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경제·사회

[단독 인터뷰]강준만/경향신문

youngsports 2013. 6. 19. 13:23


[단독 인터뷰]강준만 “법이 없어서 갑이 횡포 부리는 게 아냐…보수·진보 모두 기존 정치 관행 바꿔야”
전주|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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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 힘과 정열을 정권 장악이라는 슈퍼갑 지위 차지하기 위한 증오의 이전투구에 쏟아부어

지난달 27일 전북대 연구실에서 만난 강준만 교수는 “책을 많이 냈다고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자랑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되어버렸다”며 웃었다. 포스코 라면 상무에 이어 녹취록 공개로 남양유업 사태가 고조되던 때 맞춰 내놓은 <갑과 을의 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갑을관계 이슈가 터지자 강 교수는 이전 월간 ‘인물과 사상’에 100매, 200매씩 써온 글에다 머리말과 맺음말을 추가해 책을 바로 내놓았다. 다작을 두고, 강 교수는 “밥 먹고 이짓만 하니까, (책 내는 게) 일종의 중독이 되었다”고 다시 웃었다. 

미디어는 주로 시의적 내용과 발 빠른 출간에 주목했다. <갑과 을의 나라>는 일중독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갑을관계는 강 교수가 오래 천착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각개약진 공화국> <룸살롱 공화국>,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전라도 죽이기>와 같은 책을 통해 한국 사회 여러 부문의 갑을관계 문제와 폐해를 직설적인 화법으로 비판했다. 강 교수가 ‘킹메이커’로 불린 계기가 된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 죽이기> 같은 책도 한국 주류 정치와 언론에서 ‘을’ 취급을 받으며 배제된 정치(인) 와 지역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다. 

강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사회·경제 전 부문에 퍼져 있는 갑을관계에 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쏟아냈다. 그는 “한국은 모든 삶의 목표가 갑이 되기 위한 것으로 수렴되는 ‘갑과 을의 나라’”라고 말했다. 최근 남양유업 사태를 두곤 “남양유업 사태로 대변되는 수많은 갑을관계에서 드러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을을 쥐어짜 수익성을 맞춰온 대기업들의 성장 방식”이라며 “(그런) 성장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고, 출구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 같이 갑을관계가 삶의 기본적인 문법으로까지 자리 잡은 풍토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갑을관계적 착취를 하지 않고 을을 대등한 파트너로 대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며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혁신을 뽑아내는 방법으로서의 경제 체제 전환을 논의해봐야 한다”고도 했다. 

최근‘갑과 을의 나라’를 출간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27일 연구실에 갑을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주/강윤중 기자



정치 개혁 문제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법이 없어서 갑이 횡포를 부리는 게 아니다”며 “경제민주화 관련 법을 제정해도 보수 진보 정치세력이 모두 공범인 기존 정치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갑을관계 청산은 요원하다”고 했다. 갑을관계 문제의 원인으로 전관예우를 꼽은 그는 “전관예우의 부패의 악취가 하늘을 찔러도 정치인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코를 돌리고 딴짓을 한다”며 “그렇게 해서 남는 힘과 정열을 정권 장악이라는 슈퍼갑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증오의 이전투구에 쏟아붓는다”고 말했다.

최근 민주당의 ‘을 지키기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 같은 정치권의 움직임에 대해선 “을의 지위로 압박 핍박받는 사람들 이야기할 데 어디 있나. 정당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채널이 되어줘야 한다”며 “자기들 안의 갑을관계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호남 정치·지역 문제를 두고, “민주당이 ‘탈호남 정당이다, 전라도 정당 아니다’라고 하면 호남에서든 그 밖의 지역에서든 비웃는다”며 “선진적인 전라도 정치로 정면돌파해야 한다. 광주 내부의 지역정치에서 가장 앞서가야 하는 모습을 왜 못 보여주나”라고 했다. “새누리당 정권에 대한 분노를 조금 돌려서 광주 지역의 선진적인 정치를 해보이면, 그게 바로 야권의 정치 힘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안철수의 힘>을 낸 적이 있는 강 교수는 “(안철수 의원을 포함해) 정치에 대한 글을 직접 쓰는 건 피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안철수의 힘> 후속편을 쓸 계획은 없다는 말이다. 그는 “<안철수의 힘>을 내고 느낀 게 있다. 안철수가 바랐던 거나 제가 지지하고, 꿈꿨던 것이 기존 이전투구판의 자장에 빨려들었다”며 “증오의 종언을 외쳤는데,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글쓰기 방식은 간접적으로, 넛지 방식으로, 우회적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강 교수는 안 의원의 전망에 대해 “정치는 경험인데 쉽게 되겠나”면서도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결국 잘 할 거라고 본다”고도 했다. 

강 교수는 매일 출근할 때 집에서 걸어다닌다고 했다. 퇴근 후엔 헬스로 건강을 다지고 있다. 정년 퇴임 때까지 전북대에서 학생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 안 쫓아내면요. 나갈 수도 없다”라며 웃었다. “죽을 때까지 ‘인물과 사상’을 내겠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3시간 가량 진행한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노무현 정권 때 갑을관계, 민주당 분당 때의 심정, 일베의 5·18왜곡과 전라도 문제, 표현의 자유 논란, 박원순 서울시장에 관한 생각도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책을 또 냈는데.

“원래 월간 ‘인물과 사상’에 100매, 200매 써온 글이 있다. 책 많이 냈다고 욕을 많이 먹어서, 자랑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되어버렸다. 먹고살고 하는 게 책 쓰는 것 뿐이라 그렇다. 밥먹고 이짓만 하니까. 일종의 중독이 되었다. 이번 책은 갑을문제가 터져서 예전에 썼던 글을 묶어서 내자고 해서 시작했다. 머리말하고 맺음말을 최근에 썼다. 갑을관계는 예전 ‘각개약진 공화국’이나 ‘룸살롱 공화국’에서부터 주욱 했던 이야기다. 물론 책으로 쓴 이야기는 이번 책에 뺐다.”

- 남양유업의 경우처럼 최근 경제산업 부문에서 갑을관계 문제가 촉발됐다.

“한국 경제 패러다임이 전환이 필요하거나 또는 강요받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지금까지 남양유업 사태로 대변되는 수많은 갑을관계에서 드러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을을 쥐어짜 수익성을 맞춰온 대기업들의 성장 방식이다. 이제 그 방식이 되겠는가. 성장할 때는 무리가 없지만, 성장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고, 출구는 없는 상황이다.”

- 이 문제 해결 방안은 뭐라고 생각하나.

