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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거친 원조 월드스타, 박찬호의 길은 한국야구의 역사

youngsports 2012. 11. 30. 15:04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최종 선택은 결국 은퇴였다. 올 시즌 종료 이후 '현역 연장'과 '은퇴'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박찬호는 결국 지난 29일 오후 은퇴 의사를 구단에 최종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잔류를 권유했던 구단도 박찬호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1994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LA 다저스를 통해 프로에 데뷔한 이래 일본과 한국을 두루 거치며 야구 '한류'를 이끌었던 한국야구 최초의 월드스타 박찬호는 19년 만에 장대한 여정을 마치고 전설로 남게 됐다.

IMF 시대, 희망을 쏘아올린 '찬호 박'의 투구

 2006년 3월 13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에서 박찬호가 9회초 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후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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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야구 인생은 그 자체로 한국야구 세계화의 살아있는 역사다. 박찬호가 걸어온 길은 한국야구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딛는 개척의 여정이기도 했다.

박찬호는 21세였던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야구가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프로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국내무대에서도 동기생들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풋내기 투수'가 입단과 동시에 마이너리그도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박찬호는 1996년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자리 잡았다. 1997년부터 다저스의 5선발 경쟁에서 승리하며 당당히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다저스에서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은 박찬호의 전성기라고 평가된다. 이 기간 박찬호는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총 75승을 거뒀다. 해마다 평균 15승을 챙긴 것. 박찬호 생애 최고의 시즌으로 기억되는 2000년에는 18승(10패) 자책점 3.27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탈삼진 2위에 해당하는 217개를 기록하며 사이영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1년에는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선정돼 별들의 축제인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박찬호는 명실상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정상급 투수로 성장했다.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절, 한국은 IMF 대란으로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국민들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그때 '공주 촌놈' 박찬호가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거구의 강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위안과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박찬호의 선발등판 경기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5일마다 국민들은 새벽잠을 줄여가며 박찬호의 활약을 기다렸다. 박찬호의 등장 이후 한국야구의 위상은 높아졌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한국 유망주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후 김병현·서재응·최희섭 등 코리안 메이저리그 1세대의 약진이 본격화됐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역사를 새로 쓴 박찬호

 한화 이글스 박찬호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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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2002시즌을 앞두고 FA가 돼 텍사스 레인저스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FA 투수 최대어로 꼽혔던 박찬호에게는 5년간 6500만 달러에 이르는 초대박 계약이 성사됐다. 바야흐로 박찬호의 '아메리칸 드림'이 정점에 도달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그때부터 고난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적 첫해 9승 8패 평균자책점 5.75로 6년 연속 10승 달성에 실패한 박찬호는 이후 2년 동안 고질적인 허리 부상과 슬럼프가 겹쳐 23경기 출장 5승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박찬호의 텍사스 통산 성적은 22승 23패 평균자책점 5.79. 박찬호의 가치와 위상은 수직 추락했고 곳곳에서는 '먹튀'라는 비난이 나왔다.

2005년 시즌 중반, 박찬호는 샌디에이고로 이적하며 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12승)을 거두며 잠시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2007년 뉴욕 메츠에서 1경기만 나서 4이닝 7실점으로 무너지며 마이너리그로 추락했다. 모두가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무너지지 않았다. 2008년 친정팀 LA 다저스로 깜짝 복귀한 박찬호는 이제는 선발이 아닌 중간 계투로 재기했다. 더 이상 전성기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앞세워 기교파 투수로 거듭난 박찬호는 다저스의 필승 셋업맨으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이듬해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해 생애 첫 월드시리즈 진출을 경험하기도 했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0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으나 성적부진으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2010년 10월 1일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 말린스)전에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정표를 수립했다.

3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따낸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을 기록하며 노모 히데오(일본)가 세운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경신했다. 이날 경기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마지막 등판이기도 했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17년 통산 성적은 476경기 출장 1993이닝 124승 98패 평균자책점 4.36이었다.

박찬호는 선수생활 말년에 다시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2011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에 입단해 일본야구에 깜짝 진출했으나 부상과 슬럼프로 7경기 등판 1승 5패 자책점 4.29에 그쳤다. 그리고 2012시즌에는 KBO의 배려로 고향팀 한화 이글스의 특별지명선수가 돼 마침내 고대하던 한국야구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됐다.

박찬호가 마지막 시즌이던 올해 그가 한화에서 남긴 성적은 23경기 등판 5승 10패 평균자책점 5.06. 표면적인 성적만 놓고 보면 전성기의 이름값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전반기까지는 4승 5패 3.77로 호투했다. 꼴찌팀 한화의 허약한 전력 속에서도 꿋꿋이 로테이션을 지키며 선발진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 데다 경기 외적으로는 후배들의 정신적·기술적 '멘토' 역할까지 해냈다.

또한, 박찬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 리그 흥행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박찬호는 한·미·일 야구를 두루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한 고언도 아끼지 않았다. 박찬호의 일거수일투족이 높은 영향력과 함께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찬호는 한·미·일 프로무대를 모두 합쳐 19년 동안 총 9팀의 유니폼을 입었고, 통산 2156이닝을 던져 130승 113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40을 기록했다.

박찬호가 남긴 진정한 교훈은 무엇인가

 LA 다저스 소속 시절의 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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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야구인생이 언제나 화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굴욕적인 순간도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때도 있었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인 1999년 한 이닝에 만루 홈런을 같은 타자(페르난도 타티스)에게 두 번이나 허용하는 소위 '한만두' 기록을 제조했다. 메이저리그 123년 역사상 최초이자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으로 남아있다. 2001년 배리 본즈가 마크 맥과이어(70개)의 메이저리그 시즌 최다 홈런 기록(73개)을 경신할 때 제물이 됐던 투수도 박찬호였다. 박찬호가 전성기를 지나 텍사스와 뉴욕 메츠 시절 부진한 성적으로 마이너리그를 전전할 때는 '나라망신 그만시키고 은퇴하라'는 식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끝까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박찬호의 야구인생이 진정 귀감이 되는 대목도 여기에 있다. 어떤 스타도 전성기에서 내려와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과거에 연연하거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좌절의 크기가 커진다.

박찬호는 누구보다도 야구인생의 굴곡이 심했던 선수 중 하나다. 그러나 박찬호는 결코 어려운 고비를 회피한 적이 없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자신이 묵묵히 짊어졌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를 넘어 오직 '야구'그 자체였고, 야구를 할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항상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선수들은 박찬호를 롤모델로 삼으며 성장했다. 그들이 박찬호에게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박찬호의 화려한 전성기나 성공의 결과만이 아니라 박찬호가 야구인생 내내 자신을 둘러싼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며 지켜왔던 순수한 열정 그 자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