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성, 현대모비스 통산 5번째 통합 우승 이끈 주역 ·챔프전 ‘MVP’
- 운명처럼 다가온 농구, 초교 3학년 때부터 ‘NBA 선수’ 꿈꿨다
- 점차 감추게 된 꿈···“‘넌 안 된다’는 말 수 없이 들었어”
- 차원이 달랐던 군 생활···“그 시절 나는 ‘미친놈’이었다”
- “2차례 미국 도전 실패 아닌 성장의 원동력. 준비되면 미국 무대 재도전”
[엠스플뉴스=용인]
“ 한국인 첫 NBA 선수가 되는 게 꿈이다. ”
초등학교 3학년 이대성이 자기소개 시간에 내뱉은 첫 번째 말이다. 이대성은 그때 가졌던 NBA 선수의 꿈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2013년 KBL(한국프로농구) 신인선수 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지명을 받은 이대성은 올 시즌 한국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현대모비스의 통산 5번째 통합 우승에 앞장섰고, 챔피언 결정전 ‘MVP’를 받았다.
하지만, 이대성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대성은 “ 남들은 ‘쟤 왜 저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론 후회가 많이 남은 시즌 ”이라며 “ 내가 가진 능력을 30%도 보여주지 못했다 ”고 말했다. 이어 “ 농구를 하면서 ‘넌 안 된다’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 여러 번 좌절했다 ”고 했다.
이대성은 편안한 길을 걸을 수도 있는 선수다. 프로 데뷔 시즌(2013-2014)을 시작으로 우승 반지만 벌써 3개째다. 양동근이 가진 개인 최다 우승(6회)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다. KBL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꿈이 있어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두 차례 미국 도전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포기는 없다.
엠스플뉴스는 경기도 용인 현대모비스 체육관에서 이대성을 만났다. 지금부터 스스로 준비가 되면 “ 다시 한 번 미국 무대에 도전하겠다 ”는 올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 이대성의 농구 인생으로 들어가 보자.
야구 선수를 꿈꾼 삼천포 소년, 농구와의 운명적인 만남
통합 우승에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차지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거 같다.
많이 부족한 데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통합 우승을 이루고, 많은 분이 좋게 봐주신 덕에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탔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많이 남은 시즌이다. 특히나 챔피언 결정전 4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2경기에서 실수가 잦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경기를 보여줬다.
햄스트링 부상은 전혀 몰랐다.
챔피언 결정전 5차전에 들어서면서 '무조건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6, 7차전은 도저히 뛸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여러모로 아쉽다. 코트를 가득 메워준 팬들에 보여줄 게 훨씬 더 많았는데,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궁극적인 목표인 통합 우승을 일군 건 정말 대단한 일이고 기뻤지만, 마음 한편엔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더라.
자유 이용권 따고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어쩌면 올 시즌이 인생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남들이 볼 땐 통합 우승에 MVP도 타고 심지어 5월엔 결혼까지 한다(웃음). 겉은 참 화려한데... 곧 있으면 아내가 될 친구가 그러더라. ‘네 얼굴을 보는 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경기력이 성에 차지 않아서 스스로 얼마나 자책했을지 상상이 되더라’고.
농구계에서 “열정만큼은 비교할 선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는 거 같다.
아니다. 꿈에 다가가려는 확고한 목표가 있어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다. 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NBA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하하).
그게 언제인가.
처음엔 야구 선수가 꿈이었다. 어릴 적부터 운동을 워낙 좋아했고, 야구는 가장 많이 접한 스포츠였다. 그런데 운명처럼 농구가 찾아왔다.
어떻게?
내가 살던 경상남도 삼천포엔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동광초등학교)에 있던 여자 농구부를 해체하고 남자 농구팀을 만든다는 거다. 당시 동광초 최동건 선생님은 정선민, 김지윤 등 전설적인 선수를 키워낸 명지도자였다. 그분이 은퇴하실 때쯤 돼서 남자 농구팀 창단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셨고, 운 좋게 그분 눈에 들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함께 농구를 시작한 게 (박)경상(현대모비스)이랑 (배)병준(KGC)이다.
