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916개 초·중·고 혁신학교가 있다. 짧은 시기 급속히 늘어난 탓에 ‘무늬만 혁신학교’라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꿈쩍하기 싫어하는 공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희망의 ‘파일럿 스쿨’들이다.
최근 여러 혁신학교를 돌아보면서 많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를 만났다. 대화 중에는 반드시 ‘아이와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행복한 학교’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혁신학교 이름 또한 행복더하기학교·행복씨앗학교·행복배움학교·행복나눔학교 등등 다양하다. 한마디로 혁신학교의 최종 종착지는 ‘행복한 학교’인 듯하다.
유난히 ‘행복’이라는 단어가 넘친다. 행복한 배움, 행복한 교실처럼 ‘행복한’이라는 형용사는 이데아의 수식어다. 문제는 행복이라는 말이 그 본뜻과 달리 불행한 교육과 사회를 증거하는 반어로 들리는 데 있다. 부족한 것들이 역설의 언어로 범람하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자녀의 행복을 얘기하면서도 정작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불안감이 먼저 엄습하는 부모가 있다. 교사들 또한 교육보다는 눈에 보이는 점수에 더 급급해서 끌려다닌다. 사회는 ‘노는 아이’들의 행복이 두렵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의 교실을 돌아본 적이 몇 번 있다. 이 나라들 또한 신자유주의 광풍에서 자유롭진 못하지만 여전히 부러운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움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는 이들이 누리는 행복한 여유가 곳곳에서 배어난다. 구태여 힘든 반항을 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는 차분하고 교사의 지시에 잘 따른다.
ⓒ박해성 그림 |
핀란드 헬싱키 외곽의 어느 학교를 방문했을 때다. 11학년(고2) 교실의 영어 수업을 지켜보았다. 핀란드어가 우랄어족에 속해서 영어 수업을 어떻게 하나 궁금했는데, 평이한 수업인데도 학생들의 집중력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업을 참관하다가 교사의 양해를 구하고 물었다. 학교에 오는 것,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냐고, 그런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놀랍게도 30명 정도의 반 학생 전체가 이상한 질문이라는 뜨악한 표정을 하면서 손을 든다. 내친김에 이 공부가 여러분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냐는 물음에도 당연히 그렇단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그대로 사회나 인생과 연결된다고 믿는 아이들이 보이는 신뢰다.
교육청에서 일한 지난 몇 해 동안 많은 학교를 보았다. 과연 우리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학교 생활이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몇 명이나 손을 들까를 상상했다. 가슴 한쪽이 싸하게 아파왔다.
교실이 중세 수도원 같은 곳이어서야 되겠나
첫 수업시간부터 안드로메다를 여행하는 학생들, ‘주면야동(낮에는 자고 밤에는 게임과 동영상으로 지새는 것)’에 취한 학생들 사이로, 그래도 교사와 눈을 마주치는 일부 아이들을 붙잡고 지탱하는 게 한국의 교실이다. ‘인서울’ 대학은 어차피 상위 10%에게 국한된 세계임을 아는, 예비 ‘지잡대생’을 자처하는 아이들에게, 교실은 끌려들어간 중세 수도원 같은 인내의 시공간이다. 세계 최고의 학업성취도와 대학입학률, 가장 우수한 교사 집단이라는, 이 ‘최고’의 교육 무대 뒤에서, 이렇게 불행한 교실 풍경은 과연 무엇을 위한 교육이고 누구를 위한 공부인지를 늘 되묻게 했다.
제러미 러프킨의 <공감의 시대>는 부의 축적이 증가할수록 더 불행해지는 나쁜 사회를 이야기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그 이상의 수입은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삶의 일차적 동기가 돈·이미지·명성인 학생들이 우울증, 신체적 질병, 약물중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부정적 정서와 이기적 성향이 강하며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들춰낸다.
이제 ‘행복’이나 ‘국격’ 등은 더 이상 경제 규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의 대부분은 부의 부족이 아니라 불공정과 불신과 불평등에서 나온다. 우리 미래 세대의 아이들을 위한 담대한 교육과 사회개혁을 미룰 때가 아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새 길이 있다. 더 이상 ‘행복한 교육’을 입에 달고 살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는 새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