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창간 11주년 특별 강연회] 경제 민주화 어떻게 할 것인가
특별 강연회'에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프레시안>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도서출판 부키가 후원한 강연회다.
오후 7시 30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의 인사말로 행사의 막이 올랐다. 박 대표는 '불금'(불타는 금요일)임에도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생일잔치에 참가해준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황우석 사태와 한미FTA, 삼성을 비롯한 재벌 문제, 통합진보당 사태 등을 예로 들며, 창간(2001년 9월 24일) 후 <프레시안>이 걸어온 '심층 보도를 지향하는 독립 언론'의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대표는 경제 민주화가 올해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어떤 경제 민주화인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모색하고자 강연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나쁜 체제 만든 이헌재, 사과도 없이 다시 나오다니"
이어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프레시안>은 한국 매체 중 제일 믿고 보는 매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가 왜 이렇게 갑자기 유행하게 됐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일어난 구조조정, 신자유주의의 결과"라는 것이 장 교수의 생각이다.
장 교수는 행복도 조사, 자살률, 출산율, 비정규직 비율, 가계부채 비율 등에서 한국이 안 좋은 쪽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1, 2위를 다투면서 "국민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고용 불안과 복지 부족인데, 모두 "IMF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자영업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과 관련, 장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서 떨려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하는 치킨집"이 늘면서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세계 10위 정도인데 치킨집 수는 세계 1위"라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과당 경쟁으로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재벌들이 그것마저 먹겠다고 뛰어오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장 교수는 "처음부터 유지가 불가능한 것을 경제학에서는 자기 착취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말했다.
불안정한 일자리에 더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복지 태부족" 현실이다. 장 교수는 "한국은 복지 지출이 국민소득 대비 10% 될까 말까 한 수준으로 OECD 국가들 중 밑에서 2번째"라며 "복지가 없다고들 하는 미국도 국민소득 대비 20%는 복지에 지출하고, 스웨덴 등은 30-35%에 이른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IMF 위기 직후인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장 교수는 역대 정부가 거듭해서 놓은 "마약 주사"에 주목했다. 신용카드를 남발하도록 부추겨 "성인 7명 중 1명을 신용불량자"로 만들고, 재테크 열풍에 편승해 "빈곤과 실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렸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장 교수는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비판했다.
"일자리는 자꾸 불안정해지고, 떨어지면 받쳐줄 복지 제도마저 없어 너무나 불안한 상황이다. (…) 이런 체제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가 이헌재 전 부총리다. 그런데 다시 정계에 등장했다. 제발 그 양반,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 나쁜 체제를 만들어놓고, 사과도 없이 다시 나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청중 박수)"
장 교수는 노무현·이명박 정부도 비판했다. "한미 FTA, 금융 허브 등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 잡아놓은 방향을 이명박 대통령이 불도저처럼 몰고 갔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한국이 그래도 운이 조금 있어서, 금융 허브를 하기 전에 세계 경제 위기가 왔다"고 말했다. "그때 한국이 벤치마킹했던 게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두바이"였는데, 만약 세계 경제 위기가 늦게 터지고 그 사이에 한국이 아일랜드 등처럼 금융 규제를 다 풀어버렸으면 경제가 박살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는 역대 정부가 놓은 "마약 주사"가 다 떨어지고 이제 "국민이 '도대체 이걸 왜 했는데? 부자 된다며?'라고 묻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 대통령이 '주가 2000 됐다'는 걸 굉장한 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그게 샘나니까 '난 주가 5000을 만들겠다'고 했다. 온 나라가 다 이것에 홀렸다. 주식 사고, 재테크 해볼까 하는 식이었다. 이제 그 바닥이 드러났다. 그래서 요즘 경제 민주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국가"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리인 '1인 1표'로 '1원 1표'의 시장 원리를 제약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라는 이야기다. 장 교수는 시장 원리에 대해 제약업계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전 세계에서 매년 100만 명씩 말라리아로 죽는데, 선진국에서는 말라리아 연구 기금이 살 빼는 약 연구 기금의 20분의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 장 교수는 "주주권을 강화해서 재벌을 통제하자는 것은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건 '1원 1표' 원리를 더 철저하게 관철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삼성과 외국 금융 자본이 싸우는데, 지금 삼성에 더 유리하게 돼 있으니 '1원 1표'를 확실히 해서 외국 금융 자본에 더 유리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 자본 분파 간의 싸움이다. (…) 국민의 삶과 연결된 '1인 1표'의 경제 민주화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관계가 있다면, 거기서 외국 자본이 이길 경우 국민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삼성) 이 씨, (현대) 정 씨네는 (국민들이) 얼굴도, 이름도 알지만 국제 금융 자본은 (국민들이) 가서 싸울 실체가 없다"며 "금융 자본에 의한 잠식을 걱정하는 건 재벌이 예뻐서가 아니라 국민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재벌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거기에 묻혀 더 중요한 것이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복지를 경제 민주화 논의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장 교수는 "이재용이 쫓겨나 쪽박 차는 것을 보면 하루 기분이 좋겠지만, 복지국가를 잘못 만들면 일생 고생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 교수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복지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왜 출산 파업을 하겠나? 