여자 농구에 이어 남자 농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셨다.
선생님께선 열정이 넘치셨다. 그 덕에 초교 3학년 때부터 엄청난 양의 운동을 소화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주에 한 번씩은 농구 용어와 전술 등을 배웠다. 이른바 주입식 교육이었다(하하). 조기 교육을 잘 받아서 경상이, 병준이 모두 프로 선수가 된 게 아닐까.
어린 나이에 운동량 많고, 재미없는 용어와 전술 등을 주입식 교육으로 받으면 금세 질리지 않나.
엄청나게 질렸다. 하루에도 관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운동을 스스로가 원해서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선생님께서 시키니까 했다.
어릴 때부터 끈기가 남달랐다.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주변 사람에게 끈기 없는 아이로 인식되는 것도 싫었다. 또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어서 농구는 재미있게 했다. 돌아보면 고교 시절까진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했던 거 같다. 만약 키가 작고 달리기도 느렸다면 초교 시절에 농구를 관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웃음).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고교 시절, 이대성 “‘넌 안 된다’는 말 수 없이 들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이대성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끈기'와 '열정'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지금처럼 발버둥 치고 죽을힘을 다하진 않았다. 재능이 있고 농구를 재미있게 하다 보니까 순탄하게 나아갔던 거 같다. 그런데.
그런데?
‘남들하고 다른 차원의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다. 어느 한 순간이라기 보단 꾸준히 축적됐다. 농구를 하면서 ‘넌 안 된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처음 농구를 시작한 초교 3학년 때부터 자기소개하면 ‘한국 첫 NBA 선수가 꿈’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솔직히 그 나이엔 NBA가 뭔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꿈을 숨겨야 하나’란 생각이 들더라.
이유가 있을까.
내 꿈은 한국에선 이룰 수 없는 거였다. NBA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는 이유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손가락질도 받았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되면서 고교 시절엔 ‘프로농구 선수가 되겠다’는 소리도 함부로 못 했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면서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게 여기선 ‘옳은 거구나’란 걸 느꼈다. 또.
또?
나는 포인트 가드로 성장하고 싶었다. 미국에 진출하려면 내 키엔 포인트 가드가 제격이었다. 슈팅 가드나 스몰 포워드로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신발을 신었을 땐 키가 194cm다. 여기에 스피드와 점프력에도 자신이 있었다. 여기에 농구만 잘 배워서 미국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더라.
현실?
포인트 가드가 하고 싶다고 하면 ‘네가 무슨 포인트 가드냐’란 반응을 보였다. 감독, 코치, 선배 등 모두가 똑같았다. 실제로 고교 시절엔 팀 사정상 센터에 가까운 파워 포워드로 뛰었다. 대학(중앙대)에 가선 스몰 포워드를 소화했다. 비웃은 사람도 많았다. ‘쟤는 뭔데 포인트 가드를 한다’고 하는 것이냐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에게 응원은커녕 비아냥거리는 현실. 좌절도 많이 했을 거 같다.
그러려던 찰나에 내 꿈에 확신을 갖게 된 첫 계기가 있었다. 고교 3학년 때 국내에서 열린 NBA 캠프에 참가했는데 찰리 빌라누애바와 같은 현역 선수가 왔다. LA 클리퍼스, 샬럿 호네츠 코치들도 오셨다. 이분들은 내게 아무런 말도 안 하더라.
어떤 말?
‘포인트 가드가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럼 해봐’라고 하더라. 처음이었다. 한국에선 ‘뭐 하지마’만 듣고 자라왔다. 소통은 없었다. 그저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리바운드 참여하고, 박스아웃에만 신경 썼다. 드리블은 불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포인트 가드가 아닌 파워포워드였으니까. 하지만, NBA 캠프에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가 먼저였다.