“정의나 의분으로 갑을관계를 접근하면 해결할 수 없다. 갑에게 정의나 도덕으로 ‘너 옳지 않아.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해봐라. 안 먹힌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끈질기고 강력한데. 이 사람들 정의나 도덕 호소한다고 달라지겠느냐. 출발은 정의와 의분에 근거하되, 혁신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한국 같이 갑을관계가 삶의 기본적인 문법으로까지 자리 잡은 풍토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갑을관계적 착취를 하지 않고 을을 대등한 파트너로 대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런데 맥도날드 사례를 보자. 보통 진보적 지식인들의 말처럼 맥도날드가 미제국주의 상징이고, 노조 인정 안하는 걸 비판하더라도, 맥도날드의 성공과 혁신이 갑인 본사가 아니라 을인 프랜차이지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데서 나온 것을 살펴봐야 한다. 언론이 갑을관계 보도할 때, 을의 창의성을 받아서 재미본 성공 사례를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이게 돈 벌이가 된다는 걸 알려줘야 이 사람들이 움직인다. 정의와 도덕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 자본논리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폭풍우 몰아칠 때 잠깐 피하자 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다.”

전주/강윤중 기자

- 창의성 사례로만 가능한가

“경제학자들이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혁신을 뽑아내는 방법으로서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논의해봐야 한다. 말로만 실리콘밸리 배우자고 할 게 아니다. 스마트폰도 안 쓰는 처지라 보상심리 차원에서 그쪽 책을 거의 다 사서 읽는데, 저작권 빼앗아먹고 한 이야기가 없다. 새로운 걸 내면 꼭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한국은 공모전으로 학생들 아이디어 뽑아먹고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 아니냐. 학생들끼리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공모전에 내지 말라고 할 정도다. 이러면 창조가 이뤄지겠나.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 이야기하는데, 창조는 밑에서, 현장에서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창조를 뽑아 먹고 뜯어먹는 용도로서 탕진하는 게 현실 아니냐. 갑을관계 없애는 건, 우파의 담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성장만이 살길이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의 시스템으로 경쟁력 있겠느냐는 것이다.”



“갑을관계 없애는 건, 우파의 담론이 되어야”



- 공정거래법 같은 현행법 강화는 대안이 될 수 없나.

“남양유업 사태에서 논란이 된 밀어내기는 공정거래법 23조 구입강제 조항으로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그렇지만, 이론과 현실은 따로 논다. 고발해봐야 시정 명령 또는 과징금 처분이 대부분이다. 형사처분조항을 적용하는 일은 없다. 전관예우 공화국이라 그렇다. 김앤장 등 국내 10대 로펌에 몸담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 출신과 국세청 공무원 출신이 100명에 육박한다. 행정부처와 그 산하 공기업의 고위직은 정치인들의 밥줄이다. 선거 기여를 유도하는 논공행상용 미끼로 써야 하는 중요한 선거 자원이다. 그래서 전관예우 부패의 악취가 하늘을 찔러도 정치인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코를 돌리고 딴짓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는 힘과 정열을 정권 장악이라는 슈퍼갑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증오의 이전투구에 쏟아붓는다. 경제민주화 관련 법을 제정해도 보수 진보 정치세력이 모두 공범인 기존 정치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갑을관계 청산은 요원하다. 법이 없어서 갑이 횡포를 부리는 게 아니다.” 

- 국세청 조사 결과 2007년 룸살롱 등 호화 유흥업소에서 사용된 법인카드 결제액이 1조5904억원이라는 기사를 인용했는데.

접대 산업은 갑을관계 어느 정도인가 알아볼 바로미터다. 룸살롱 와서 자기 돈 내고 마시는 사람 얼마나 되나. 접대 경제 그게 바로 갑을관계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한국인은 접대 문화를 못 견뎌한다. 내가 약자지만, 저쪽이 내걸 사가면 저쪽도 득이 되는데, 내가 종처럼 왜 굴어야 하냐는 것이다. 대체 접대비는 어디서 빠져나가나. 가끔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만들자거나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들을 때면 헛웃음이 난다. 갑을관계가 존재하는 한 그런 일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갑을 사이에 존재하는 접대 문화는 보수와 진보를 초월해 작동한다.”

접대 경제 그게 바로 갑을관계다. 

- 한국 갑을관계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된다고 했는데.

“출세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갑을관계적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갑을관계는 역지사지를 거부한다. 역지사지 대신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이다. 한국은 마치 갑과 을만으로 짜여 있고, 모든 삶의 목표도 갑이 되기 위한 것으로 수렴되는 ‘갑과 을의 나라’ 같다. 갑이 되기 위해 잠시 을 노릇을 하는 정도의 투자는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을도 을로서의 굴종을 갑이 되기 위한 와신상담 전략으로 여길 뿐, 갑을관계의 주종 관행 자체를 없앨 생각을 못한다. 이런 갑을관계는 한국 사람들의 삶의 보람까지 지배한다. 내 자식이 어디서 ‘갑질’을 하는 걸 보고야 ‘내 자식이 출세했네, 파워 있네’ 하는 것이다. 한국인 다수에게 갑을관계는 이익 차원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을 위에 군림하는 맛이라고 하는 인정욕구를 충족하는 삶의 기본 문법인 것이다. 단, 부모들은 이왕이면 조금은 ‘인자한 갑’이 되기를 원한다. 세게 할 수 있지만, 인자하게 갑질을 하길 바라는 것이다. 아주 못된 짓을 할 수 없게 바꿔야 하는데, 그저 좋은 갑이 되길 바라는 수준이다. 갑을관계는 을병관계, 병정관계로 끝없이 순환된다. 그걸 바꾸려고 애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안 당하려고 갑의 위치가 된다는 게 해법이다. 국제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의 하시모토도 억울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야기다.”



갑을관계, 한국 사람들의 삶의 보람까지 지배

- ‘인자한 갑’ 즉 ‘선의의 갑’으로 갑을관계 문제 해결이 어렵나.

“선의의 갑은 선의의 권력이란 말하고도 통한다. 역사학자 액튼 경이 말한 것처럼,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가 필요하다. 내가 말한 ‘선의의 갑’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누구인가는 리더를 해야 한다. 행정도지사가 말단 공무원과 똑같은 대접받을 수는 없다. 중요한 일 하라고 운전기사 딸린 차에 손님 맞으라고 넓은 집무실을 준다. 권력 문제에서 위계와 서열, 갑을 관계는 우리 인간 사회에서 생활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필요악으로 보되, 권력 행사방식이 공정한지, 부패 소지는 없는지, 감시하고 따져야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 갑을 관계를 보면 썩어 문드러져 곪아 터질 정도 되어야 이슈가 되는 거 아니냐. 지역에서 평생을 헌신적으로 또 유능하게 시민운동 한 분이 있다. 이 사람이 시의원 될 수 없다. 공적인 목적에 헌신한 사람들의 발탁 통로가 없는데, 무슨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풀뿌리를 이야기할 수 있나. 다들 갑이 되려고 하는데...정치하는 목적도 갑의 지위 누리면서 이왕이면 좋은 일 해볼까 정도의 수준이다. 본말의 전도다. 유권자들도 기초의원 알아보려고 시간 투자하기 싫다는 것이다. 정당이 표식이니까. 위에서 아무리 개혁적 이야기하고 법을 바꾸고 제도 바꾼다고 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밑에서부터 같이 가줘야 한다.”