탁아 시설, 교육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고령화가 되면 이민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난 이민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도 이민 노동자다. (그런데) '여성은 집에서 애나 더 낳아라'라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이민을 제일 반대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물어야 한다. 나중에 혈통적으로 한국인의 30%를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출신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복지국가를 만들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또한 장 교수는 "복지국가가 약하니 계층 상승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장 교수는 "복지가 강한 나라일수록 사회적 이동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스웨덴 등은 부모와 자식의 계층 상관관계가 매우 낮은 데 반해 '기회의 땅'과는 거리가 멀어진 미국과 포르투갈은 90% 가까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장 교수는 복지국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재기의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보수화한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의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대기업 노조 이기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장 교수는 구조조정과 경제성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한미 FTA와 한-EU FTA로 인해 생겨날 희생자들을 위해서도 복지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동 구매…담세율 높여야"
장 교수는 이렇게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핵심인 시대가 왔다"며, 복지 개념을 잘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구'(공동 구매)"라고 강조했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왜 이건희 회장 손자와 가난한 아이들이 똑같이 돈을 안 내고 밥을 먹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 적이 있다. (…) 실제로는 공짜가 아니다. (…) 이 회장은 누진세 원칙에 따라 세금을 많이 냈다. 그 손자는 더 비싸게 먹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부가가치세를 냈고. (…) 이걸 두고 '부자 복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컨대 가난한 사람에게는 1000원, 부자에게는 5000원을 받으면 '부자 구박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논리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장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는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정치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장 교수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복지를 하자는 건 "폭동이 안 날 정도로만 밥을 먹여주자는 것"으로서 "복지국가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선별적 복지를 하면, 행정 비용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복지와 성장은 상충한다"는 신화를 깨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언론 등에서 걸핏하면 '복지병'을 운운하고 '경제 위기인데 무슨 복지냐'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복지와 성장이 그렇게 상충하는 것이라면 스웨덴, 핀란드가 어떻게 미국보다 성장률이 높겠나?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그렇게 좋은 것이면, 불평등한 미국은 왜 성장률이 떨어졌나? 유럽은 복지로 망하고 미국은 복지가 없어서 (경제가) 잘된다? 1990년대 후반에 미국에 거품이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더 성장률이 높았다."
장 교수는 복지국가 시스템을 충실히 갖추려면 담세율(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금의 20%에서 최소한 40%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 핀란드는 50-55%다. 말하자면 (한국도) 지금보다 세금을 두 배 이상 올려야 제대로 된 복지를 한다는 뜻이다. 누진세 원칙에 따라 부자가 더 많이 내야 하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금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장 교수 생각이다. 미국과 달리 스웨덴 등에서 '복지국가를 없애자'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세금을 내면 복지 제도를 통해 그 혜택을 "다 내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육아, 교육, 건강, 실업, 노후 등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정부가 세금을 거둬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세금이 길이고 병원이고 학교"이라며 "세금이 낮은 게 그렇게 좋은 것이면, 왜 세계의 부자와 기업들이 세율 5%인 자메이카나 법인세율 10%인 알바니아로 안 가겠나"라고 물었다. 다만 장 교수는 정부가 세금을 거둬 "강바닥 파는 것 같은 일을 하지" 말고 잘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 상품은 무서운 무기…자본시장 통제해야"
이와 함께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위해 자본시장 통제, 노동권 강화, 작은 경제 주체들(노조, 소비자, 소생산자 등)의 '민주적 담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원 1표'의 핵"인 자본시장 통제와 관련, 장 교수는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그 위험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투기 행위(공매도, "이해 불가능한" 파생상품, 내부자 거래 등)를 제약하거나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런 버핏조차 파생상품을 "금융계 대량 살상 무기"로 규정하고 시장주의의 본산인 IMF마저 '후진국은 자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계약의 자유가 있는데 어떻게 금지한다는 말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선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약은 안전성을 입증해야 팔 수 있다. 그런데 금융 상품은 왜 그렇게 안 하나? 얼마나 무서운 건데. (…) 이번 금융 위기로 전 세계에서 8000만 명이 실업자가 됐다. 그중에서 가정이 깨지고 자살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이런 '무기'를 (규제 없이) 그냥 판다? 통제해야 한다."
