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경제·사회

장하준의 통찰

youngsports 2009. 4. 12. 20:46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1년에 한두번 꼴로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지난해 국방부가 그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을

불온도서로 지정한 탓도 있겠지만, 이번 한국 방문에 유독 그를 찾는 곳이 많았다.

2008년 가을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한국경제에도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위기의

1막이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오전 한나라당이 장하준 교수를 초청해 마련한 강연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정두언 의원이 "국가 전략으로 채택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되돌아볼 때가 됐다"고 말한 것은 현재 한국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은 '선언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미 루스벨트 대통령도 대공황 초기에는 휴가를 즐기는 등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다가 1933년에 가서야 뉴딜 정책을 내놓았다.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사태가 좀 더 심각해져야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날 것 같다."

장하준 교수는 6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세계경제가 대공황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빠졌지만 근본적인 위기 극복을 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의 결과에 대해서도 "이럴 때일수록 자유무역을 더 하고, IMF를 통한 지원을 늘리겠다는 것은 (자금지원을 미끼로 선진국이 개도국을 수탈해 왔던) 기존 체제를 더 강화하자는 얘기다.

기본 틀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번 경제위기가 무서운 원인 중 하나가 파생상품이다. 부실의 규모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설계된 파생상품은 위기의 '끝'을 가늠하기 힘들게 한다. 따라서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가 빠진 대응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장 교수는 주장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들을 금융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자리에 앉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상대적으로 금융규제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지만 파생상품 금지를 요구할 배짱이나 안목이 없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독일 메르켈 총리 모두

현재 한계에 부딪힌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혁을 주도할 리더는 아니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중국에 대해서도 선진국이 소비하는 값싼 물품의 생산기지로서 누리는 이득을 당분간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발언권은 더 늘어가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을 대변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 중국의 위안화가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상을 위협할 수 있지 않겠냐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봤다.

장 교수와 인터뷰는 6일 오후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박인규 대표가 진행했다. 인터뷰를 두 번에 나눠 게재한다.


현 글로벌 경제위기, 대공황 때보다 심각하다

프레시안 : 현재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위기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한 것 같다.

먼저 이번 위기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

장하준 : 기본적으로 영미식
금융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본다. '몰락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쉽게 몰락하진 않을 것 같다. 이 체제에서 덕 보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이들이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또 제도가 한번 생기면 관성이 있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유럽 봉건제도를 이미 14, 15세기부터 없애자고 했지만 없어지는 데 300-400년 걸렸다. 근본적인 체제 변화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만 19세기부터 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고전적 자유주의가 대공황을 통해서 붕괴되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수정자본주의가 나왔다. 이 체제가 유지되다가 1970년대 말에 신자유주의가

나왔다. 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30여년 계속되다가 이제 무너지기 시작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공황의 경험 때문에 정부가 적자
재정 감수하며 돈을 풀고, 금융기관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버티고 있어서 그렇지, 문제 자체만 놓고 보면 이번 위기가 대공황보다 더 크면 더 컸지 덜하지 않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

최근 일부 금융지표가 좋아지면서 '새싹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낙관론을 말하기도 하는데 아주 성급한 얘기다. 지금 일시적으로 나아진 것 같지만 두어달 있다가 예를 들어 GM의 부분파산, 피아트크라이슬러협상 결렬 등 얘기가 나오면 또 폭락할 수 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경제위기는 1막, 2막, 3막을 거쳐 진행되는데, 1막은 금융부문의 경색, 2막은 그 타격으로 실물이 영향을 받아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 2막이 진행 중인데, 이게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빨라야 내년 초나 돼야 마무리 될 것이다. 미국은 지난달만 실업자가 66만 명 나왔다. 이는 공식적으로 실업수당 받는 사람만 얘기한 것이다. 구직포기자까지 포함하면 얼마가 될지 모른다. 어쨌든 실업자만 따져도 1인당 가족을 3명으로 치면 200만 명이 생계를 잃었다는 엄청난 얘기다.

이 여파가 또 금융섹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게 3막이다.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대출금을 못 갚고, 신용카드가 부도 나고, 주택담보대출이 부도 나고, 이런 식으로 금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제는 1막과 2막은 끝이 있지만, 3막은 끝이 없다.