- 갑을관계의 기원을 조선 시대에서 찾았다. 갑을관계의 원형이 관존민비라고 했는데. 

“관존민비가 하나의 이데올로기 체계로 굳어져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됐다. 그 핵심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우승열패로 대변되는 사회진화론이라고 본다. 묘하다. 관존민비라는 게 언제 이야기인가. 삼성의 막강한 힘을 봐도 그렇고, 여전히 기업 사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업이 우위에 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나. 취업난에다 안정된 직장 들어가고 싶기도 하지만, 갑을 문제가 가장 크다고 본다. 그러니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갑을관계 귀신 같이 안다. 그러니까 중소기업 피하고, 영업직 안 하려는 것이다. 갑을관계 대단히 민감하다. PR은 창의적 활동이지만, 기자와의 인맥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 언론 관계가 PR의 전부는 아니지만, 을을 철저히 수행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개발 독재의 강압성은 벗어났을지 몰라도, 제도적 틀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기업이 없는 지방에선 관의 위대함이 더 부풀려진다. 언론만 해도 지자체 홍보비가 언론을 먹여 살린다. 공무원 대하며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관에 크게 의존하시는 분들에게 관의 행태 들어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갑을관계의 역사는 곧 공직자의 역사이기도 하다.”

- 국민이 중독된 서열주의의 다른 이름이 갑을관계라고도 했다. 

“한국의 큰 문제가 서열 문제인데 서열주의 이대로 안 된다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해법이 다르다. 갑을관계 자체도 서열에 따른 계층화인데, 이 자체를 없앨 순 없다고 본다. 예전 학벌 철폐 운동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제가 주장한 건 서열이란 게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열의 고정화 말고 유동화 즉 경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자고 했다. 실력 평가할 기회 없이 주어진 간판으로 끝장 나버리니까. 그런데 철폐 운동하는 분들이 내 생각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갑을 관계도 마찬가지다. 분노와 증오만으로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공정한 게임 쪽으로 가야 한다. 지금이 좋은 기회다. 실천적인 제안을 해놓고 가야한다.” 

전주/강윤중 기자

- 서열 하면 대학이 떠오르는데. .

“갑질이라는 더러운 꼴을 안 당하려면 인맥이라도 갖춰야 한다. 대학은 인맥 만들기의 보고다. 그래서 치열한 입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폭발할 때가 있다. 요즘 저도 스카이(SKY,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줄여 쓰는 말)란 말 쓰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인서울’이니, ‘지잡대’니 하는 말에 더 열성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비법을 일찌감치 깨달은 탓이다. 이런 말이 멀쩡하게 학교 열심히 잘 다니는 학생들한테 상처 주고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젊은 사람들이 달라지길 바랐는데, 우리 때보다 더하다. 대학 서열화가 더 심해졌다. 진짜 경쟁이라고 하면, 대학 들어갈 때 공부 덜해도 졸업할 때 해보자, 이렇게 해야 정상 아닌가. 이념도, 당파도 아니다. 한번 딱 들어간 걸로 정해진다. 갑을관계보다 더 하다. 힘 빠진다. 나야 글로나 화를 풀지만, 학생들은 이런 체제에 순응하거나 내면화시킬 수밖에 없다. 분통이 치민다. 여러 지자체에서 서울에 학생 보내는 게 인재육성정책이자 지역발전전략이다. 서울에 값싸고 시설 좋은 학숙을 만드는 게 지자체장 공약이다. 도민 모금으로 수백억원을 들인 곳도 있다. 지역민들 아무도 항의 안한다. 다 서울로 유학 보내는 꿈을 꾼다. 도민에 의해 지역발전 전략이 된다. 지역 유능한 인재를 서울에 보내놓고 쭉정이만 여기 남으라는 건데도. 그렇게 다들 각개약진할 뿐이다. 억울하면 서울로 내 새끼 보내면 되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이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갑을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서울’이니, ‘지잡대’니 하는 말,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비법을 일찌감치 깨달은 탓, 젊은 사람들이 우리 때보다 더해

- 또 다른 이유는 없는가. 

“자기 지역 출신 학생이 서울 명문대에 진학해 출세하면 즉 슈퍼갑의 지위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을 차지하면, 그 권력으로 자기 지역에 좀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기업을 유치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다. 조금만 생각하면, ‘지역 황폐화 전략’이다. 전근대적 틀의 가장 큰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게 바로 서울과 지방의 갑을관계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결과적으로 ‘지방 죽이기’를 한 주역이 누구인가. 서울에 사는 지방 출신이다. 서울 1극 구조라는 기존 틀 안에서 열심히 일했을 뿐, 지방 문제는 그들의 재량권 바깥이다. 지방 균형 발전을 못 믿으니까, 서울에 들어가 살면 되고, 내 자식을 서울에 유학시키면 되는 것이다.” 

- 전라도 상황은 어떤가? 전라도는 을인가?

“돈 많고, 권력 많은 전라도 사람들은 슈퍼갑 지위를 누린다. 전라도에도 여러 갑을 관계가 있긴 하다. 다만 지역 문제로 봤을 때, 전라도는 을, 병, 정이다. 최근 5.18 왜곡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진보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을 겪다보니, 표현의 자유 신성시하는 트라우마가 있다. 일베 같은 하위문화를 내버려두는 게 좋다는 말에 담긴 선의는 이해한다. 그러나 전라도 문제는 다르다. 유럽 쪽엔 인종이나 어린이 문제 나오면 그대로 구속이다. 영국 대학생이 콩코 선수가 심장마비로 쓰러지자 ‘유색인들아 목화 좀 따오라’ 같은 말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즉각 체포에 징역 2월이 나왔다. 무슨 표현의 자유인가. 서구에서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조차도 안 된다고 하는 몇 가지 이슈가 있다. 구분해서 봐야 한다. 이념과 정치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자. 하지만 지역 문제는 유럽으로 치면 인종 문제다. 어떻게 보면 더 악랄하다. 다문화 진입하는데 특정 인종 비하, 모독, 증오 선동을 막는 ‘증오의 선동 금지법’ 같은 게 필요하다. 전라도를 포함해서 리틀 싸이 황민우군한테 가한 인종차별도 혼을 내야 한다. 최근 5.18도 거대 담론, 연역적 담론에 가려져 있는데, 본질은 전라도라는 지역문제다.”