장 교수는 노동권 강화와 관련, 정리해고를 어렵게 하고 비정규직 대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복지국가를 잘 만들어야 하지만, 그 이전이라고 해서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기업 경영에 노동자가 참여하게 하는 것이 민주화"라고 말했다. 법적으로는 주주가 기업의 주인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주인의식이 가장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노동자처럼 "기업을 간단히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줘야" 하며 그것이 기업에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 장 교수의 판단이다.
장 교수는 '1인 1표' 원칙과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경제 민주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기업의 하청기업 착취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놔두면 한국 기업이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일본이 결정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50년대 말에 하청기업법을 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이 강화되자 도요타 등의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투자도 하고 기술도 이전하면서 함께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장 교수는 중소기업고유업종을 지정해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할 경우 치킨집과 두부공장을 영세업자만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과거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경제적 약자들이 특정 업종에 몰려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장 교수는 "30년 후 복지국가가 잘 이뤄지고 산업구조가 더 좋아지면 그때는 재벌이 치킨집을 해도 되지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제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주변에 계속 이야기해서 복지를 정치권의 최고 의제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청중에게 요청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장 교수와 청중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질의응답 내용은 <"타협도 안 하는 재벌이 백기투항하겠나?"> 참조).
21일,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을 반납한 시민 1000여 명이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서울시 종로구) 앞에 길게 줄을 섰다.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기념 장하준 교수 오후 7시 30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의 인사말로 행사의 막이 올랐다. 박 대표는 '불금'(불타는 금요일)임에도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생일잔치에 참가해준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황우석 사태와 한미FTA, 삼성을 비롯한 재벌 문제, 통합진보당 사태 등을 예로 들며, 창간(2001년 9월 24일) 후 <프레시안>이 걸어온 '심층 보도를 지향하는 독립 언론'의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대표는 경제 민주화가 올해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어떤 경제 민주화인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모색하고자 강연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나쁜 체제 만든 이헌재, 사과도 없이 다시 나오다니"
이어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프레시안>은 한국 매체 중 제일 믿고 보는 매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가 왜 이렇게 갑자기 유행하게 됐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일어난 구조조정, 신자유주의의 결과"라는 것이 장 교수의 생각이다.
장 교수는 행복도 조사, 자살률, 출산율, 비정규직 비율, 가계부채 비율 등에서 한국이 안 좋은 쪽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1, 2위를 다투면서 "국민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고용 불안과 복지 부족인데, 모두 "IMF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자영업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과 관련, 장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서 떨려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하는 치킨집"이 늘면서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세계 10위 정도인데 치킨집 수는 세계 1위"라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과당 경쟁으로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재벌들이 그것마저 먹겠다고 뛰어오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장 교수는 "처음부터 유지가 불가능한 것을 경제학에서는 자기 착취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말했다.
불안정한 일자리에 더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복지 태부족" 현실이다. 장 교수는 "한국은 복지 지출이 국민소득 대비 10% 될까 말까 한 수준으로 OECD 국가들 중 밑에서 2번째"라며 "복지가 없다고들 하는 미국도 국민소득 대비 20%는 복지에 지출하고, 스웨덴 등은 30-35%에 이른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IMF 위기 직후인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장 교수는 역대 정부가 거듭해서 놓은 "마약 주사"에 주목했다. 신용카드를 남발하도록 부추겨 "성인 7명 중 1명을 신용불량자"로 만들고, 재테크 열풍에 편승해 "빈곤과 실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렸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장 교수는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비판했다.
