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혜진 "정치 선동? 차가운 시선 마음 아파"(인터뷰)
[SBS E!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어느 것 하나 쉬운 신이 없었어요. 촬영 전에 마음을 다잡고 가도 감정의 수위조절이 쉽지가 않더라고요"
한혜진은 영화 '26년'(감독 조근현, 제작 청어람)을 통해 연기의 깊이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데뷔 한지 10년 남짓 되었고, '굳세어라 금순아', '주몽' 등 비교적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연기의 깊이에 있어서만큼은 늘 목마름이 있었던 그녀였다.
그러다 우연히 '26년'이라는 작품을 만났다. 이미 여러 명의 여배우의 손을 탄 시나리오였지만, 한혜진은 읽는 순간 '꽂혀' 버리고 말았다. 본인이 하지 않으면 아까워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가 막힌 캐릭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불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에 대한 신념으로 삶을 지탱하는 '심미진'이라는 역할이었다.
심미진은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가득 채운 화염과 총구 속에서 가족을 잃는 비운의 여인이다. 국가대표 사격선수가 되고 나서도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었다. 수개월간 심미진으로 살아야 했던 한혜진은 실제로 그 비극의 감정 속에 오랫동안 빠져있었다. 그 뜨거움이 너무도 강렬해, 촬영을 마친 지금도 그 감정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한혜진에게 '26년'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대표작이 되었다. 넓이에 비해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33살의 여배우는 억눌린 분노를 담담하게 이끌고 가다 클라이맥스에서 제대로 터트려냈다. 관객들은 그녀의 총구가 향하는 곳에 시선을 함께 가져갔고, 스크린 밖에서 한 소리로 외쳤다.
쏴! 쏘라고!.
◆ "김아중 대타? 주인은 따로 있나 봐요"
'26년'은 2008년 '29년'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에 들어갔다. 당시 '심미진'이라는 역할에 김아중이 캐스팅 됐었고, 이후에는 김민정에게도 제안이 갔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제작이 무산되면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4년 만에 제작이 재개되었을 때 '심미진'이라는 역할은 한혜진의 품안에 들어왔다.
"결국엔 내 역할이었구나 싶었다. 신기한 게 처음 캐스팅됐던 김아중 씨도 우리 회사고, 그 후에 제안이 갔던 김민정 씨도 과거 우리 회사 식구였다. 그래서 내가 소속사 사장님에게 "봐봐요. 결국엔 내 거였잖아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나에게 왔지만 생각해보면 주인은 정해져있었나보다"
한혜진은 시나리오를 본 순간 '심미진'이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만류했다. 4년 전에도 외압에 의해 제작이 무산될 만큼 보이지 않은 손이 많이 작용하는 작품이었다. 충무로의 감독들과 배우들이 연출과 출연을 꺼렸던 것도 외압에 대한 우려가 적잖았다.
그러나 한혜진은 "마음이 가는 역할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리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면서 "여배우가 이런 역할을 만나기가 쉬울까 싶었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혜진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26년'은 개봉 첫날부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화제와 이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 "원작과 비교 불가피, 호·혹평 모두 이해돼"
제작 당시부터 '26년'은 '26년'과의 싸움이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원작 웹툰은 영화 '26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35회에 이르는 방대한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축약됐고, 캐릭터도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이는 원작 팬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요소였다.
"워낙 화제의 웹툰이었기에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팬들의 기대가 컸다. 몇몇 분들은 분명 웹툰보다 못하다고 하실 수도 있다. 호평만큼이나 혹평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감독님이 촬영 초기부터 이야기하신 것이 원작을 꼼꼼히 읽어보되 너무 치중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보니 최대한 캐릭터를 띄워서 연기하려고 했다"
한혜진은 캐스팅 후 원작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원작 속 심미진을 따라하는데 치중하게 될까봐였다. 그러다 조근현 감독으로부터 "웹툽을 보되 인물의 삶과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작을 정독했다. 그 이후 어느 것 하나 쉬운 신이 없다고 느꼈던 촬영에서 어느 정도 중심을 잡아가게 됐다.