포인트 가드로 뛰었나.
농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볼 운반을 도맡았다. 경기 조율하고, 패스에 신경 쓰고. 기회가 나면 득점도 하고. 신나게 농구했다. 그랬더니 NBA 캠프 MVP를 주더라. 심지어 현역 NBA 코치들이 ‘너 가능성이 보인다. 미국 대학에 진학할 생각 없냐’고 물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한국에선 ‘넌 안 된다’ ‘뭐 하지 마’란 소리만 들어왔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내 꿈에 확신을 줬다. 내 꿈이 잘못된 게 아니라, 어른들 생각이 틀렸구나.
부모님과 예비 신부에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대학 시절···이대성 “어디론가 숨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당장 미국 진출이 아닌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다. 농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경기를 못 뛰었다. 내 꿈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여기서 뛰질 못하니까 미칠 거 같더라. 특히나.
특히나?
부모님이 경기를 보러 오시는 데 난 한 번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예비 신부도 대학교 2학년 때 만났다. 이 친구는 당시에 1학년이었는데, 꿈이 기자라고 해서 중앙대 신문사에 들어갔다. 운이 좋게도 스포츠부로 배정을 받고 농구 전담 취재까지 나왔다. 처음엔 마냥 좋았는데, 경기를 못 뛰니까 부끄럽더라. 어디론가 숨고 싶고. 대학 시절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기대에 못 미쳤던 거 같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미국 하와이 브리검 영 대학으로 편입을 했다.
나처럼 경기를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군대를 가거나 3학년을 마치고 KBL 진출을 시도하거나.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농구하는 게 꿈이었으니까 갔다. 솔직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었다. 준비된 건 아무 것도 없는 시점이었다.
어려운 시기, 꿈에 한 발 다가섰다.
그 한 발 내딛는 게 정말 어렵더라. 브리검 영 대학으로 편입하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당장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솔직히 알파벳만 알고 단어나 문법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책을 폈는데 뭐부터 해야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농구공 대신 펜을 잡을 수밖에 없었겠다.
3개월간 부산 OOO 토플 학원 옆에 오피스텔 방 얻어서 종일 영어 공부만 했다. 농구가 미치도록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브리검 영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점수만 받으면, 몇 개월을 쉬더라도 꿈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으니 꾹 참고 해내자’고 수백 번 되뇌었다. 그랬더니 되더라. 브리검 영 대학 농구부에 들어간 것이다.
꿈에 그리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NCAA(미국 대학 농구) 디비전2에 속해있는 브리검 영 대학이지만, 꿈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나 브리검 영 대학에선 포인트 가드를 소화했다. 첫 테스트에서 5분 만에 ‘내년부터 우리 팀 주전 포인트 가드’란 소리를 들었다. ‘내가 틀리지 않았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마냥 좋았다(웃음).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더라.
왜?
농구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수업에 꾸준히 참여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을 유지해야 했다. 온종일 도서관에만 있는 날이 많았다. 농구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데, 공부는 그게 아니니까 어렵더라. 토플 책을 처음 폈을 때처럼 뭘 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는 날이 수두룩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겠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니까 경기력이 기대만큼 올라오질 않더라. 마음은 계속 NBA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현실은 영 딴판이니까 실망스러웠다.
농구보다 공부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일까.
글쎄. 농구도 많이 했다. 다만 미국에선 공부나 농구나 경쟁이 엄청 치열하다. 인생에서 정말 큰 경험을 했지만 아쉬움도 많았던 그런 시기였다.
큰 경험이라면?
가장 크게 느낀 건 포인트 가드란 포지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이 포지션이 NBA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한 기술 쓰면서 하는 게 아니’란 걸 느꼈다. 시작부터 끝까지 패턴이더라. 모든 게 짜여 져 있다. ‘농구가 이렇게 복잡한 운동’이란 걸 크게 느낀 때였다. 특히나.