이념과 정치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되, 인종·지역 비하나 모독은 엄벌해야

- 말 꺼낸 김에 일베 문제는 어떻게 보나.

“멀쩡한 사람들도 취해서 음담패설을 하면, 극단까지 간다. 평상시에는 그렇지 않다. 저절로 동력이 생긴다. 특정 그룹 비하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악질이고, 사악하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착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문란해서 그런 게 아니다. 악플 다는 사람들 잡아보면 소심한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게임의 논리에 휘말리면, 자기와 무관하게 그 놀이의 동력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하위문화니까 모른척? 어떻게 그러나. 모른 척 하자는 건 해법이 안된다. 사안별로 나눠서 봐야한다. 특정그룹 증오 선동하는 건, 증오 관련 법만 만들어도 못할 것이라고 본다. 경찰서에 불려갈 수도 있는데, 그걸 감수하고 하겠는가. (일베 폐쇄하자는) 민주당에 부화뇌동 안하는 것도 좋고, 표현의 자유를 비용으로 간주하자는 것도 아름다운 말씀인데, 더 짚어주지는 못했다고 본다. 독재정권에 펜의 자유를 억압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이다. 연예인 악플 문제나 인터넷 실명제 건도 엄격하자는 게 보수고, 자유롭게 하자는 게 진보인데, 이 문제는 진보 보수로 나눠 볼 건 아니다. 표현의 자유 존중하는 분들에게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포인트는 왜 그리 가느냐가 아쉽다.

- 일베 거리로 나설까.

“기존의 콘텐트 중심으로 보면, 거리로 나설 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보면, 우선 돈벌이가 아니냐. 진짜 문제는 거기 어떤 기업들이 광고 주고, 정부 부처 광고까지 들어 있다고 들었다. 18억에 팔렸다고 했나? 돈이 되고, 화제가 될수록 세력이 커진다. 그걸 바탕으로 거리로 나갈 수 있는 세력화가 가능해진다. 배설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운동이란 게 물적 조건이 기반이 되야 하니까.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 위험한 거다. 지금의 콘텐트를 갖고 거리로 나오진 않겠지만, 사이트로 돈을 벌고,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다. 전주 시민 상대로 내가 풀뿌리 운동하고 싶다고 치면, 돈 한푼 없이 시작할 때와 10억원 갖고 할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흩어져 있을 사람들도 조직을 만들 수 있다. 간접적으로 세력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이명박 정권 때 보수쪽에서 조직을 만들어서, 재미본 사람들 나오지 않았느냐. 왜 그런 모델모른 척하겠나. 정치적 의도가 있는 사람이 일베 터전 삼아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상업적으로 보면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난 높다고 본다. 10억이 던져진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조직이든 생겨난다. 힘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레이건과 부시 때 엄청난 돈질이 있었다. 역사 쓰시는 분들은 돈질을 가볍게 본다. 예컨대, 보수주의의 봉기 식으로. 그런데 예를 들어서 헤리티지 재단 같은 경우 돈 계속 대주는 쿠어스 등등을 빼고 이야기할 수 있냐는 것이다. 조지 소로스가 깨달은 게 바로 이념싸움이 돈 싸움이구나다.”

- 갑을관계란 말이 노무현 정부 들어 많이 나왔다고 했는데.

“노 정권 시절에 성장시대의 종언에 직면했다. 대기업이나 갑의 위치에 있는 개인, 집단이 이윤 보전을 위해 을을 더 옥죄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은 노 정권의 독특한 권력 운용 방식과 맞물리면서 언론과 더불어 대중의 일상적 언어생활에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걸었던 기대가 컸다. 상당 부분 충족된 것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 편재해 있는 갑을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크게 다른 게 없다. 한국인들의 삶의 문법으로 체화된 갑을 관계라는 기본 메커니즘은 민주화를 지지했던 분들이나 그렇지 않았던 분들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유권자가 보기엔, 정권에 들어간 사람들이 큰 건 바꾸었는지는 몰라도, 신세진 분들한테 법인카드 쓰는 맛을 느꼈을 것이고, 기사 딸린 관용차를 만끽했을 것이다. 미시권력 개념의 차원에서 이전 정권들과 차별성이 없다. 고위 공직을 갑의 지위로 이용하고 만끽하는 기존 풍토가 노 정권 시절에 변화의 양상을 보였다는 기미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미시권력 개념의 차원에서 이전 정권들과 차별성이 없었다. 그런 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졌을까. 대중이 정치과정의 복잡한 거대담론을 소화해서 받아들이려면 미시적인 권력을 중심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대중의 한계일 수 있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왜 큰 걸 몰라주느냐고 할 건 아니다. 과거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소멸된 거라고 봐야 한다. 진보 대 보수 구도가 아니다. 민주 반민주, 진보 보수 관계없이, 권력 갖고 힘 있는 사람 대 그것이 없는 사람의 구도다. 이념 정치적 성향 빠져버린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상적 삶에서의 구도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전주/강윤중 기자

- 거대담론과 미시권력 간 문제를 좀 더 설명한다면.

“노무현 정권에 관한 이야기를 더해보자. 어떻게 평가하건, 노무현의 집권 기간은 대통령이 약자, 아웃사이더, 저항자 행세를 하면서 권력 개념에 큰 혼란이 발생한 시기였다. 그간 비교적 선명했던 권력의 경계가 희미해지거나 지워지거나 뒤죽박죽이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거대담론으로서의 권력 개념보다 일상적인 삶에서 미시 권력 개념을 부각시킨 간접적 계기가 됐다. ‘권력은 여러 형태의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조직뿐만 아니라, 온갖 해위 유형들, 사유습관들, 지식의 체계들 속에서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무형의 유동적 흐름’이라는 미셀 푸코의 권력 개념이 한국에서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보적 지식인들이 역사를 쓴 걸 보면, 미시사에 대한 반감이 있다. 엄청난 불공정, 비리, 계급 격차가 벌어지는데, 한가롭게 미시사를 하냐는 말을 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투쟁의 동력은 거기서 안 나온다. 1987년 6월항쟁,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때까지는 거대담론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방식으론 안 된다.”