"모든 신이 의미가 있고 임팩트가 있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미진의 감정에 대한 수위조절이었다. 왜냐면 이 인물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근데 후반부로 갈 수도 미진의 감정을 드러내는 신들이 나온다. 촬영을 연이어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대본을 죽어라 보면서, 현장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고, 미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분명 한혜진은 한단계 성숙해졌다.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분노를 가슴에 억누르고 있다가, 후반부 제 안의 분노과 절규, 고통과 슬픔을 폭넓게 분출해냈다.
◆ "정치 선동 영화? 마음 아프다"
정치의 계절에 등장한 다소 민감한 소재의 영화이기에 '26년'을 둘러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시즌을 의식하고, 또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영화가 아니냐는 시선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개봉했고, 또 소재가 소재다 보니 정치적인 것을 연루해서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런 아픔이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가슴이 아프다. 왜 그렇게 비꼬아서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더 오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보시고 나면 그런 시선과 오해가 풀리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가 단지 누군가에 대한 복수, 단죄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보다도 비극의 희생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한혜진은 '26년'을 찍기로 한 순간부터 스스로도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른바 악플러들의 공격이었다. 한혜진은 "트위터로 가장 많은 반응들을 접할 수 있었다"면서 "'어떻게 정치 선동 영화에 출연할 수 있냐. 실망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 왜 이용당하고 있는 거 모르냐' 등의 멘션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 분들의 생각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영화를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라는 믿음밖에는 가질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악플러들이 있는 반면, '26년'의 뒤에는 1만 5천명의 든든한 지원군도 있었다. 바로 '제작 두레' 방식을 통해 영화에 힘을 보태준 관객들이었다. 한혜진은 제작두레 회원들과 함께한 시사회를 떠올리며 "무대인사를 할 때 감독과 배우가 등장하자 뜨겁게 환호해주시고 '너무 수고 많았다'고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뭉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우이기 전에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한혜진도 제작두레에 참여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투자를 했다. 한혜진은 "어머니의 성이 홍씨라 엔딩 크레디트에 가장 뒷부분에 나오시는데, 어머니가 영화가 끝나도 한참을 안 나오시더라. 알고보니 자신의 이름을 스크린에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비단 한 사람만의 감격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 힘을 보탠 1만 5천명의 관객이 한 마음으로 느낀 감동일 것이다. 한혜진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인 동시에 자발적 투자자로서 곱절의 감동을 느끼고 있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깊고 진한 감정일 것이다.
ebada@sbs.co.kr
한혜진은 영화 '26년'(감독 조근현, 제작 청어람)을 통해 연기의 깊이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데뷔 한지 10년 남짓 되었고, '굳세어라 금순아', '주몽' 등 비교적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연기의 깊이에 있어서만큼은 늘 목마름이 있었던 그녀였다.
심미진은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가득 채운 화염과 총구 속에서 가족을 잃는 비운의 여인이다. 국가대표 사격선수가 되고 나서도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었다. 수개월간 심미진으로 살아야 했던 한혜진은 실제로 그 비극의 감정 속에 오랫동안 빠져있었다. 그 뜨거움이 너무도 강렬해, 촬영을 마친 지금도 그 감정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한혜진에게 '26년'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대표작이 되었다. 넓이에 비해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33살의 여배우는 억눌린 분노를 담담하게 이끌고 가다 클라이맥스에서 제대로 터트려냈다. 관객들은 그녀의 총구가 향하는 곳에 시선을 함께 가져갔고, 스크린 밖에서 한 소리로 외쳤다.
쏴! 쏘라고!.
'26년'은 2008년 '29년'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에 들어갔다. 당시 '심미진'이라는 역할에 김아중이 캐스팅 됐었고, 이후에는 김민정에게도 제안이 갔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제작이 무산되면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4년 만에 제작이 재개되었을 때 '심미진'이라는 역할은 한혜진의 품안에 들어왔다.