특히나?
켄 와그너 당시 브리검 영 감독께 정말 감사했다. 날 아들처럼 챙겨줬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농구를 다시 보게 만들어주셨다. 특히나 와그너 감독께선 항상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한국에선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도자가 선수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무슨 일을 해야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사람을 공감시킬 줄 아는 첫 지도자였다.
자신감 잃지 않은 이대성 “미국 도전은 실패? 농구 인생의 큰 도움이 됐다”
브리검 영 대학에서 1년 뛰고 한국에 복귀했다. 그리고선 곧바로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도전했다.
브리검 영 대학에서 1년 더 농구를 배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앙대 3학년 때 딱 3경기 뛰었던 게 문제가 됐다. 세계 어느 대학이든지 농구 선수는 4년밖에 못 뛰더라. 중앙대 3학년 때 뛴 경기를 1년으로 치면서, 대학에선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됐다. 당시 내게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죽기 살기로 준비해서 도전했던 거 같다.
프로에 지명될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나.
농구를 시작한 초교 3학년 때부터 자신감은 항상 함께한다(웃음). 특히나 미국에서 많은 걸 배웠다. 예를 들면 웨이트 트레이닝이다. 사실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몸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웨이트도 꾸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브리검 영 대학에서 연습 중 내가 나가떨어진 일이 있었다.
어쩌다?
몸이 좋은 친구와 부딪혔는데 데굴데굴 굴렀다.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웨이트를 빼먹지 않고 했다. 발목을 다치면서부터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아쉽게 1년을 마무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브리검 영 대학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느낄 수 있었다. 포인트 가드로 뛰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았고. 실패를 겪은 뒤에 한 층 성장한 셈이다(웃음).
2013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명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 지명을 받았다.
꿈같은 나날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출전 기회를 얻고, 한국 최고의 선수인 (양)동근이 형과 손발을 맞췄다. 형이 다쳤을 땐 주전 포인트 가드로도 뛰었다. 심지어 챔피언 결정전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런데.
그런데?
난 참 시련이 많은 사람이다(웃음). 순탄하게 갈 수 있었던 프로 첫 시즌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만한 부상을 당했다. 2014년 2월 16일 안양 KGC 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덩크를 시도하다가 발목을 다쳤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투혼을 발휘해 복귀했지만, 이 부상이 예상보다 굉장히 오래갔다.
큰 부상이었나.
잘하던 중에 발목을 다쳤다. 재활만 7개월을 했다. 그 가운데 5개월은 제대로 걷질 못했다. 그런데도 걱정을 안했다.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복귀하면 얼마든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팀에서 역할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몸도 예상보다 올라오지 않았다. 이렇게 프로 2년 차 시즌을 보내고 입대했다(웃음). 유재학 감독께서도 가끔 이 부상을 말씀하신다.
감독님이?
매번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네가 그때 발목을 안 다쳤으면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나가서 금메달 목에 걸었을 거다. 무리한 플레이로 후회할 부상 당해봐 놓고서 또 그러느냐’고 하신다(웃음).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땄으면 군 면제 혜택 받았을 거고, 벌써 FA 선수가 됐을 거다. 주변 사람들도 다 그래요. ‘그 덩크슛만 아니었으면 네 커리어가 더 화려했을 거’라고.
공감하나.
반대로 생각한다. 그때 다친 경험이 있어서 G-리그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다치고 보낸 시간이 정말 누구보다 간절했고 후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군 생활이 남달랐을 거 같다.
(웃음). 프로 2년 차 때 통합 우승을 했다. 난 완전히 조연이었다. 우승해서 감사하고 좋았지만, 꿈꾸던 현실과 괴리감이 컸다. 항상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데, 다치면서 출전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그렇게 입대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전역하면 마지막으로 미국 진출을 꿈꿀 수 있을 거다.’