대공황 때도 일시적으로 회복된 뒤에 다시 경기가 가라앉는 일이 반복됐다. 일본도 90년대 거품붕괴 후 '잃어버린 10년'을

보냈다.

특히 이번 위기는
파생상품이 많아서 끝을 짐작하기가 더 어렵다. 처음에 서브프라임 부실 얘기가 나왔을 때 미국 정부는

부실규모를 500억 내지 1000억 달러라고 했는데, 2007년 여름 2000-3000억을 얘기했다. 2008년 가을 리먼 파산 이후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안을 마련했다. AIG, 프레디맥, 패니매 등 지원까지 포함하면 당시 이미 부실이 1조 달러에 달한 것이다.

지금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부실규모로 3조5000억 달러를 얘기할 정도다. 이렇게 부실규모가 불확실해서 위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근본적 개혁을 주도할 리더가 없다

프레시안 : 1970년대부터 계속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계에 부딪힌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안들은

그 정도 인식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최근 2차 G20정상회의가 열렸다. 지난해 11월 1차 회의에 비해 진전된 성과를 냈다고 자평하던데, 이번 회의 결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장하준 :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근본적 개혁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별로 없다. G20회의를 통해 대단한 합의를 도출한 것처럼 발표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금융규제도 유럽 쪽에서 강화해야 한다고 우겨서 강화하는

방향으로 갔지만, 애매한 조세도피처 몇 개 때려잡고, 헤지펀드 큰 거 몇 개 관리한다는 정도에 그쳤다. 근본적으로 파생상품 관리를 안 하면 헤지펀드 관리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또 경기부양을 위해 5조 달러를 푼다고 하지만, 각국에서 발표한 경기부양책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IMF를 통해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지원을 늘리겠다고 했는데, 이 돈은 기본적으로 나라가 부도 위기에 처해야 받는 돈이다. 그리고 IMF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수용해야 이 돈을 받을 수 있고, 이런 전제조건들이 후진국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선진국들은 다 적자 재정 하면서 후진국보고는 '이자율 올리고 흑자 재정하라'고 요구한다. 또 무역자유화, 민영화를 요구해 결과적으로 후진국의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

이럴 때일수록 자유무역을 더 하고, IMF를 통한 지원을 늘리겠다는 것은 기존 체제를 더 강화하자는 애기다. 기본틀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 장하준 교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을 포함해 주요국 리더들 중에 현 위기에 맞서는 근본적인 대응책을 밀고 나갈 이들이 없다는 점을 우려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미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될 때만 해도 경제위기의 근본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있었다. 장 교수의 G20회의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오바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완전히 접은 것처럼 보인다.

장하준 : 오마바 정부가 단기적 대책은 대공황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 하지만 뉴딜에 맞먹을 만한 근본적 변화는 없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안 했다. 현재 경제위기 대응책을 마련한 게 누구냐. 옛날 미국 통화주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폴 볼커(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 월드뱅크에 있으면서 금융자유화를 주장한 로렌스 서머스(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등이 아닌가. 위기를 만든 주범들이다. 또 오바마 대통령의 제일 가까운 경제조언가가 굴스비 시카고대 교수로,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다. 대통령 비서실장인 람 이메뉴얼은 공식적으로 미국 월가에서 정치헌금을 제일 많이 받은 정치인이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월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의 딘 베이커 공동소장은 "이들에게 경제정책을 맡기는 건 오사마 빈 라덴한테 테러범을 잡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상대적으로
독일, 프랑스 등은 영국과 미국에 비해 위기의 정도가 덜 심각하다. 미국이 아니라면 이런 나라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은 없나?

장하준 : 기본적으로 유럽 국가들이 금융규제에 대해서는 미국보다 훨씬 강경파다. 프랑스에서는 우파인 사르코지 대통령도 영미에 비하면 훨씬 금융규제를 강조한다. 그렇지만 프랑스, 독일도 과거에 비해 금융권의 힘이 많이 세졌다. 프랑스도 적대적 M&A를 굉장히 공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르코지, 독일의 메르켈 같은 지도자들이 최소한 파생상품을 규제하자는 정도의 얘기를 할 배짱과 안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 세계 각국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은 없다고 본다.