고위 공직을 갑의 지위로 이용하고 만끽하는 기존 풍토, 노무현 정권 때도 변화 없어

- 연역적 개혁 방식과 귀납적 개혁 방식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해결 방안으로 제시했는데.

“개혁의 대명제를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각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이 연역적 개혁이다. 대중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아래에서 위로 개혁 명제를 세워나가는 방식이 귀납적 개혁이다. 갑을관계라는 의제는 전형적인 귀납적 개혁 방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자유주의 타도와 재벌개혁을 외쳐대면, 진보파로 분류된다. 보수 언론이 비판할 가능성도 높다. 갑을관계의 횡포라는 미시 권력을 고발하면, 전 사회 진영에서 지지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갑을관계라는 말은 공정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소작제와 다를 바 없는 갑을관계를 고발하면 다수가 동의하고, 해결도 가능하다. 그런데 ‘경제민주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남용 규제’ 같은 포괄적, 추상적 개념을 먼저 들고 나가면 반대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경제민주화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더라도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소작제와 다를 바 없는 갑을관계의 개혁엔 긍정적이거나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

한국의 계급이나 빈부격차 문제도 갑을관계 의제에 포괄할 수 있나.

“제가 갑을 문제에 대해 한 이야기는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분들이 계급으로 다 했던 이야기다. 갑을엔 계급이 포괄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갑을로 접근하면 절호의 기회다. 누가 거부하겠는가. 식자층에서 (계급 같은) 추상화된 담론으로 이야기하면, 진보보수 논쟁이 되어버린다. 서양 개념으로 자꾸 이야기하면,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사안도 이념 논쟁으로 비화된다. 거대 담론으로 접근하지 말고, 밑에서 현장에서 출발해 보자는 뜻이다. ” 

- 연역적 개혁 방식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뭔가.

“예를 들어, 노무현 정권은 연역적 개혁의 최악을 보여줬다. 노무현 정권이 유혹에 빠진 게, 국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 각론에서 출발했더라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총론에서 거창하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필요 이상 반발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정권 입장에선 개혁 시도를 널리 알려야 지지자들을 규합할 수 있고,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으며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연역적 개혁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거시권력을 까부수고, 숙청하고, 바로잡아야 당장 치적이 나타난다. 그래서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개혁마저 곧잘 이념 투쟁이나 정치 투쟁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 거대담론이나 연역적 개혁 방식은 폐기해야 하나.

“임지현 한양대 교수님은 미시권력, 일상 연구의 선구자다. 조선일보 반대 운동하면서 결례를 했다. 임 교수님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억울한 것도 있는데, ‘대중독재론’은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일상적 파시즘만 밀고 나가면, 진보진영을 떠나게 만들면서 결국 그것이 보수담론화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큰 거대 진보담론은 붙들어 매면서 방법론적으로 결합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뜻이다.”

- 구체적인 대안은 뭔가. 

“연역적으로 큰 것을 꺼내선 안 된다. 유권자 입장에서 진보정권 10년 해봤는데도 별 것이 없더라, 이놈저놈 같더라는 인식이 만연돼 있는데, 그저 해오던 관성에 따라 큰 담론으로 하면 안 믿는다. 서비스 경쟁에 들어가야 한다. 민생현장에서 바꾸어야 할 주제를 찾아서 그게 누적돼 올라가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큰 담론을 작은 것으로 소화해서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게 위에서 내려온다. 지방자치도 한두 곳의 작은 혁신을 전국에 가져가는 것을 기대했던 건데, 대체로 없다. 여전히 위에서 내려온다. 그런 점에서 박원순 시장에게도 실망이다. 지방 살리기를 외쳤던 분이 서울에서 역량 발휘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야당이 겪는 문제도 동일하다. 야당 비판하는 분들 논지는 맞는 것 같지만, 잘못 짚은 게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달라진 세상인데, 이 분들 몸에 밴 게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정치개혁도 유권자부터, 풀뿌리에서 해야 하는데, 안 한다. 유권자도 길들어져 있다. 모든 것을 정권으로만 본다. 이래선 중앙 정치개혁이 안 된다.

하방 해야 하고, 풀뿌리부터 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미시권력의 개혁 즉 귀납적 개혁으로 가면, 자기 정권 동안 실적이 안 나타난다. 시민 사회 운동 하는 분들도 정말 어렵겠구나, 많은 필요성 이해하면서도 말은 하는데 어떻게 구체적인 액션 가져가고, 프로그램화 하고, 오래 걸리고 생색 빛도 안 나고, 그 지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딜레마 같단 생각이 든다.”

지방 살리기 외치다 서울 시장으로 점프한 박원순 시장에게 실망

- 지방의 풀뿌리 상황에 대해 아쉬운 게 많은 것 같다. 

“박원순 시장이 일반 시민운동에 도움될 만 한 말씀 해줘야 하는데, 반대로 이야기했다. 지방에서는 시민운동해서 정치로 가야한다고 본다. 중앙은 아니다. 중앙에서 하더라도 밑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데, 국회의원이나 광역자치단체장 같은 높은 자리만 넘본다. 박 시장은 시민운동가들이 내내 정치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악영향을 줘놓고는, 자기는 서울시장으로 점프했다. 시민운동가가 정치로 가면 배신처럼 이야기하던 분들이 우두머리가 점프하니까 정치적으로 훈훈하다고 예찬했다. 일치 되게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두고 참여연대 창립멤버인 조희연 교수와도 논쟁했다. 그리고 지금 20년 시민운동 한 사람이 있는데, 전주시 들어가서 바람 일으킬 수가 없다. 시 의원 되는 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정당 공천 나은 점 안 좋은 점도 있지만, 여기 연고가 워낙 강해 할 수가 없다. 박원순이란 사람이 그 이름값으로 전국 다니면서 시민운동가여 다 반란 일으키자, 의회진출해서 바꿔보자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박 시장이 그런 일 하길 원했다. 그러면 위대해진다고 봤다. ‘지자체 한번 바꾸어보겠습니다. 대거 출마하니, 관심 가져주시라’고 하면 먹힌다고 봤다. 박원순 시장한테 원한 게 그런 거였는데, 국정원 사건이 터져 자신에게 일이 생기니까 그때서야 자기 위주로 자세를 확 바꾼 거 아니냐. 결국 대권 노름 아니고 무엇인가. 진보적 지식인들은 보수파에 대한 증오에 눈이 멀어 ‘우리편이 서울시장 먹었다’는 점에만 감격하고 찬사를 보내니 기가 막혔다. 어떻게 화가 치밀든지...”