차원이 다른 군 생활, 이대성 “그 시절의 나는 ‘미친놈’이었다”
상무에서의 2년, 궁금하다.
지금도 가끔 군 시절 나를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웃음). ‘인간이 저렇게도 생활할 수 있나’란 생각이 절로 나기 때문이다. 크게는 후임과 선임 때의 계획을 나눴다. 후임 땐 제 시간을 갖는 게 어렵다. 그래도 계획을 세운 게 운동, 책 500권 읽기였다.
책 500권?
‘똑똑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는 게 많아져야 미국 무대 도전해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운동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악착같이 했다. 훈련소에서 팔굽혀펴기, 스쿼트, 런지 등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을 각각 500개씩 했다. 자기 전 1시간씩은 요가까지 했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할 말이 없다.
‘군대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미국 진출의 꿈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절박하더라. 그렇게 6개월간 후임 생활을 마치고 선임이 되면서 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운동 시간을 크게 늘린 거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책 500권 읽기는 성공한 건가.
6개월 동안 130권을 읽었다. 목표치엔 한참 모자랐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게 참 많았다.
선임 때도 책 500권 읽기에 도전했나.
저녁 점호(21시 30분) 후 30분간 무조건 책을 봤다(웃음). 특히나 운동을 정말 원 없이 했다. 오전 운동이 10시에 시작하면, 나는 9시 30분에 나가서 피지컬 운동을 했다. 11시 30분에 팀 운동 마치고 밥 먹으러 가면, 난 체육관에 남아 15분 더 운동했다. 공을 가지고 패스 연습을 하든가 슛을 던졌다.
밥을 먹고 나선?
점심 먹고 나서 30분 낮잠을 잤다. 그리고선 오후 훈련(2시 30분) 시작하기 30분 전에 나가서 드리블 연습을 했다. 팀 운동을 마치고 나면 웨이트 트레이닝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NBA 선수 영상 찾아서 그들의 운동 프로그램을 따라 해 보려고 했다. 아! 메모도 참 많이 했다.
메모?
그 순간순간을 메모했다. 내 꿈에 다가갈 수 있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언제 떠오를지 모르니까. 메모장을 들고 다니면서 뭐든 적었다. 동기부여가 될 만한 문구 매일같이 찾아서 보고, 스티븐 내쉬 사진 방에 붙여놓고 ‘언젠가 저런 선수가 될 거다’고 의지 다지고. 휴식이란 있을 수 없는 생활을 했다(웃음).
몸에 탈 나지 않나.
처음엔 코피가 나더라. 하지만, 하다 보니 또 되더라. 그때 느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구나. 밥도 아침만 제대로 먹었다. 점심, 저녁엔 계란하고 보충제 중심으로 챙겨 먹었다. 한 번에 계란 20개를 먹고 운동했다. 그러고 나서 웨이트, 스킬 트레이닝을 진행했다. 점호가 끝나면 책을 읽고, 10시 30분부터 11시까진 일기를 썼다. 그리고 11시부터 12시까진 요가를 했고, 잠들기 직전엔 복근 운동 1,000개를 했다. 이게 일과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인가.
매일같이 일어나기 싫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하니까 됐다. 올 시즌 자유 이용권을 계속 얘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NBA 선수 영상을 보면서 매일같이 따라 했다. 선임이 된 1년 2개월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지겹도록 반복하면서 몸에 익힌 걸 아직 팬들에겐 보여주지 못했다. 군 시절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땀 흘린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다.
잠자는 시간은 있었나.
낮잠 30분 포함해서 6시간은 잤다. 그 외 시간은 미국 진출을 위한 준비에 쏟아 부었다. 심지어 휴가를 나가서도 똑같이 했다. 군대에서 월급 받는 거 모아서 운동 용품도 샀다.