국유화를 'N워드'라 하는 미국, 자국의 실리만 챙기는 중국

프레시안 : 결국 현재로서는 근본적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다소 비관적 전망인데, 근본적인 개혁을 바라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어떤 처방이 필요한가?

오바마 정부가 발표한 민관합동투자프로그램(PIPP)을 비판하는 이들은 부실 금융기관의 경우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하준 : 국유화에도 시장원리가 작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부실
채권을 정부가 사서 대주주가 되면 정부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이게 시장주의지 않나. 영국도 최소한 그 정도 한다. 그런데 미국은 국유화를 안 하려고 정부가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더라도 40%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을 마련해 놓을 정도다. 국유화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이 있어서 국유화(Nationalization)를

'N워드'라며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다.

프레시안 : 파생상품의 규제를 장 교수가 제시한 근본적 개혁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장하준 : 물론 힘들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 아니니까 현실성 없는 얘기라도 해야 된다. 불가능한 소리라도 자꾸 요구해야

세상이 바뀌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이 근본적 변화를 주도할 만한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최근
중국이 점차 세계에서 발언권 강화되고 있는데, 중국이 새 체제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은 없나?

장하준 : 중국은 워낙 자기 실리추구가 강하다. '우리가 돈 낼 테니 IMF 투표권을 더 달라'는 식의 요구는 하지만 후진국들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미국에 계속
수출해서 잘 살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새로운 이니셔티브 주도할 리더십은 없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중국은 현 신자유주의 질서 내에서 값싼 노동력을 주무기로 내세운 생산기지로 고도
성장을 이뤘다. 그렇지만

미국, 유럽 등 주요 수출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이런 전략이 한계에 부딪힌 상태다.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불평등한

균형'을 중국이 계속 유지하는 노선을 당분간 계속 가져갈 것이라고 보는 입장인가?

장하준 : 중국 내부
역학 문제가 있다. 중국은 양극화가 심각해서 세계경제 변화의 주도권을 쥘 여력이 안 된다.

중국의 지니계수(불평등 계수)를 보면 이미 남미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남미는 500년 전부터 불평등하게 살아온

나라들이지만, 중국은 30년 전만 해도 모두가 다 인민복 입고 자전거 타고 다니던 나라다. 그만큼 빈부 격차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중국도 내수지향으로 돌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하루아침에 돌리기는 힘들다. 아직은 어떻게 될지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어쨌든 중국의 전략은 일단 앞으로 30년은 가만히 있자는 쪽이다. 그래서 WTO에서도 별로
목소리 안 낸다. 오히려 브라질,

인도 등이 앞에 나가서 떠든다.

프레시안 : 중국경제에 관심이 쏟아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기축통화' 문제다. 이번 금융위기로 미국이 달러를 많이 찍어내면서 달러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100년 전 영국 파운드화의 몰락과 비슷한 과정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런 달러 가치에 2조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는 중국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양국간 '화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겠냐는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다.

장하준 : 겨우 2조 달러 갖고는 경쟁 못 한다. 이번에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에 세계 외환거래량이 하루에 2조 달러였다.

하루치 외환거래량으로 뭘 하겠냐. 지금 당장 달러에 대한 도전은 유로다. 중국이 아무리 경제적 영향력이 커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 나라다.

▲ 장하준 교수는 대공황 당시 보호무역주의 때문에 위기가 심화됐다는 주장에 대해 '일종의 신화'라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 무역붕괴는 수요붕괴의 탓이 가장 컸다고 반박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번 금융위기가 유로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장하준 : 예전에는 달러가 기울어도 마땅히 갈 데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중동국가들에서 '석유를 유로로
결제하자'고

하면 확 쏠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급변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몰락은 제국주의가 피크였던 187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영국이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1956년 수에즈 사태 이후였다. 거의 100년이 걸린 것이다. 미국 달러도 지금 60년대부터 위협을 받기 시작해서 71년 금태환 정지 조치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80년대 쌍둥이적자 등으로 크게 흔들리다가 90년대 다시 부활했다지만 지금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수요 창출의 문제다

프레시안 : 지금 위기 대응 방식을 놓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있었던 세계경제의 블록화가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위기는 공유하지만 대처는 각자 알아서 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 : 보호무역주의 때문에 대공황이 심화되고 세계경제가 붕괴됐다는 주장은
일종의 '신화'다. 첫째 당시 관세가 그렇게 많이 오르지 않았다. 미국이 40%에서 50%로 올라간 정도다. 둘째, 당시 무역 붕괴는 수요 붕괴, 금융 붕괴 때문이지 관세

때문이 아니다.

