좋으니까요.” (전극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해서 용감’했던 거에요. 원래 꿈은 애니메이션이었고 잠깐 ‘아르바이트 한다’는 생각으로 만화를 시작했는데 운이 좋게 데뷔를 했어요. 그런데도 문하생이 찾아오길래 그 친구한테 만화가들은 어떤 펜촉을 쓰는지 어떤 물감으로 그리는지 배워가며 그렸어요. 쉽게 데뷔해 건방 떨다가 한 번 실패한 다음 도전한 게 <열혈강호>였죠.”(양재현)

두 사람을 이어준 고리는 ‘무협’, 그리고 일본의 걸작 만화 <시티 헌터>였다. 중국 작가 진용(김용)의 무협소설과 <시티 헌터>의 광팬이었던 두 사람은 오기 반, 오마주 반으로 당시 출판사가 원하던 코드인 코믹함과 섹시함을 무협이란 장르에 집어넣으며 <시티 헌터>처럼 그림이 멋지고 내용은 가볍게 웃기는 만화를 시도했다. 주인공 ‘한비광’이란 이름은 전씨가 창작한 것이고, 또다른 주인공 ‘담화린’은 전씨가 좋아하는 무협작가 사마달의 작품 등장인물을 가져와 오마주한 것이었다. 독자들은 일본 만화를 뺨치는 정교하고 세련된 그림, 그리고 거의 매쪽 빵빵 터지는 개그에 열광했다.

만화가 양재현(오른쪽)씨와 스토리작가 전극진씨.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원수처럼 처절하게 싸우는 황금 콤비 <열혈강호>는 두 사람을 가장 성공한 만화가와 스토리작가로 만들어줬다. 대본소와 잡지 만화를 병행하던 선배 만화가 세대들, 그리고 요즘 후배 웹툰 작가들 사이에 ‘낀 세대’를 대표하는 중진이 됐다. 하지만 <열혈강호>의 두 주인공 한비광과 담화린은 결코 늙지 않으며 변함없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만화 시작한 이래로 쉬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쉬워요. 저한테는 젊은 시절의 추억 같은 것들이 없거든요.” 양씨는 <열혈강호>가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최장수 만화를 만들어낸 콤비지만 실은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거의 매번 싸우기 일쑤라고 한다. “제가 원고를 늦어도 아주 늦게 보내주거든요.” 스토리작가 전씨가 먼저 이실직고를 하자 가차없이 만화가 양씨의 성토가 시작됐다. “다른 작가라면 작품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늦게 보내요. 거기에 형은 여러 작품을 하니까 아이디어가 분산되고, 저는 하나만 하니까 하나에 다 쏟아붓고 싶고. 그래서 자주 싸웠어요.”(양)

그런데도 찰떡궁합인 것은 섬세하고 집요한 만화가와 차분하고 이해심 많은 스토리작가의 성향이 서로 보완을 해주는 덕분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작업이 물리적 역할 분담으로 글과 그림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섞여 하나가 되는 방식이란 점이다. 전씨는 시나리오 형태로 글을 쓴다. 양씨는 글을 그대로 그림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영화감독처럼 자기 생각을 더하고 수정해 완성한다. 마감에 대해선 서로 질타하기 바빴던 두 사람은 일에 관해서는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형이 쓴 원고를 읽고 있으면 제가 쓴 것 같아요.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써 준 느낌? 마감은 늦지만 이야기 만드는 내공은 대단해요. 이야기가 매끄러운 정도로는 안되요. 재미가 있어야죠. 그걸 해내는 사람이예요.”(양)

“사실 저는 폼만 잡는 걸 썼는데 재현이가 코믹한 것으로 해석을 잘해서 <열혈강호>가 탄생했어요. 재현이가 말은 썰렁하게 하는데 그림은 재미있게 그리거든요. 저는 간략하게 쓰고 넘어가는 부분을 재현이가 늘린 것을 보면 제가 봐도 재미있어요.”(전)

〈열혈강호〉의 남자주인공 한비광(왼쪽)과 여자주인공 담화린. ⓒ전극진·양재현/대원씨아이

 

■ 이젠 작가들 마음대로 끝낼 수 없는, 그래서 멋지게 끝내고 싶은 해를 거듭하면서 <열혈강호>는 자기 스스로 생명력을 얻었다. 1970~80년대생 독자들의 아이콘이 된 이 만화는 학생 독자들이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을 돌아볼 나이가 된 지금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그들은 반겨준다. 성인을 위한 성인만화가 아니라 성인들이 어렸을 적부터 보면서 함께 나이 먹어간 성인만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에겐 이 대작의 마무리가 가장 큰 고민이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옛 모습이 사라져 실망하지만 ‘열혈강호’는 끝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어요. 정말 최고로 끝내는 것, 그게 저희 둘의 소망입니다.”(양)

그러면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까? “이젠 언제 끝낸다고 말을 못해요. 저희도 솔직히 모르니까요. 인생이란 게 흐름을 타면 거기 묻어서 가는 것 같아요.”(전) “저는 무섭더라고요. 의지대로 되지 않고 팬들의 반응 속에서 작품이 살아 움직이면서 저희를 끌고 가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해야죠. 그냥 그 시기에 저희 만화가 필요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양) 두 사람은 “욕심으로는 20년 채우고 끝내면 좋겠다”면서 정확한 시기는 자신들도 모른다고 했다. 결국 독자들이 결정해 줄 것이란 이야기다.

 

■ 만화, 평생 해도 재미있어요 vs 이건 고행이에요, 고행 두 사람에게 지난 18년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런 기간이기도 했다. 만화는 단순 반복 노동이 많아 지루함과의 싸움이 작업의 관건이다. 전극진씨는 “그렇지만 여전히 만화란 일은 즐겁다”고 말한다. 반면 양재현씨는 단호하게 “좋아하던 것이 직업이 되면 재미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모든 작품에는 그 작가가 살아온 시기가 담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열혈강호는 정말 치기 어린 스물네 살 감성으로 그린 이야기를 마흔세 살 감성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 간극은 엄청납니다. 처음처럼 유지해나가면서도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요. 이건 고행입니다, 고행.” 양씨는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며 인터뷰 중간에 약을 챙겨 먹기도 했다.

경이로운 히트작을 만들었으니 차기작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을까? 바로 “그런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열혈강호>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작품이란 게 꼭 히트를 쳐야 좋은 건 아니잖아요.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 기회가 오면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이죠.”

두 사람은 90년대 인터뷰를 했을 때와 그리 변하지 않은 듯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며 함께 길을 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 티격태격하면서 난관을 헤쳐나가는 한비광과 담화린이 겹쳐 보였다. 만화를 오래 연재하다보면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을 닮게 되는 것일까.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출처: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