군 생활을 주제로 한 이야기 중에 최고인 거 같다.
(하하). 전역 후에도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KBL 어떤 선수보다 간절하다’고 자부한다. 꿈을 향한 간절함 때문에 저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거다. 특히나.
특히나?
누구든지 한 번쯤은 열심히 할 수 있다. 극기 훈련도 3박 4일~1주일 진행하지 않나. 하지만, 자신이 꿈을 향해 매일같이 나아가는 건 어렵다. 습관을 만드는 게 쉽지 않은 까닭이다. 짧게는 1년, 2년, 길게는 10년 이상 이어간다는 게 대단한 거다. 그래서 내가 (양)동근이 형을 존경한다.
양동근?
역대 KBL에서 퍼포먼스만 놓고 보면 최고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선수도 동근이 형만큼 꾸준하진 못했다. 프로에 데뷔한 2004-2005시즌부터 통합 우승을 일군 올해까지, 양동근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힘이 습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매일 운동하고, 식습관에 신경 쓰고 하는 등등.
G-리그 진출, 또 한 번의 실패···“당시 경험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일까. 2017년 10월 G-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G-리그 드래프트 1라운드 20순위로 이리 베이호크스의 지명을 받았다.
매일같이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사실 쉽진 않았다. 군 전역 후 잠시나마 뛴 소속팀에서의 활약이 좋은 게 아니었다. 경기 감각이 떨어졌고 몸 관리에도 실패했다. ‘몸 만들겠다’고 매일같이 고기, 닭가슴살만 먹고 탄수화물을 먹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경기를 뛰고 나면 회복이 안 되더라.
그런데 어떻게 갔나.
정신력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남들이 ‘넌 안 된다’고 하면 좌절하는 게 아니라 ‘틀린 걸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군대 휴가 중에도 운동만 했다. 그런 게 쌓여서 자신에 관한 믿음이 강해졌고, 미국에서 뛸 기회를 얻었다.
미국 진출 직전 시즌에 만족하기 힘든 경기력을 보였는데 힘든 점은 없었을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힘들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땀 흘렸다’고 자부하는 데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무에 있을 땐 프로와의 연습 경기라든가 프로-아마 최강자전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하지만, 팀에 복귀한 뒤엔 경기력이 저조해서 고민이 많았다. 그때 (김)효범이 형이 많은 도움을 줬다.
어떤?
효범이 형에게 어릴 적부터 미국 NBA를 꿈꿔왔고, 군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했다. 효범이 형이 그러더라. ‘대성아, 네가 지금 안 되는 건 실력 문제가 아니다. 팀 상황이나 역할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네가 부진한 거다. 넌 충분히 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라. 지금까지 해오던 거처럼 하면 넌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했다.
아.
말 한 마디가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 효범이 형이 그 얘길 안 했다면, 유재학 감독께 ‘미국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 거다. 지금도 효범이 형은 큰 도움을 준다. G-리그 코치 생활을 하며 힘들 텐데 현대모비스 경기를 챙겨보고 내 플레이를 매번 피드백해준다. ‘다음번엔 이런 상황에서 조금 다르게 플레이해 보면 어떨까’라고 조언해주고, 응원을 보내준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형이다.
우여곡절 끝에 G-리그에 갔다. 당시 기분은 어땠나.
NBA 진출이란 꿈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는 게 아주 좋았다. 꿈이 현실로 그려지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더라. 당시 이런 생각도 했다.
어떤?
꿈이라는 게 ‘나만 잘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더라. 스스로 목표를 향해 준비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그러다 보면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둘 만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는 분을 만나면서 미국 진출에 한 발 다가서게 된 거다.
본격적인 도전의 시작이었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의욕만 너무 앞세웠다. 늘 해온 대로 운동만 했다. 쉬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팀에서 휴가를 줘도 체육관에 나와 슛을 던지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았다. 매일 몸이 부서질 것 같이 힘들었다. 난 그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더라. 미국에서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섰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대성의 강점이자 단점 아닌가.