지금 보호무역의 위험을 따질 게 아니라 수요
창출이 더 중요하다. 블록화가 되는 것인지 예측은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그때와 다른 게 지금은 WTO도 있고, EU도 있다. 그때만큼 보호무역 수위를 높이는 게 어렵다. 결국 '보호무역은 안 된다, 블록화는 안 된다'는 얘기는 자유무역 이데올로기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말로는 그러면서 미국은 지금 당장 자동차 산업에 170억 달러 집어 넣고 보호무역이 아니라고 우긴다. 결국 힘센 나라들은

자기들은 보호무역하면서 후진국만 못하게 한다.

프레시안 : 수요 창출이 중요하다는 지적을 했는데, 최근 동유럽이 흔들리는 걸 놓고 동유럽이 개방될 때 '제2의 마셜플랜'

(2차 대전 직후 서유럽 지원 방안)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남미나 동남아시아에 다시 이런 방식이 쓰일 수 있다고

보나?

장하준 : IMF나 월드뱅크는 2차 세계대전 후 마셜플랜을 위해 만든 기구다. 그때는 정말 서유럽을 키우려고 한 것이었는데,

지금(80년대 이후) IMF는 막말로 (선진국 금융자본을 위해)빚 받아오는 대행업체다. 그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정책은 후진국을 더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물론 진행되는 상황을 더 봐야 한다. 대공황 때도 루즈벨트가 처음에 준비기간이 필요한 측면도 있지만,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줄 모르고
요트 타고 놀러 다니다가 1933년에 가서야 뉴딜 정책을 내놓았다. 현재도 일이 더 심각해지면 더 강력한 조치

 나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돈 풀어서 경기부양하는 데 그칠 것이다. 경기부양 한다고 돈 푸는 건 좋은데 국유화 절대 안 되고, 은행 간섭은 안 된다고 하다가 국민들만 빚더미에 앉고 나중에는 국채가 많아서 국유화 못 한다는 식으로 나올까봐 걱정이다. 하면 안 되는 얘기지만 사태가 좀 더 심각해져야 근본적 개혁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또 어떻게 미봉책으로 나가면 어디 가서 또 거품이 낄지 모른다. 오바마 정부가
녹색 뉴딜을 얘기하던데 녹색거품이 생길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오바마 정부가 녹색 산업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금융

자본주의 이후 새 체제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장기적 전략으로 보고 있다. 앞선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녹색산업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산업 기준을 만들면 후발 주자들은 그 기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장하준 : 녹색산업에 지금 당장 거품이 낀다는 거는 아니고 미래에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 후진국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을(약 80%) 선진국들이 뿜어 내놓고 '지구가 망하게 됐으니 너희는 성장하지

말라'는 식이다. 선진국이 기본적으로 기술력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기술 스탠다드를 정하기 시작하면 뒤에 따라가는 나라는 그만큼 불리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후진국에 대한 비대칭적 보호주의가 필요하다. WTO 체제를 통해 보조금이 금지됐는데 환경관련 보조금은 거의 다 허용돼 있다. 미국이 자동차 보조금 주면서 환경친화 기술개발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게

다 WTO에 안 걸리려고 하는 것이다. (계속)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국가-재벌-노조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북구식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전제는 재벌들이 고용과 성장 등에 기여하는 건전한 산업자본으로 남아 있을 경우이다. 하지만 이 재벌들이 고용, 성장 등은 도외시 한 채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이 된다면?

"게임은 끝나버린다."

장하준 교수가 현재 한국경제의 흐름에서 가장 걱정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단기 이윤 내라고 닦달하고 주식시장 통해 기업에서 돈 빼가는 식이면 자본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냐. 미래에셋이 메릴린치보다 낫다고 할 수 있냐."

