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경제·사회

[질의응답] 여고생부터 회사원까지 장하준에게 묻다

youngsports 2012. 9. 25. 17:51

 

"타협도 안 하는 재벌이 백기투항하겠나?"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21일 오후 7시 30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경제 민주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를 했다. 1시간에 걸친 이날 강연에서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 장하준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동구매")

강연 후, 장 교수와 청중 사이의 질의응답이 다시 1시간여 동안 이뤄졌다. 우선 참가자들이 사전에 보낸 약 850개의 질문 중 핵심 사항들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장 교수에게 물었다. 그 다음에는 여고생, 대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청중이 무대에 올라 장 교수와 즉석에서 문답을 주고받았다.

다음은 질의응답의 주요 내용이다.

박인규 : 정치 할 뜻은 없나?
장하준 : 없다. 정치는 굉장히 중요하고 뜻있는 직업인데 적성에 맞아야 한다. 난 책 보고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남들이 안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좋아서 교수가 됐다. 그걸 버리기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이 많다. 4시간 이상 자면 정치인으로서 도태된다. 부친은 정치인으로서 잘했지만 난 잠이 많아 못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이건 지킬 자신이 있다.

박인규 : 장 교수는 재벌의 긍정적 측면을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벌이 법 위에 있는 상황에서 재벌과 타협이 되겠나?
▲ 장하준 교수. ⓒ정기훈
장하준 :
재벌들을 규제하고 혼낼 게 많이 있다.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 지배구조를 바꿀 필요가 없다. 골목상권을 침입하면, 못하게 하면 된다. 왜 자꾸 복잡하게 순환출자로 문제를 돌려 시간을 낭비하나? 탈세하면, 잡아넣으면 된다. 걸핏하면 '경제가 어렵다'는 핑계 대고 풀어주는 그런 짓을 안 하면 된다. 순환출자가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고치려면 몇 십 년 걸릴 수도 있고 그 사이에 자칫하면 국제 금융 자본이 접수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하겠는 게 있다. 왜 (재벌에게) 백기투항을 하라고 하나? 저쪽(재벌 개혁론자) 이야기는 백기투항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벌을 국민이 한판에 잡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무엇 하러 타협하자고 하겠나. 누가 순진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도 순진하지만 그런 이들이 더 순진한 것이다. 타협도 안 하는 재벌들이 무엇 하러 백기투항을 하겠나?

박인규 :
재벌과 대타협,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장하준 : 재벌이 국민경제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게 중요하다. 재벌들의 형태가 어떻게 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 사람들이 투자를 많이 하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노동자를 제대로 대해주고 무엇보다 세금
을 많이 내서 복지국가 만들어주고 법을 잘 지키고 하면, 어떤 구조로 갖고 있건 상관없다.

몇 년 전 어떤
신문에 대타협론에 대해 썼더니, 한 독자가 댓글로 '사카린 밀수한 놈들과 무슨 타협이야'라고 하더라. 그 댓글 보고 '안 되겠다' 싶어 그 다음 달에 다시 칼럼을 썼다. 더 화난 건, '장 교수가 외국에 오래 살아서 삼성이 얼마
나 나쁜지 모르는 모양인데' 하는 것이다. 내가 왜 모르겠나. 그래서 '사카린 밀수는 물론 더 나쁜 짓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근원을 따지면 깨끗한 자본은 없다'(는 글을 썼다).