"일자리는 자꾸 불안정해지고, 떨어지면 받쳐줄 복지 제도마저 없어 너무나 불안한 상황이다. (…) 이런 체제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가 이헌재 전 부총리다. 그런데 다시 정계에 등장했다. 제발 그 양반, 어떻게 해주세요. 이런 나쁜 체제를 만들어놓고, 사과도 없이 다시 나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청중 박수)"
장 교수는 노무현·이명박 정부도 비판했다. "한미 FTA, 금융 허브 등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 잡아놓은 방향을 이명박 대통령이 불도저처럼 몰고 갔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한국이 그래도 운이 조금 있어서, 금융 허브를 하기 전에 세계 경제 위기가 왔다"고 말했다. "그때 한국이 벤치마킹했던 게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두바이"였는데, 만약 세계 경제 위기가 늦게 터지고 그 사이에 한국이 아일랜드 등처럼 금융 규제를 다 풀어버렸으면 경제가 박살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는 역대 정부가 놓은 "마약 주사"가 다 떨어지고 이제 "국민이 '도대체 이걸 왜 했는데? 부자 된다며?'라고 묻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 대통령이 '주가 2000 됐다'는 걸 굉장한 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그게 샘나니까 '난 주가 5000을 만들겠다'고 했다. 온 나라가 다 이것에 홀렸다. 주식 사고, 재테크 해볼까 하는 식이었다. 이제 그 바닥이 드러났다. 그래서 요즘 경제 민주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장하준 교수. ⓒ정기훈 |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국가"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리인 '1인 1표'로 '1원 1표'의 시장 원리를 제약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라는 이야기다. 장 교수는 시장 원리에 대해 제약업계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전 세계에서 매년 100만 명씩 말라리아로 죽는데, 선진국에서는 말라리아 연구 기금이 살 빼는 약 연구 기금의 20분의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 장 교수는 "주주권을 강화해서 재벌을 통제하자는 것은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건 '1원 1표' 원리를 더 철저하게 관철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삼성과 외국 금융 자본이 싸우는데, 지금 삼성에 더 유리하게 돼 있으니 '1원 1표'를 확실히 해서 외국 금융 자본에 더 유리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 자본 분파 간의 싸움이다. (…) 국민의 삶과 연결된 '1인 1표'의 경제 민주화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관계가 있다면, 거기서 외국 자본이 이길 경우 국민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삼성) 이 씨, (현대) 정 씨네는 (국민들이) 얼굴도, 이름도 알지만 국제 금융 자본은 (국민들이) 가서 싸울 실체가 없다"며 "금융 자본에 의한 잠식을 걱정하는 건 재벌이 예뻐서가 아니라 국민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재벌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거기에 묻혀 더 중요한 것이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복지를 경제 민주화 논의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장 교수는 "이재용이 쫓겨나 쪽박 차는 것을 보면 하루 기분이 좋겠지만, 복지국가를 잘못 만들면 일생 고생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 교수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복지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왜 출산 파업을 하겠나? 탁아 시설, 교육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고령화가 되면 이민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난 이민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도 이민 노동자다. (그런데) '여성은 집에서 애나 더 낳아라'라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이민을 제일 반대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물어야 한다. 나중에 혈통적으로 한국인의 30%를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출신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복지국가를 만들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또한 장 교수는 "복지국가가 약하니 계층 상승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장 교수는 "복지가 강한 나라일수록 사회적 이동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스웨덴 등은 부모와 자식의 계층 상관관계가 매우 낮은 데 반해 '기회의 땅'과는 거리가 멀어진 미국과 포르투갈은 90% 가까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장 교수는 복지국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재기의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보수화한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의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대기업 노조 이기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장 교수는 구조조정과 경제성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한미 FTA와 한-EU FTA로 인해 생겨날 희생자들을 위해서도 복지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기념 장하준 교수 특별 강연회'에 자리한 청중. ⓒ정기훈 |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동 구매…담세율 높여야"
장 교수는 이렇게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핵심인 시대가 왔다"며, 복지 개념을 잘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구'(공동 구매)"라고 강조했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왜 이건희 회장 손자와 가난한 아이들이 똑같이 돈을 안 내고 밥을 먹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 적이 있다. (…) 실제로는 공짜가 아니다. (…) 이 회장은 누진세 원칙에 따라 세금을 많이 냈다. 그 손자는 더 비싸게 먹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부가가치세를 냈고. (…) 이걸 두고 '부자 복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컨대 가난한 사람에게는 1000원, 부자에게는 5000원을 받으면 '부자 구박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논리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장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는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정치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장 교수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복지를 하자는 건 "폭동이 안 날 정도로만 밥을 먹여주자는 것"으로서 "복지국가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선별적 복지를 하면, 행정 비용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복지와 성장은 상충한다"는 신화를 깨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언론 등에서 걸핏하면 '복지병'을 운운하고 '경제 위기인데 무슨 복지냐'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복지와 성장이 그렇게 상충하는 것이라면 스웨덴, 핀란드가 어떻게 미국보다 성장률이 높겠나?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그렇게 좋은 것이면, 불평등한 미국은 왜 성장률이 떨어졌나? 유럽은 복지로 망하고 미국은 복지가 없어서 (경제가) 잘된다? 1990년대 후반에 미국에 거품이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더 성장률이 높았다."