자본시장통합법, 금산분리 완화가 문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 현대차, LG 등 국내 재벌이 현재 세계 1등인 상품을 하나 이상씩 갖고 있지만 판도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잭 웰치가 이끌었던 GE의 운명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장 교수는 "우리나라 재벌들도 하루 아침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금융자본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서비스산업을 새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윤증현 경제팀의 노선에 대해서도 "서비스산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는 룩셈부르크 등 진짜 규모가 작은 나라밖에 없다"면서 "서비스업은 대부분 수출이 안 되기 때문에 국제수지를 유지할 수 없다. 미국은 그렇게 서비스산업이 발달했지만 계속 무역적자"라고 비판했다. 여전히 한국경제의 살 길은 제조업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인 일본, 독일 등과 달리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구조인 한국에서 제조업 육성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할까? 장 교수는 '국가'의 역할에 주목했다. 국가가 시장의 '심판'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산업정책이라는 큰 그림을 갖고 경제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

지금처럼 정부가 공정한 '심판'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 노선을 밀어붙인다면?

"저성장 양극화가 고착돼 남미화될 것 같다. 실제로 점점 남미화 되고 있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의 가계저축률이 국민소득 대비 25%로 세계 1, 2위를 다퉜는데 지금은 1% 정도밖에 안 된다. 브라질도 가계저축률이 7~8%는

된다."

장 교수와 인터뷰는 6일 오후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박인규 대표가 진행했다. 이날 인터뷰의 후반부를 싣는다. (☞인터뷰 전반부 :
"대공황보다 더 큰 위기…극복 전망이 안 보인다")


지난 10년 금융자본의 승리로 요약 가능

프레시안 : 이제 한국
경제 얘기를 좀 해봤으면 한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위기가 미국금융위기라는 외부 요인의 영향도 받았지만, 더 큰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나?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

장하준 : 위기의 내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지난해 4분기 산업생산이 10% 감소하고 수출이 8% 감소한 것 등은 외부 요인이 더 크다. 중국, 미국 등 수출대상국의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를 이런 일시적 쇼크가 아니라 더 크게 규정해 '왜 경제
성장률이 자꾸 떨어지고, 고용이 불안해 온 나라 젊은이들이 의사, 변호사만 되려고 하고, 자살률이 OECD 2위이고, 출생률 감소가 세계 1위냐'. 이런 것을 위기로 규정하면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라 지난 10년 내지, 좀 더 길게

보면 김영삼 정부 때부터 15년간 추진돼 온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일전에 싱가포르 국립대 신장섭 교수와 함께 쓴 <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을 유심히 읽었다. 이 책에서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꼽은 것이 리스크 테이커(risk taker)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97년 이전에는 국가가 경제운용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이에 따르는 리스크를 떠맡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어왔다면, 위기 이후 국가를 대신해 이런 역할을 할 주체, 또는 시스템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지난 10년 동안 경제운용을 보면서

우리 경제가 어떤 변화를 모색했어야 한다고 보나?

장하준 :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아무 것도 안 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소위 민주화 세력으로 대표되는 진영과 신자유주의 관료 세력 사이에 주고 받는 게 있었다고 보여진다.

부동산 정책은 민주화 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 분야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완전히 말려든 것이고, 재벌개혁은 양쪽의 이해가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민주화 세력은 재벌을 규제하고 사회정의를 바로잡자는 쪽에, 신자유주의 세력은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쪽에 목적이 있었다. 개혁파는 재벌을 잡으니 좋고 시장파는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좋고, 이렇게 보면 지난 10년의 과정은 결국 금융자본의 승리라는 요약이 가능하다.

프레시안 : 지난 15년간 지속돼온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금융자본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한 것 같다.

장하준 : 금산분리를 완화하자는 의견이 나오는데 금산분리를 완화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제일 걱정스러운 게 재벌의 은행

사금고화가 아니다. 사금고화는 사실 제도만 잘 만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금산분리 완화가 재벌의 금융자본화를 돕는다는 것이 더 걱정스럽다. 재벌들까지 금융자본화 되면 게임은 끝나버린다.