- 증오의 종식 이야기해놓고, 분노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다혈질이다. 그게 어디 가겠나.(웃음) 바로 이런 거다. 문제의식 있는 놈은 힘이 없다. 힘이 있는 놈은 문제 의식 없고. 주변 보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게 권력이다. 권력을 무조건 나쁘게 보는 건 아니다. 정치가 현실이라면,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 피와 땀 흘려야 한다. 정치인들 힘들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가 설명하길, 재벌회장 비서들, 청와대 비서들 중에는 나가떨어지는 사람 많은데, 어떤 대통령, 재벌이 나가 떨어지더냐고. 바로 갑의 통제력 때문이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고. 국회의원들이 다음에 또하려고 에너지를 총합시키는데, 그게 정치 바꾸는 파지티브한 쪽으로 좋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일이다.”

민주당은 최근 ‘을 지키기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여야 포함해 정치권의 갑을관계 접근은 어떻게 보나.

“정치는 사실 대중문화와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제 책도 타이밍 딱 봐서 갑을관계 제목 붙인 거 아니겠느냐. 정치적 자원 즉 이슈가 떠올랐는데 갑을관계 이야기하는 거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얄팍하다고 이야기할 건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갑을관계 문제를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처럼 사이클 빨리 돌아가는 나라에서 새로운 아젠다가 나오면, 유야무야 된다. 시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도하는 동시에 자기들 안의 갑을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바꿔야 한다. 정치평론가 박성민씨 말 중에 와닿는 게 있다. 정당이 교회 모델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가면 온갖 서비스 다해준다. 결혼식, 장례식에 변호사 서비스까지 해준다. 정당은 엄청난 인적 자원 뒀다 어디 쓰냐 이거다.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 실현 가능한 의제로 올려서 바꿔 보든가 사람들을 끌어들어야 한다. 그걸 안한다. 자기들 발밑은 못 보는 것이다. 전분야에서 같이 가야 한다. 거시와 미시 같이 가되, 실천적 액션은 미시에서 나와야 한다. 을의 지위로 압박 핍박받는 사람들 이야기할 데 어디 있나. 정당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채널이 되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양유업 건도 음성 파일로 이슈가 되기 전에 언론 가서 이야기하면 써주나.

정치 불신과 혐오도 이런 데서 생긴다. 가려운 데 못 긁어주니까. 결국은 커뮤니티와 지역성 완전히 차단한 그들만의 정치로 가버렸기 때문에 갑을관계 문제가 빚어진다고 본다. 절박한 이야기 올라갈 채널이 없다는 거다. 정당 당원이라는 분들 열심히 하는 분들이지만, 생활 밀착형이라기보다, 정치의 당파성에 함몰된 분들이다. 그러니까 따로 노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 열린우리당 때 기간당원제 같은 경우 국민들의 삶의 방식으로 봤을 때, 들어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유시민씨가 갑자기 철학자 흉내낼 게 아니라, 그 문제를 써줘야 한다. 이러저러 한 이유 때문에 어렵더라, 안 되더라, 기간당원제라는 고귀한 뜻 품었다가 실패로 돌아온, 자신이 온몸으로 겪었던 현장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그런 게 갑을관계 제대로 시정하는 정치권 내부의 첫 단추다.“

정당들, 을의 지위로 압박 핍박받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주는 채널이 되어줘야

- 그 말 하니, 열린우리당 분당 때 분당세력을 비판해 욕을 많이 먹고, 팬들도 많이 떨어져 나간 게 떠오른다.

“‘저 새끼 나쁜 새끼’ 이런 욕을 많이 들었다.(웃음) 한 학생이 술에 취해 내게 욕을 한 적도 있다. 원한에 사무친 사람이 많았다. ‘치어 리더론’이 떠오르더라. 자조적으로 보면, 내가 치어리더 한 것이다. 당신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 듣고 싶은 이야기를 긁어다가 내 주장 보태서 쓰니까 좋다고 그랬던 것 같다.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치어리더 역할 그만두고 조금 더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주장을 했더니, 증오의 대상이 됐다. ‘한때 지지했는데, 니 책 찢어버렸다’는 그런 편지 많이 받았다. 그런 거 겪으면서 내가 해왔던 게 적의감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민주당 분당 때 2002 대선 때 나온 호남 몰표를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민주당 분당 문제 이야기를 하면, 노무현 정부 출범 1~2년차 때 분당 문제가 불거졌는데, 나중에 문제 제기하고 손 놓아버렸다. 얼른 생각해보면, 전라도 차별에 대해 전라도 사람들이 분노할 것 같지만, 전라도 사람들이 뜻밖에 잘 모른다.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저 권력 놓치면 안된다는 절박감 뿐이었다고나 할까. 저는 말을 바꿔서 실용주의라고 했는데,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민주당 분당 때 2002 대선 때 나온 호남 몰표를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몰표 통해 노무현이 당선됐는데, 그리고 전라도가 한국의 민주화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데...호남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대해 보여줬던 몰표를 모독하는 발언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라 중요한 의미라고 봤는데. 당신들이 흔쾌히 수용하고 예찬하더라. 손 놨다. 요즘 5.18 문제도 호남인들 스스로가 그 전에 나섰어야 했다. 최근의 대응은 과잉대응 측면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지역 문제 말하기가 껄끄럽게 됐다. 지역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하고 있다. 앞으로도 본격적으로 다루고 말 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호남도 이제 다원화되어 간다. 나와 정치적 성향 다른 사람 존중해줘야 한다는 게 조금 생겼다. 안철수 지지자와 친노 지지자들이 다르고, 사이가 안 좋을 수도 있으니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크게 보면, 좋은 변화다. 그러니까 딱 해서 몰고 갈 수 있는 건 끝났다. 아무리 욕을 해도, 민주당도 다원화됐다. 누구를 향한 말인가 하는 거다. 누구는 친노를, 누구는 비주류를 욕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민주당을 욕해도 포인트를 잡아서 욕해야 한다. 싸잡아 욕하면, 저 새끼들 두고 한 걸 거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대오각성 하라고 해도 뭘 하라는 건지도 모를테고.”