미국과 영국의 자본에 비하면 삼성은 천사다. 노예 썼지, 아동노동 시켰지, 제국주의 했지, 사설 탐정단을 고용해 파업하는 노동자들 쏴 죽였지, 미국 원주민들 다 쫓아내고 죽였지…. 비교가 되나? 삼성을 용서해주자는 게 아니다. 지금 가능하고 필요한 게 뭐냐(를 보자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것(한국 기업
)이 국제 금융 자본에 접수되지 않도록 하고, 국제 금융 자본과 야합을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 하고 있다. 그전에 빨리 그걸 떼어내 '너희는 국민의 기업이야, 너희 일부는 국민 것이야'라고 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 경제에 묶어 국민에게 진 빚을 갚게 할 것인지 그 방법을 모색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영국 자본에 비하면 삼성은 천사…잘못 용서하자는 건 아니다"

박인규 :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안철수 후보의 경제 민주화 방안을 어떻게 평가
하나.
장하준 : 자세히 나온 게 아직 없어서…. 안철수는 이헌재를 옆에 앉힌 것 말곤 특별히 발표한 것도 없다.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의 정책들은 큰 틀에서 비슷한 것 아닌가? 순환출자 제약
등인데 미흡하다. 민주통합당이 복지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재원 확보를 위해 세금을 올리겠다는 말은 안 한다. 조금 올리겠다고 하는 정도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하겠다고 하는 당이라면, 30-40년 목표치를 제시하고 그에 맞춰 매년 1%씩이라도 올리겠다고 해야 한다.

박인규 :
한국은 스웨덴과 달리 사민주의 정당도, 노조도 약해 복지국가를 추진할 주체가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장하준 : 보기 나름이다. 스웨덴도 처음부터 그렇게 전망이 좋은 건 아니었다. 1920년대에 스웨덴은 세계
에서 파업률 1위였다. 노사관계가 세계에서 제일 나빴다. 그때 노조 조직률이 30% 정도였다. 지금의 한국보다는 높지만, 오늘날 스웨덴(80%)보다는 훨씬 낮다. 하나하나 해 간 것이다. 시간을 갖고 하면 할 수 있다. 국민소득 80불짜리 나라가 20000불이 됐는데 복지국가 못 만들겠나?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노조가 없어서? 노조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박인규 :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한국만의 경제 민주화가 가능하겠냐는 지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세계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나.
장하준 :
위기라서 더 어려운 면도 있지만, 더 가능한 면도 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날 때까지는 신자유주의를 대세로 봤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얼마나 엉터리인지도 드러났다. 그러니 더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다. IMF가 후진국 자본통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IMF에서 미국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위기라서 새 틀을 짤 수 있다.

세계 경제? 많은 부분이 미국 선거에 달렸다. 롬니는 사실 무원칙주의자다. 돈이 된다면 무조건 하는 사람이다. 더 무서운 건 극단적 시장주의자인 부통령 후보 폴 라이언이다. 롬니가 요즘 속된말로 '닭짓'을 많이 해서 (당선이) 안 될 것 같긴 한데, 만약 되어서 미국 재정을 급격히 삭감하면 세계
경기냉각될 수 있다. 이게 당장 제일 큰 문제다. 그 다음에 유로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독일이 '유럽중앙은행을 강화하고 재정 통합을 하지 않으면 유지
가 안 되겠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는 듯한데,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시간 싸움이다. 잘 해결되더라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같은 시간이 10여 년 지속되지 않을까 한다.

▲ 장하준 교수가 무대에서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정기훈

"업그레이드 다각화와 다운그레이드 다각화 구분해야"

박혜민(광주 대성여고 2학년) : 얼마 전 삼성에 가서 기업 다각화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우리 동네만 봐도 이마트가 들어온 후 다 망했다. 서민 경제를 파탄시키고 승자 독식 사회를 고착화하는 데 (재벌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업 다각화의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책을 보면 그런 주장을 할 분이 아닌 듯한데….
장하준 : 다각화에 분명히 좋은 점이 있다.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는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업그레이드하는 다각화다. 다각화가 없었으면 삼성은 계속 양복점을 하고 현대는 길 닦고 있었을 텐데, 그걸 전자, 자동차에 넣어 기업도 크고 나라 경제도 잘됐다는 이야기였다. 재벌들이 또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에 (역량을) 써야 한다. 신소재산업이 됐건 생명공학이 됐건 태양열 전지가 됐건 해야 하는데, 그건 안 하고 치킨집 잡아먹고 소매업 같은 걸 자꾸 하려는 건 문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재벌 측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듣고 '다각화가 무조건 좋다더라' 이렇게 쓰고, 날 싫어하는 재벌 개혁론자들은 '골목상권 침해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더라' 이렇게 반응한다.