예전의 사회적 대타협 주장은 재벌의 금융자본화를 전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업자본의 경우 원하건, 원하지 않건 금융자본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재벌들을 산업자본의 틀에 얽어매놓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재벌이 금융자본화하면 더 이상 한국 자본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싸우려고 해도 금융자본화하면 힘들어진다. 지금은 재벌 총수가 누구인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지만 사모펀드가 대주주가 되면 노동자들의 싸움 상대 자체가 모호해진다. 이 사모펀드를 누가 가진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나. 지금 외국자본이 문제가 되는 게 주인이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제조업 주주와 행태가 다르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금융자본화되면 자본의 국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단기 이윤 내라고

닦달을 하고 주식시장을 통해 기업에서 돈 빼가고 이러면 그 자본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냐.

예를 들어 미래에셋이 메릴린치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아니다.

제가 보기에 이미 재벌의 금융자본화가 70-80%는 진행됐고, 자본시장통합법, 금산분리 완화, 한미FTA하고 나면 완전히

끝나는 거다.

GEㆍGM의 몰락을 보면, 1등 기업도 순식간이다

프레시안 : 정부도 개방과 규제완화를 명분으로 재벌의 금융자본화를 돕는 쪽으로 가고 있다. 정부는 제조업에 비해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낮아서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금산분리 완화를 추진하면서는 금융에 외국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와

국내자본이 역차별 당하고 있으니까 국내 산업자본에도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다소 모순된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장하준 : 우리나라 금융 경쟁력이 낮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금융산업이 발전했다는 미국과
영국도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금융위기가 터진 것 아니냐. 얼마나 자산관리를 못했으면 독성자산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냐. 도대체 이들의 뭘 보고 배우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프레시안


정부가 진짜로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제대로 유치산업화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미국의 경우, 19세기말 뉴욕을 금융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법으로 뉴욕주에 외국은행 개설 금지했다.

또 정부에서 '제조업은 중국이 쫓아오니 금융산업을 발전시켜 도망가자'고 하던데 왜 쫓아오는 사람만 무섭고 도망가는 사람은 안 무섭냐. 우리가
금융업 쪽으로 나가면 미국, 영국이 우리한테 한 자리 내줄 거 같냐. 절대 아니다.

왜 자꾸 미국 따라다니면 되겠지 이런 생각만 하나.

프레시안 :
삼성반도체, 현대자동차, LGLCD 등 재벌들이 현재 세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품들을 하나 이상씩 갖고 있다. 그래서 재벌들은 금산분리 완화 법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한다.

장하준 : 순식간이다. 제너럴일렉트릭(
GE)이 예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회사였는데 지금은 다 껍데기만 남았다.

잭 웰치 회장이 GE캐피털 만들어서 기업을 금융화 시켰다. 그렇게 다 망쳐놓은 다음 이제 와서 '주주가치 경영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재벌들도 하루아침에 그렇게는 안 되겠지만 금융화할 것이다. 1등 상품이 영원히 가는 것도 아니니까.
GM은 일본이 막 치고 들어오기 시작할 때인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동차 시장 점유율이 44%였다. 그런데 지금 몇 %인가.

프레시안 : 재벌들이 금융자본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적 대타협론'을 얘기하기 힘들게 됐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경제위기를 맞아 최근 한국에서도 '노사정 타협안'이
발표됐다. 근데 대졸 초임 삭감 등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결과만

낳았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조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노사정의 대타협이 큰 틀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어졌다.

장하준 : 노사정 대타협으로 신입사원
임금을 깎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지금 상태로는 사회적 대타협이 힘들다는 건

인정한다. 노조도 각종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터지고 해서 점점 발언권도 많이 잃어가는 것 같다. 저는 학자로서 화두를 던진 것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엮어서 하자는 것은 정치인의 영역이다.

프레시안 :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아지면서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노사정 대타협을 이룬다고 해도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정부'라는 각 분야의 기득권 세력의 타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장하준 : 유럽도 비정규직이 많이 늘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잘 돼 있어 생활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보장제도가 형편 없어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상황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하려면 노조에서 제일 먼저 비정규직 줄이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엉뚱하게 신입사원 임금 깎는 식으로 타협했다.