"결국엔 내 역할이었구나 싶었다. 신기한 게 처음 캐스팅됐던 김아중 씨도 우리 회사고, 그 후에 제안이 갔던 김민정 씨도 과거 우리 회사 식구였다. 그래서 내가 소속사 사장님에게 "봐봐요. 결국엔 내 거였잖아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나에게 왔지만 생각해보면 주인은 정해져있었나보다"
한혜진은 시나리오를 본 순간 '심미진'이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만류했다. 4년 전에도 외압에 의해 제작이 무산될 만큼 보이지 않은 손이 많이 작용하는 작품이었다. 충무로의 감독들과 배우들이 연출과 출연을 꺼렸던 것도 외압에 대한 우려가 적잖았다.
그러나 한혜진은 "마음이 가는 역할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리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면서 "여배우가 이런 역할을 만나기가 쉬울까 싶었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혜진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26년'은 개봉 첫날부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화제와 이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제작 당시부터 '26년'은 '26년'과의 싸움이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원작 웹툰은 영화 '26년'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35회에 이르는 방대한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축약됐고, 캐릭터도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이는 원작 팬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요소였다.
"워낙 화제의 웹툰이었기에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팬들의 기대가 컸다. 몇몇 분들은 분명 웹툰보다 못하다고 하실 수도 있다. 호평만큼이나 혹평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감독님이 촬영 초기부터 이야기하신 것이 원작을 꼼꼼히 읽어보되 너무 치중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보니 최대한 캐릭터를 띄워서 연기하려고 했다"
한혜진은 캐스팅 후 원작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원작 속 심미진을 따라하는데 치중하게 될까봐였다. 그러다 조근현 감독으로부터 "웹툽을 보되 인물의 삶과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작을 정독했다. 그 이후 어느 것 하나 쉬운 신이 없다고 느꼈던 촬영에서 어느 정도 중심을 잡아가게 됐다.
"모든 신이 의미가 있고 임팩트가 있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미진의 감정에 대한 수위조절이었다. 왜냐면 이 인물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근데 후반부로 갈 수도 미진의 감정을 드러내는 신들이 나온다. 촬영을 연이어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대본을 죽어라 보면서, 현장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고, 미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분명 한혜진은 한단계 성숙해졌다.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분노를 가슴에 억누르고 있다가, 후반부 제 안의 분노과 절규, 고통과 슬픔을 폭넓게 분출해냈다.
정치의 계절에 등장한 다소 민감한 소재의 영화이기에 '26년'을 둘러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시즌을 의식하고, 또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영화가 아니냐는 시선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개봉했고, 또 소재가 소재다 보니 정치적인 것을 연루해서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런 아픔이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가슴이 아프다. 왜 그렇게 비꼬아서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더 오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보시고 나면 그런 시선과 오해가 풀리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가 단지 누군가에 대한 복수, 단죄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보다도 비극의 희생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한혜진은 '26년'을 찍기로 한 순간부터 스스로도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른바 악플러들의 공격이었다. 한혜진은 "트위터로 가장 많은 반응들을 접할 수 있었다"면서 "'어떻게 정치 선동 영화에 출연할 수 있냐. 실망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 왜 이용당하고 있는 거 모르냐' 등의 멘션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 분들의 생각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영화를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라는 믿음밖에는 가질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악플러들이 있는 반면, '26년'의 뒤에는 1만 5천명의 든든한 지원군도 있었다. 바로 '제작 두레' 방식을 통해 영화에 힘을 보태준 관객들이었다. 한혜진은 제작두레 회원들과 함께한 시사회를 떠올리며 "무대인사를 할 때 감독과 배우가 등장하자 뜨겁게 환호해주시고 '너무 수고 많았다'고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뭉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우이기 전에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한혜진도 제작두레에 참여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투자를 했다. 한혜진은 "어머니의 성이 홍씨라 엔딩 크레디트에 가장 뒷부분에 나오시는데, 어머니가 영화가 끝나도 한참을 안 나오시더라. 알고보니 자신의 이름을 스크린에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비단 한 사람만의 감격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 힘을 보탠 1만 5천명의 관객이 한 마음으로 느낀 감동일 것이다. 한혜진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인 동시에 자발적 투자자로서 곱절의 감동을 느끼고 있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깊고 진한 감정일 것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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