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만화가 드문 한국에서 무협 만화 〈열혈강호〉는 잡지 연재 18년을 넘겼다. 만화가 양재현(오른쪽)씨와 스토리작가 전극진씨의 오랜 콤비 작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찰떡궁합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두 사람이지만 실제 작업을 할 때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 일쑤라고 한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우리는 짝] ‘열혈강호’ 콤비 양재현-전극진
오기와 취기로 만든 게 벌써 18년 최장수 만화, 무협에 섹시·코믹함 버무려 성인 눈길 사로잡아“완결은 언제 나오냐고요? 독자가 결정하겠죠”
1994년 4월 초, 서울 종로의 한 술집에선 두 남자의 이야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스물네 살 신출내기 만화가 양재현과 역시 신예 스토리작가였던 스물여섯 청년 전극진은 그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 만나 형 동생이 된 두 사람은 정성껏 만든 만화를 들고 출판사에 다녀온 길이었다. 작품을 본 출판사에선 곧 창간하는 성인 만화 잡지에 연재를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만화 시장에선 무협도, 에스에프도, 판타지도 인기가 없었는데 둘의 만화는 하필이면 이 세 가지를 모두 섞은 것이었다. 만화잡지 중에서 ‘주류’인 청소년 잡지가 아니라 독자가 적은 성인 만화지에, 그것도 자리 잡은 기존 잡지가 아니라 창간하는 잡지에 연재하라는 것은 만화가에겐 ‘좌천’ 같은 일이었다. 양재현은 그 자리에서 ‘선언’을 하듯 외쳤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드린 원고는 없애버리세요. 출판사 쪽에서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집어넣어서 새 만화를 만들어 올 겁니다.”
■ 하룻밤 사이에 완성된 플롯-한국 최장수 만화를 탄생시키다 바로 그날 새 만화를 구상하자며 시작한 술자리는 한없이 계속됐다. 가슴에선 오기가 치솟고, 머리에선 새 이야기가 쏟아져나와 취기를 느낄 틈이 없었다.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한 명이 이어 받아 탁구공을 주고받듯 대화가 오가면서 이야기에는 뼈대가 짜이고 살이 붙었다. 두 사람이 술집을 나선 것은 다음날 새벽 4시. 둘의 머릿속에는 한 편의 만화 플롯이 완성되어 있었다. 코믹하면서도 섹시한 무협 만화, 그림은 한껏 폼나면서도 내용은 가볍고 상큼한 만화, 그 만화가 한 달 뒤 새 성인만화 잡지 <영 챔프>에서 연재를 시작한 <열혈강호>였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자신들이 이 만화를 얼마나 오래 그리게 될 것인지.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만화의 최전성기였고, 치열한 경쟁 탓에 인기가 없으면 바로 연재에서 빠지기 일쑤여서 연재 6개월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열혈강호>는 첫 회에 바로 독자 투표 1위를 차지하더니, 다음호에도, 그리고 첫해 내내, 그 다음해에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초기 성인 만화였던 <열혈강호>는 잡지가 청소년용으로 바뀌면서 청소년 만화로 변했지만 인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재현(42)·전극진(44) 콤비의 <열혈강호>는 ‘기록적인 만화’다. 현재 58권까지 나온 이 만화는 한국 만화 판매 집계 이래 가장 많이 팔린 ‘잡지 연재 만화’(코믹스·500만부 이상)이고, 일본·타이·인도네시아·베트남·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온라인 게임으로 여러 버전이 만들어진 것은 물론이고 영화와 드라마 판권도 팔렸다. 90년대 이후 가장 성공한 한국 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만화의 꾸준함이다. 극화 만화 사상 최장수 잡지 연재만화라는 타이틀처럼 자랑스런 수식어도 없을 것이다.
〈열혈강호〉의 남자주인공 한비광(왼쪽)과 여자주인공 담화린. ⓒ전극진·양재현/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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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양재현(오른쪽)씨와 스토리작가 전극진씨.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열혈강호〉의 남자주인공 한비광(왼쪽)과 여자주인공 담화린. ⓒ전극진·양재현/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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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평생 해도 재미있어요 vs 이건 고행이에요, 고행 두 사람에게 지난 18년은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런 기간이기도 했다. 만화는 단순 반복 노동이 많아 지루함과의 싸움이 작업의 관건이다. 전극진씨는 “그렇지만 여전히 만화란 일은 즐겁다”고 말한다. 반면 양재현씨는 단호하게 “좋아하던 것이 직업이 되면 재미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모든 작품에는 그 작가가 살아온 시기가 담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열혈강호는 정말 치기 어린 스물네 살 감성으로 그린 이야기를 마흔세 살 감성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 간극은 엄청납니다. 처음처럼 유지해나가면서도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요. 이건 고행입니다, 고행.” 양씨는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며 인터뷰 중간에 약을 챙겨 먹기도 했다. 경이로운 히트작을 만들었으니 차기작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을까? 바로 “그런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열혈강호>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작품이란 게 꼭 히트를 쳐야 좋은 건 아니잖아요.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 기회가 오면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이죠.” 두 사람은 90년대 인터뷰를 했을 때와 그리 변하지 않은 듯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며 함께 길을 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 티격태격하면서 난관을 헤쳐나가는 한비광과 담화린이 겹쳐 보였다. 만화를 오래 연재하다보면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을 닮게 되는 것일까.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출처: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