벌목회사인 노키아가 1등 전자회사가 되기까지…

프레시안 : 의미 있는 '노사정 대타협'이 가능하기 위해선 국가가 '심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고백하는 등 국가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민영화, 규제완화 등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이미 국가가 통제 수단을 상당 부분 놓아버렸다고

할 수 있다.

장하준 : 국가가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만들면 된다.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은행을 다

민영화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쿠테타 일으킨 뒤 그 은행들을 국유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은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다. 그럴려면 대통령을 뭣하러 했나.

시장을 규제하라고 뽑아 놓은 게 정부다. 공무원들도 생각해봐야 한다. 맨날 규제완화만 하고 있다면 왜 월급을 받고 있는지.

프레시안 : 기업들은 관료가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개발연대와 지금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지금처럼 산업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른 상황에서는 관료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과거처럼 지도적 역할을 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선진국 제품을 모방해서 만들던 시절에는 엘리트 관료가 선진 기술과 정보를 빨리 입수해서 기업에 전달하고 기업을

지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삼성, 현대 등이 독자적인 신제품 생산 능력을 갖춘 지금은 이런 전략이 통할 수 없다면서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고 주장한다.

장하준 : 기업들이 그런 얘기하려면 어려워질 때 정부에 손 벌리면 안 된다. 물론 과거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똑같이 규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예 간섭을 말라는 것은 다른 얘기다. 국가가 큰 그림은 그려줘야 한다. 미국의 경우 연구개발비 지출 중 정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40%가 넘는다. 한국은 20%에 불과하다. 지금 미국 주도 기술 중에 정부 돈이 안 들어간 게 어디 있냐. 다 정부 돈으로 키운 것이다.

프레시안 : 앞뒤 가리지 않는 금융화는 위험하다, 여전히 제조업 중심이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일본,
독일처럼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은 오랜 전통을 지닌 기술 중심 중소기업이 활성화 돼 있고 이들 기업이 대기업과 공존하는 기업 생태계를 꾸리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뿌리가 약하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 오래 버티기 힘든 구조이고 신규 창업도 시들하다.

2000년 무렵까지 세계 1위로 꼽혔던 기업가 정신도 급격히 쇠퇴했다. 실력 있는 기술자들도 진로를 바꾸기 일쑤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 역할 이상을 하기 힘든 구조다. 이런 환경에서 제조업 육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자칫 공허할 수 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제조업 육성 대책이 뭘까?

장하준 : 제조업이 강한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을 보면 중소기업 위주의 기계부품산업이 강하다. 우리나라는 이 분야를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사실 일본이나 이탈리아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다 국가에서 키운 것이다. 일본도 초기에 대기업들이 우리나라 재벌들처럼 중소기업을 착취했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방지하는 법을 만들고 대기업들도 결의해서 기술 전수도 해주고 투자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서 키웠다.

이탈리아는 대기업 하청인 중소기업보다 독자 중소기업이 많은데, 대부분
지방정부 지원을 통해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이탈리아는 지역 특화가 잘 돼 있다. 지방정부에서 정보도 제공해주고 수출도 도와준다.

우리나라도 가만히 앉아서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만 하면 클 수 있나. 지원을 강화하기는 커녕 과거 중소기업은행도

슬쩍 이름 바꿔서 기업은행으로 만들지 않았나. 법을 만들어 더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처음에 벌목회사였다. 벌목공들의 신발사주다가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발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성장했다. 노키아가 전자제품을 만든다는 게 당시 시장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기업 내부에서 전략을 세우고 돈을 지원하는 등 장기적 투자를 통해 오늘날의 노키아가 됐다.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데 17년이나 걸렸다.

우리도 중소기업 기반이 더 강화될 필요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장기적 전망을 갖고 지원해야 한다.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제조업 중심 체제로 가게 되면 금융산업의 역할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금융산업은 어떻게 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

장하준 : 단기 주주의 이익이 우선시 돼서는 안된다. M&A가 자유화되고 외국인 주식시장이 자유화되면서 기업이 단기이윤을 극대화하고 주주들에 대한 배당을 극대화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됐다. 이를 일부 되돌려야

한다. 그래야 기업으로 자금이 들어가게 된다. 또 은행이 기업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주게 해야 한다. 90년대 초만 해도 우리 은행 대출의 90% 가까이가 기업 대출이었는데 이제는 40%도 될까말까한 수준이다.