호남도 이제 다원화...정치적 성향 다른 사람 존중해줘야 한다는 의식 조금 생겨나

- 한국민주주의 원동력이 심정이 폭발한 시위라고 했다. 또 ‘을의 반란’ ‘증오의 종언’이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해 들고일어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도,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체념의 지혜를 터득해 기존질서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지금은 이걸 바꿀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다. 그런데 오버해서 역사적 기회를 망가뜨릴까봐 걱정이다. 증오는 1차 연료로 써야 한다. 증오의 폭발로 밀고 나가면, 막말로 손님이 떨어진다. 영악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평등주의 문제도 그렇다. 진보적인 열성적 네티즌들한테, 보수라고 욕먹는데, 이들은 엘리트주의 자체를 부정한다. 그 심정은 나도 동의한다. 엘리트 없는 세상, 다같이 평등한 세상 만들자는 심정은 동의한다. 그러나 몇박 몇일 캠핑 가더라도 리더는 있어야 한다. 혼자 살지 않는 한, 누군가는 리더가 되고, 조직의 장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 엘리트가 사리사욕 하고 오염 됐다고 인정하지만, 능력이나 비전을 모두 부정할 수 있나. 그걸 의외로 안 받아들인다. 학벌철폐운동도 잘 나가다가 서울대 없애기로 나갔는데, 난 반대했다. ‘<서울대의 나라>란 책 쓰고, 욕해놓고는 저새끼 뭐야’라고 욕을 한다. 서울대 욕하면, 서울대 없애자는 건가. 그렇게 가면, 좋았던 기회를 망친다는 이야기다. 증오는 연료로 쓰고, ‘을의 반란’을 상시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정치 자체가 바뀌면 된다. 정치가 그 채널을 하면 된다. 을의 반란이 정치개혁을 만나서 수렴 되어야 한다. 승자독식을 전제로 한 선거와 그 기반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갑이 되기 위한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개혁을 내버려두고 을의 반란만 갖고는 지속이 안 된다. 을의 반란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갑을관계를 청산해야 정치가 개혁될 수 있는데도, 정치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을 갑을관계의 지속을 전제로 ‘나(우리)를 뽑아줘야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외쳐대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 증오의 종언 하니까, 예전 소통이나 중간 또는 회색지대를 강조했던 것도 떠오른다.

“중간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크게 성장할 수 없다. 세력화할 수도 없다. 이들의 목표는 집권이 아니라 나눠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인드를 갖고 진영에 들어가면, 곧 진영논리의 포로가 된다. 기존 문법 체계가 어느 한쪽 줄 세워 가담하게 한 뒤 싸워야 하니까.아무리 선한 정권이 들어서도, 승자 독식주의가 그대로 있고서는, 우리가 바랐던 합리적 경쟁과 서로 주고받는 소통이 안된다. 노무현 정권 말기 때 방송 중립화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학계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방송 민주화를 외치더니, 정부 들어서고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닫았다. 노무현 정부 때도 가만 있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니까 방송 공정성 이야기한다. 입맛에 맞는 정권 내버려두고, 마음에 안 드는 정권에 지적하는 식으로 누구를 설득하겠느냐. 노무현 정부 때 기회가 좋았다. 방송의회라는 걸 만들어서 방송사 사장들을 투표로 뽑자. 방송의회는 수천명으로 구성하지만 무보수, 명예직이라 돈 안 든다. 시민사회 역량 되니까 그렇게 해보자는 주장을 했다. 그랬다면, 지루한 파업 사태 일어났겠나. 신방과 교수들도 정외과 교수들 못지않게, 어떻게 보면, 더 당파적으로 나눠져 있다. 김대중, 노무현 때 세미나 참석한 사람 이명박, 박근혜 때 뽑으면 친여, 친야 확연히 대별된다. 내가 의미 있는 일 하고 싶어도 내가 지지하는 정권이 안 들어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미나조차도 영향 받았다. 이런 과잉정치화도 어디서생기냐. 밥그릇 독식하니까 생기는 문제다.” 

- 남양유업 사태에선 ‘심정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용산, 두리반, 쌍용차 문제에서 폭발의 정도는 약한 것 같은데. 

“남양유업 건은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 업종에 종사 안 해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으니까. (언급한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개발주의, 신자유주의, 토건주의 같은 말은) 피부에 바로 와닿지가 않는 문제와도 이어진다. 빈부격차란 말도 와닿지가 않는다. 그것도 갑을관계인데, 진보 진영에서 빈부격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나. 와 닿게 해줘야 한다. 지식인들은 100만부 나가는 베스트셀러 보면서 별 내용도 없는데 하면서 짜증을 낸다. 그러나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마케팅 힘이 크다고 해도, 보통 사람한테 다가가는 프리젠테이션의 방법론이 뛰어난 걸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갑을관계도 미시적이고 작은 게 더 중요하다. 디테일에 악마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말로는 거대담론의 종언이라 하면서, 그것을 놔 버리면 변절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거대한 것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니냐.”

을들의 성찰도 정치와 개혁이 만나 제도화로 이어져야

- 을들의 성찰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남들을 향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긴 쉽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 개인 혼자 성찰한들 무슨 소용 있나. 성찰이라는 문제도 정치가 수렴하지 않으면 성찰 자체가 의미가 없다. 갑을관계에서 갑질하는 사람이나, 을로 당하는 사람이, 그러 이치나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겠는가. 무지 무식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이 그런 거다. 38선을 나 혼자 막나, 나 혼자 벽에 부딪치면 되나. 그 문제 해결하라고 정치가 있는 건데, 전부는 아니지만, 정치인들 중에 갑질하는 재미에 중독 된 사람들이 많다. 을들의 성찰도 정치와 개혁이 만나 제도화로 이어져야 한다. 개인의 문제의식을 상례화, 제도화시켜야 한다. 부당하고 억울해 이거 아니다 싶은 문제는 누구한테 이야기하나. 우리한테 채널이 없는 것 아닌가. 아주 엽기적인 거야 찍거나 녹음하면 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횡포를 어디에 이야기하나. 친구한테 그런 이야기하면 ‘세상 아직 모르냐’는 식이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한테 세상이 무섭고 살벌하다고 가르치지 않나. 후배들, 자식 교육도 그리 가고 있는데, 결국 정치의 문제다. 개혁 개혁 하는데, 제대로 포인트 잡은 건 아니다. 서울에서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 바꾸자고 할 때, 악질적인 유형의 것을 없앨 수 있을 때, 성에 차지 않더라도, 욕심 과하게 부리지 말고 제도화로 정착시키는 게 모범답안이다.”

- 미디어가 ‘심정의 폭발’을 일으키는 중요한 매개가 됐는데.

“뉴미디어가 딱 맞물렸다. 만개한 인터넷 고발, 비판 문화 덕을 봤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 이름 없는 을의 고발과 하소연에 누가 귀 기울였나. 인터넷과 SNS가 빽 없고 줄 없는 을들의 작은 반란에 만인이 주시하는 광장을 제공했다. 밀실에서 한과 넋두리로 존재했던 기막힌 사연들이 쏟아져나왔다. 비밀녹음, 촬영 같은 것도 기기 발달로 쉬워졌다. 푸코가 말한 ‘원형감옥의 반대의 역감시’가, 감시체제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진보적인 기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 갑을 때문에 만나러 왔지만, 안철수에 관해 안 물을 수가 없다. 안철수도 갑 아닌가.