장 교수는 복지국가 시스템을 충실히 갖추려면 담세율(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금의 20%에서 최소한 40%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 핀란드는 50-55%다. 말하자면 (한국도) 지금보다 세금을 두 배 이상 올려야 제대로 된 복지를 한다는 뜻이다. 누진세 원칙에 따라 부자가 더 많이 내야 하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금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장 교수 생각이다. 미국과 달리 스웨덴 등에서 '복지국가를 없애자'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세금을 내면 복지 제도를 통해 그 혜택을 "다 내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육아, 교육, 건강, 실업, 노후 등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정부가 세금을 거둬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세금이 길이고 병원이고 학교"이라며 "세금이 낮은 게 그렇게 좋은 것이면, 왜 세계의 부자와 기업들이 세율 5%인 자메이카나 법인세율 10%인 알바니아로 안 가겠나"라고 물었다. 다만 장 교수는 정부가 세금을 거둬 "강바닥 파는 것 같은 일을 하지" 말고 잘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기훈 |
"금융 상품은 무서운 무기…자본시장 통제해야"
이와 함께 장 교수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위해 자본시장 통제, 노동권 강화, 작은 경제 주체들(노조, 소비자, 소생산자 등)의 '민주적 담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원 1표'의 핵"인 자본시장 통제와 관련, 장 교수는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그 위험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투기 행위(공매도, "이해 불가능한" 파생상품, 내부자 거래 등)를 제약하거나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런 버핏조차 파생상품을 "금융계 대량 살상 무기"로 규정하고 시장주의의 본산인 IMF마저 '후진국은 자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계약의 자유가 있는데 어떻게 금지한다는 말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선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약은 안전성을 입증해야 팔 수 있다. 그런데 금융 상품은 왜 그렇게 안 하나? 얼마나 무서운 건데. (…) 이번 금융 위기로 전 세계에서 8000만 명이 실업자가 됐다. 그중에서 가정이 깨지고 자살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이런 '무기'를 (규제 없이) 그냥 판다? 통제해야 한다."
장 교수는 노동권 강화와 관련, 정리해고를 어렵게 하고 비정규직 대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복지국가를 잘 만들어야 하지만, 그 이전이라고 해서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기업 경영에 노동자가 참여하게 하는 것이 민주화"라고 말했다. 법적으로는 주주가 기업의 주인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주인의식이 가장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노동자처럼 "기업을 간단히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줘야" 하며 그것이 기업에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 장 교수의 판단이다.
장 교수는 '1인 1표' 원칙과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경제 민주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기업의 하청기업 착취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놔두면 한국 기업이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일본이 결정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50년대 말에 하청기업법을 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이 강화되자 도요타 등의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투자도 하고 기술도 이전하면서 함께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장 교수는 중소기업고유업종을 지정해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할 경우 치킨집과 두부공장을 영세업자만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과거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경제적 약자들이 특정 업종에 몰려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장 교수는 "30년 후 복지국가가 잘 이뤄지고 산업구조가 더 좋아지면 그때는 재벌이 치킨집을 해도 되지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제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주변에 계속 이야기해서 복지를 정치권의 최고 의제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청중에게 요청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장 교수와 청중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질의응답 내용은 <"타협도 안 하는 재벌이 백기투항하겠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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