참 어렵다. 흑백 논리를 이야기하면 쉬운데…. 내가 말하는 건 '적당량의 음식과 함께 적당량의 알코올을 섭취하면 몸에 좋을 수 있습니다'인데, 한쪽은 '알코올 중독 권장하는 거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다른 쪽은 '아무 규제 없이 알코올을 다 마셔도 된다는 이야기다'라고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도 흑백 논리를 개발하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학자로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업그레이드하는 다각화와 다운그레이드하는 다각화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박인규 : 혜민 양, 오해가 풀렸나?
박혜민 : 네.

차동욱(회사원) : 경영자가 읽어야 할 책 중에 <나쁜 사마리아인>이 있더라. 우린 버스에 탄 건가, 아니면 사다리를 걷어차인 건가.
장하준 : 버스에 아직 탄 건 아니고 뒤에 매달린 상태다. 어떻게든 창문으로 기어들어가려 하면서, 발 하나 정도는 넣은 것 같다. 강조한다. 한국은 세계 역사적으로 그러지(사다리 걷어차기) 않을 의무가 있는 나라다. 지금까지 선진국들은 선진국이 된 후 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버스에 올라탈 정도가 된 게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다. 이 중 후진국의 설움과 선진국이 되면 좋은 게 뭔지 알면서 국제무대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한국뿐이다. 이런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우리도 차버리자', 그렇게 안 살면 좋겠다.

김유경 : 경영학공부하고 있고, 저개발국에 관심이 많다. 아까 복지와 성장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개발국은 경제 민주화와 성장이 같이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장을 하고 나서 민주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장하준 : 좋은 질문이다. 한국은 기술이 많이 발전해, 복지를 제대로 안 하면 구조조정과 성장이 안 되는 단계가 됐다. 이것은 후진국에 적용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이 다르다. 예컨대 인도는 문맹률이 30%인데, 이걸 고치지 않으면 성장이 안 된다. 유아 사망률 등 여러 문제도 있다. 어느 시대든 그런 것들이 최소한 갖춰지지 않으면 성장을 할 수 없다. 저개발 상태일 때도 그런 것의 기초를 차근차근 쌓아야 한다.

ⓒ정기훈

"새누리당 영입설? 홍사덕의 자가발전"

김인산(서강대 경제학과) :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취업하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친놈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멍청한 놈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중소기업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장하준 : 중소기업은 한국의 현 단계에서 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부품소재 산업은 한국이 제일 취약한 지점이다. 이건 세계적으로 중소기업 고유 업종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혼자서 클 수는 없다. (중소기업에는) 특히 연구개발 자금이 없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쥐어짜지만 말고, 1950년대 일본처럼 중소기업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서강대 대학원생 :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면 어느 쪽을 택할 생각인가?
장하준 : 내 방식으로 지난 10년간 강연 등을 통해 정치 참여를 해왔다. 어느 한 군데에 매이고 싶지 않다. 부친은 민주당 의원이었지만, 내가 민주당에 들어간다 해도 재벌 문제에서 엄청나게 대립할 것이다. (좁은 의미의) 정치를 할 생각이 없기도 하다. 지금처럼 밖에서 이야기하고, 남들이 취할 게 있으면 취하게 하는 게 내가 한국 정치에 도움을 주는 길이다.
박인규 : 사전에 들어온 850개 정도의 질문 중 30-40개가 '새누리당 영입설의 내막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장하준 : 홍사덕 전 의원의 자가발전이다. 홍 전 의원과는 옛날에 새누리당에 강연을 갔을 때 인사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그때 홍 전 의원이 '내 생각엔 우리 당에서 장 교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덕담을 하더라. 그래서 '감사합니다' 하고 헤어졌는데, 갑자기 그런 기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