“STX 회장인가가 어디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가 을이라고 했다. 재벌 회장 중에도 을이 있다. 아웃사이더가 상대적 개념으로 범주화된 안에서 그렇다. 안철수는 갑의 코스만 걸어온 사람이다. 역사를 보면 시오도어 루스벨트처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뭐가 아쉽겠나. 그런데도 대기업 트러스트 깨고, 보통사람 챙기고 했다. 역사를 보면, 전혀 아닌 사람이 나서서 끌어가는 경우들이 있다.선거 때, ‘내가 서민출신이고 가난에 굶주렸다’ 그러면, 이제 국민들 알지 않나. 한두번 속았나. 당했던 놈이 더 무섭다는 걸 안다. 괴롭힘 당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더 독해지는...안철수는 평생 갑으로만 살아왔던 사람인데, 현장의 피와 살이 붙어야 한다. 강남좌파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자산이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나서줘서) 얼마나 고맙냐. 하지만 강남좌파들이 인정 욕구만 채우고, 동떨어진 것으로 가면 재앙일 수 있다. 미국 민주당을 우리 표현으로 ‘강남좌파’들 장악하다보니까, 현실과 동떨어져버렸다. 부자들만 의원이 되는 거고.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은 아니다. 강남좌파에 대해 긍정성 인정하면서도, 경계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거다. 한국 민주당도 아젠다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면, 절박함이 떨어지니까 현장감각이 겉돌 수가 있다.”

- 잘할 것이라고 보나.

“정치는 경험인데 쉽게 되겠나. <안철수의 힘>을 쓰게 된 것은 정치개혁이라는 아젠다 자체를 들고 나온 게 반가워서였다. 야당도 그렇고, 거슬러 올라가서, 이쪽이건 저쪽이건, 정치 자체를 문제 삼으며 이건 아니라고 한 사람들이 누가 있었냐는 거다. 저쪽은 악의 세력이니까, 어떻게든 정권 잡아야 한다, 이것만 두고 충돌한 거지. 이런 정치 갖고 못간다라고 아무도 이야기 안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한테 지지 받는 사람(안철수)이 그 이야기했을 때, 저런 기회가 자주 오겠는가 생각했다. 정치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대선 때만 해도, 진보적인 분들은 한나라, 새누리 욕만 하면 됐다. MB라고도 안한다, 쥐새끼라니 하면서 펜의 자유가 너무 보장됐다. 내가 새누리 지지자 일수도 있는데, 말을 함부로 한다. 교수들도 그렇다. 언론 때문에 졌다고 한다. 이런 게 아닌데, 정치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안철수에게 공감했다.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결국 잘 할 거라고 본다.

전주/강윤중 기자

-또 책을 쓸 생각인가.

“이제 정치에 대한 글을 직접 쓰는 건 피하려고 한다.”

증오의 종언 위해 <안철수의 힘>썼는데, 증오의 대상, 당파 싸움의 새로운 적이 되어버려



- <안철수의 힘> 후속편은 안 낸다는 말인가.

“<안철수의 힘>을 내고 느낀 게 있다. 안철수가 바랐던 거나 제가 지지하고, 꿈꿨던 것이 기존 이전투구판의 자장에 빨려들었다. 증오의 종언을 외쳤는데,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당파 싸움의 새로운 적이 된 것이다. 나는 증오로 싸우지 말자고 했는데, 그게 안 받아들여지는 게 느껴지더라. 이젠 더 이상 증오로 싸울 때가 아닌데 말이다. 앞으로 글쓰기 방식은 간접적으로, 넛지 방식으로, 우회적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학교에 계속 있을 것인가. 강연이나 방송 같은 다른 계획은.

“안 쫓아내면.(웃음) 나갈 수도 없다. 7, 8년 남아 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인물과 사상’ 내겠다는 생각에도 변함 없다. 지식인들 특성인데, 꽂히면 극단으로 가더라. 이제 와서 보니까, 그때는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저도 알아봐달라고 과잉으로 흘러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TV에 얼굴 안 내밀고, 강연도 안하는 건 게으르기 때문이다. 잘 안 맞다. 글 쓸 때 즐거운데...내가 강연 하면서 들었다 놨다 하면, 그쪽에 빠졌을 것이다.(웃음) 이타적인 분들께 경외감 갖지만, 내 신조가 즐겁게 살기다.”



‘내 갑을’은 괜찮고, ‘너 갑을’은 문제라는 방식으로 가면 갑을관계 안 바뀌어



- 대략 마무리해야 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다면. 


“분노하지 말라고 해놓고, 막 혈압을 높여서 멋쩍은데...(웃음) 경향 독자들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지난 대선을 볼 때, 저 사람들 때문에 졌다는 생각을 하면, 또 평가가 그렇게 되면, 갈길이 뻔해져 버린다. 그걸로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많은 유권자들이 야당 지지자들이 보는 것처럼 세상을 안 본다. 이쪽이 정의이자 선이고, 저쪽이 불의고, 악이라고 안보는 판에 언제까지 그 거대담론으로 갈 생각을 하느냐 이거다.

민주당도 새누리당과의 관계에서 보여줄 생각 말고, 보여주면 좋겠지만, 거기다 힘 쏟지 말고, 바닥으로 내려와야 한다. 야권은 호남이다. 탈호남 하겠다고 외치는 걸로는 유권자들이 안 속는다. 호남의 내부 정치가 선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정면돌파다. 우리 탈호남 정당이다, 전라도 정당 아니라고 하면 호남에서든 그 밖의 지역에서든 비웃는다. 선진적인 전라도 정치로 정면돌파해야 한다. 광주가 민주화 성지인데, 최장집 교수가 말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성지이고 앞서가느냐는 것이다. 가혹한 주문일 수 있지만, 5월정신을 이어받는다면, 광주 내부의 지역정치에서 가장 앞서가야 하는 모습을 왜 못 보여주나. 시민들이 조금만 신경 써주면 되는 것인데. 광주의 오피니언 리더도 새누리당 정권에 대한 분노를 조금 돌려서 광주 지역의 선진적인 정치를 해보이면, 그게 바로 야권의 정치 힘이 된다. 정권이 개판 친다고 표가 오지 않는다. 지금 여전히 증오의 담론이 지배적인 게 아닌가. 그걸 종식시켜야 갑을문제가 해결된다. 그건 두고서 내 갑을은 괜찮고, 너 갑을은 문제다 그 방식으로 가면 뭐가 바뀌겠는가, 안 바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