주식시장과 은행의 행태를 안 바꾸면 자금이 필요한 기업은 자금 얻기 힘들고, 돈 있는 기업은 투자 안하고, 투자가 줄어드니까 고용
창출

안 되는 게 계속될 것이다.

또 우리 제조업이 지금 잘 나가는 거 같지만 주축산업이 다 80년대 개발된 것이다. 새 성장
동력이 나오지 않는다.

서비스산업은 신성장동력으로 한계가 있다

프레시안 : 그래서 정부는
의료 영리법인 허용 등 서비스업을 새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고 하고 있다.

장하준 : 서비스업은 기본적으로 기계화가 어려워서 생산성 향상이 불가능하다.
이발소에서 생산성 향상을 어떻게 시키겠나. 금융, 교육, 의료 등을 얘기하던데 금융은 지금 금융위기로 다 엉망이 된 상태고, 교육은 우리나라가 지금 다 해외로 내보내는 상황 아닌가. 대학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이론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수준에 그치는데 누가 우리나라에 배우러 오겠나.

또 서비스산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는 룩셈부르크 등 진짜 규모가 작은 나라 밖에 없다. 서비스업은 대부분 수출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걸로 국제수지를 유지할 수 없다. 미국은 그렇게 서비스산업이 발달했지만 계속 무역적자다. 우리는 복지서비스

말고는 별로 확대할 게 없다.

프레시안 : 한국은 수출주도형 국가라서 현 경제위기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수 확대 쪽으로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양극화가 심화돼 내수 확대가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장하준 : 우리나라는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저성장 양극화가 고착돼
남미화될 것 같다. 실제로 점점 남미화 되고 있다. 한국이 90년대 중반만 해도 가계저축이 국민소득대비 25%로 세계 1, 2위를 다퉜는데 지금은 1%도 안 된다. 브라질도 가계저축률이 7~8%는 된다. 물론 부자들 입장에서는 미국이나 남미 같은 사회가 더 살기 좋은 사회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여러 차례
강연에서 한미FTA 등 FTA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장하준 : 정부에서 다른 나라에서 있지도 않은 'FTA 허브'니 이런 구상을 얘기하던데 걱정스럽다.

프레시안 : 한미FTA의 가장 큰 문제는 뭔가?

장하준 : 다 문제다. 국가-투자자
소송도 엄청난 문제고, 지적재산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 농업 보상책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또 우리나라가 제조업 많이 발전한 것 같지만 평균생산성을 따지면 아직도 미국의 40%밖에 안 된다. FTA하면 망할 산업 많다.

프레시안 : 개인적인 얘기를 좀 묻겠다. 최근 한나라당
초청 강연을 하기도 했다. 재벌에 대한 입장 등 장 교수의 평소 지론이 한국의 지형 내에서는 여러가지 논란을 낳는 대목이 있다. 국내 좌파-우파 논쟁에 대해 어떻게 보나?

장하준 : 어느 나라나 좌-우, 진보-보수 이런 개념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나라마다 개념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이 과거 관치금융의 폐해 때문에 중앙은행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럽에서는 우파들이 하는 얘기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재벌하고 싸우는 게 좌파들이지만, 스웨덴에서는 재벌을 제일 비판하는 게 보수정당인

자유당이다. 스웨덴에서는 자유당이 주로 중소기업을 대변한다. 개인적으로는 좌우 편가르기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한국의 보수세력에서는 장 교수가 '성장론'에 방점을 찍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장하준 : 성장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과거 포드주의처럼 물건을 만들면서 수요를 확대하는 식으로 성장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이고, 신자유주의는 말로만 성장을 얘기한다. 진짜 성장에는 관심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착취하려고 성장을 얘기하지만 실제 성장률은 옛날보다 떨어진다.

프레시안 :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전홍기혜 기자,이대희 기자,손문상 기자(사진)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