농구 하면서 ‘아 이럴 때 컨디션이 좋다고 하는구나’란 걸 올 시즌에 처음 느꼈다. 12월부터 종아리, 햄스트링 부상에 시달리면서 의도치 않게 휴식을 취했다. 그러고 나서 코트로 복귀하니까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더라. ‘아, 내가 이렇게 빠른 선수였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웃음).
‘미국에서 운동과 휴식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나아갔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많았을 거 같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으로 나는 한층 더 성장했다. 한국에서 나만 가진 경험 아닌가. KBL에선 누구도 G-리그를 경험하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어떤 게 경쟁력이 될 수 있고, 부족한지를 배웠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대성은 없었을 거다.
직접 뛰어본 G-리그는 어땠나.
차원이 다르다. NBA에서 내려온 선수들과 매일같이 부딪히면서 연습했다. 부족한 걸 매일 같이 느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지도 못한 플레이가 나올 땐 ‘아, 이런 선수가 G-리그로 내려와서 뛰는 데 NBA는 얼마나 더 대단한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좌절도 많이 했고.
2017년 12월, 이리 베이호크스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후 한국 복귀를 결정했다.
사실 미국에 도전하기 전에 각서를 쓰고 갔다(웃음). 유재학 감독께선 ‘쟤는 한 번 안 되면 계속할 녀석’이라고 생각하신 거 같았다. 미국에 간다고 말씀드렸더니 바로 ‘각서를 쓰라’고 하시더라. ‘미국에서 힘든 상황이 닥치면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인까지 했다(하하). 그래서 당시 G-리그 팀 몇 군데서 연락이 왔는데, 현대모비스 복귀를 결정하게 됐다.
각서 왜 썼나(하하).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긴 했지만, (각서) 쓰길 잘한 거 같다. 현대모비스 복귀 후에 꾸준히 출장 기회를 잡으면서 한층 더 성장했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됐다.
챔프전 ‘MVP’ 이대성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 여전히 NBA를 꿈꾸기 때문”
올 시즌을 준비하는 자세나 과정이 남달랐을 거 같다.
마음잡고 제대로 준비했다. 프로 데뷔 후 비시즌을 팀과 함께 소화한 것도 처음이었다. 신인 땐 중간에 들어왔고, 2년 차 땐 재활 중이었다. 2016-2017시즌엔 군 전역 후 합류해 7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지난 시즌엔 미국 도전을 접고 돌아오면서 절반의 시간을 함께했다. 사실.
사실?
올 시즌도 팀과 함께 비시즌을 준비하지 못 할 뻔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당하면서 대표팀에서 나오게 됐고, 한 달 휴식을 취한 뒤 팀에 합류해 올 시즌을 준비했다.
올 시즌엔 ‘뭔가 되겠구나’란 걸 훈련 때부터 느꼈나.
솔직히 팀은 잘 될 줄 알았다. (라)건아가 복귀하면서 ‘우승’을 목표로 잡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빛을 보기 힘든 시즌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즌엔 나와 (박)경상이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올해는 건아를 중심으로 효율 농구를 펼치겠다’란 느낌이 온 거지. 팀이 최우선이지만,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심이 커서 그런지 ‘최고의 한 해가 되겠구나’란 생각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올 시즌 다치기 전까진 이전과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늘 하던 대로 의욕 넘치고 강약조절이 안 됐다(웃음). 그런데 2월 2일 부산 KT 소닉붐과의 경기에서 그토록 지적받던 ‘강약조절’을 배우게 됐다.
어떤 일이 있었나.
12월 22일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경기 후 42일 만에 나선 경기였다. 농구에 굶주려 있어서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다. 과감하게 슛을 던지고 내려오는 데 KT 단신 외국인 선수 저스틴 덴트몬과 부딪혔다. 여기서 내 무릎이 뒤로 확 꺾였다. 무릎이 부어오르고 엄청 무섭더라. ‘아 참 운도 없지. 또 쉬어야 하나’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또 부상이었나.
무릎 보호대를 차고 경기를 뛰었다. 그런데 이전처럼 확 나아가질 못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더라. 웃긴 건 이때부터 경기력이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다. 공을 잡고 바로 튀어 나가는 게 아니라 한 템포 느리게 나가니까 시야가 확 트이는 거다.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동료들의 움직임, 상대 수비의 약점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하.
이전엔 내가 가진 에너지를 코트 위에서 다 쏟아 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있으면 수비에서 다 쓸려고 했다. 하지만, KT와의 경기를 통해서 ‘굳이 에너지를 다 쏟을 필요가 없구나’란 걸 배웠다. 코트에 들어선 시간 내내 에너지를 쏟아붓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른 ‘강약조절이 필요하구나’라는 걸 드디어 느낀 거지(웃음).
배운 것도 많고 통합우승까지 차지한 시즌. 정규리그 시상식에선 무관에 그쳤다.
솔직히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정규리그 MVP는 받기 어렵다는 걸 예상했다. 부상으로 정규리그 54경기 가운데 20경기를 빠졌으니까. 하지만, 수비상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아쉬웠다.
정규리그 시상식 무관이 봄 농구에서의 맹활약에 영향을 끼쳤을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던 대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다시피 결과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많은 플레이오프였다. 4강 1, 2차전에선 급성 장염으로 고생했다. 3, 4차전에서 몸이 좀 올라오나 싶었는데, 챔피언 결정전에선 허리와 햄스트링이 말썽을 부렸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후회가 아직도 떠나질 않는다. 보여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는데.
홀로 체육관에서 차기 시즌 준비할 거 같다.
챔피언 결정전 5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이 심해져서 못 뛴다. 결혼 준비도 해야 한다(웃음). 하지만, 올여름엔 다시 한 번 죽을힘을 다할 거다. 지난해 여름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슈팅 성공 횟수 800개가 넘어설 때까지 쏘고 또 던질 거다. 차기 시즌엔 다치지 않도록 재활, 피지컬 트레이닝에 더 신경 쓸 거고.
2019-2020시즌을 마치면 FA가 된다. 이대성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가.
준비되면 언제든지 도전한다. 감독께서 ‘한국 최고가 되면 언제든지 도전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올 시즌처럼 스스로 ‘실패’라고 생각한다면 도전은 어렵지 않을까. 누가 봐도 ‘이대성이 한국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해준다면 주저하지 않을 거다. 감독님께 이미 말씀드렸다. 2019-2020시즌엔 무조건 한국 최고로 만들어달라고.
한국 최고의 기준이 있을까.
꾸준함이다. 나는 아직 기복이 심하다. 올 시즌 ‘경기력이 좋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시즌 내내 이어지면 누구든지 인정해주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선 통합 우승이나 챔피언 결정전 MVP란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땀 흘리는 게 중요하다. 나는 아직도 간절하다. 꿈에 다가서기 위해선 풀어야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구 선수 이대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꿈인 거 같다.
꿈이 있어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동기부여를 준다. 꿈만 보고 갈 거다. 사람들은 통합 우승에 챔피언 결정전 MVP를 받은 내가 불만족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꿈에 빗대어 봤을 땐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다. 난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반응형
'Sports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U-20 월드컵 준우승과 한국 축구 (0) | 2019.06.18 |
---|---|
Does Norway Have the Answer to Excess in Youth Sports? (0) | 2019.04.29 |
Lionel Messi’s Life Story (0) | 2019.03.27 |
MAMBA 101: Welcome to Kobe Bryant’s Next Chapter (0) | 2019.03.20 |
(스포츠 인문학) 감독과 리더십 (0) | 2019.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