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타계]독재와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얘기한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고 궤적이었다. 5년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 26번의 체포, 7번의 구류, 사선을 넘나들었던 고문…. 독재가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희망을 얘기했다. 고문이 할퀴고 간 몸으로 한발 한발 디뎌온 64년의 일생은 인권-양성평등-평화를 주창하던 한 민주주의자의 기록이었다.
■ 강제징집된 12남매의 막내
김근태는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2남매의 막내였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친은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강제로 그만두게 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운동 역정이 시작됐다. 1967년 상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뽑힌 김근태는 8월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이끌고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김근태의 친형인 소설가 김국태(2007년 사망)는 1970년 발표한 단편 <물 머금은 벌>에서 데모 주동자로 강제징집된 아우를 형이 훈련소로 전송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우’는 ‘형’에게 “비록 내가 이처럼 부당하게 끌려가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에 후회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여섯 명의 형·누나는 어릴 때 숨지고 그 다음 세 형은 6·25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12남매 중 10번째인 형 김국태가 사실상 집안의 맏이 노릇을 했다.
■ 수배생활의 벗이 된 인재근
김근태는 1970년 제대하고 복학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이들의 공소장에 표현한 ‘공소 외 김근태’는 그의 별명이 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이 막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다.
피신 상태에서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형윤 상대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는 도피 중이던 1977년 8월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 중이던 이화여대 출신 인재근을 만나 결혼했다. 1977월 5월 김근태가 6세 연하인 인재근에게 서울 광나루의 선상 매운탕집에서 “나랑 결혼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다.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좋았다”고 했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냈다. 말을 배우고 가장 많이 한 말이 “양심수 석방”이라고 하는 그는 김근태의 ‘민주화 동지’였다.
■ 고문과 투옥으로 메워진 30~40대
공안당국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1987년 대통령선거를 경주교도소에서 맞이했다. 선거 당일 자정이 넘자 그는 교도관에게 결과를 물었다.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패배였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갖다 바친 패배’에 절망했다. 그는 여소야대 13대 국회가 출범한 뒤 1988년 6월30일 수감생활 2년10개월 만에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로 석방됐다.
김근태는 1989년 1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87년의 패배 후 흩어진 민주·진보세력을 다시 묶고, 그는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통합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다시 1992년 8월까지 그를 옥살이 시켰다.
■ 시작도 끝도 비주류였던 정치
김근태는 1995년 정치의 문턱을 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까지, 27년간의 3대 독재에 맞섰던 ‘재야 운동가’에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해 9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축으로 한 재야 인사들을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세력, 민주정통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복권되지 않아 15대 총선 출마가 불투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가 강력하게 김근태의 복권을 요청했고, 김 대통령이 결국 받아들여 15대 총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됐지만 개혁성향이 강한 김근태는 ‘비주류 정치’를 시작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근태는 2001년 9월 당 대표 선임을 둘러싸고 “당 위에 군림하는 특정계보가 있다”며 동교동계 해체를 촉구했고, 이에 권노갑 전 고문이 “동교동계는 민주당의 뿌리이고 역사”라고 발끈하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노무현 후보와 ‘개혁후보 단일화’를 조율하다 실패했다.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를 잡지 못하고 그해 3월 후보를 중도 사퇴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 ‘바보 김근태’의 두 목소리가 부딪친 시절이다.
노 대통령과는 자주 충돌했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그는 직접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는 개인성명을 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당 복귀 후에는 2006년 6월부터 8개월간 침몰하던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다.
세는 없고 바른길과 명분을 고민하던 김근태 정치는 느렸다. 재야 시절과 달리 고비마다 망설임도 많았다. 그러나 달궈지는 쇠처럼 결심하면 단단했다. 2007년 한·미 FTA 반대 단식농성이 그랬다.
■ 평생을 괴롭힌 고문 후유증
김근태는 17대 대선에 다시 도전하다가 2007년 6월 도중에 사퇴했다. 몸을 던져 ‘야권통합의 불’을 댕긴 것이다. 건강도 포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갈수록 커져가는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2001년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그에게 측근들은 고음 연설 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코 수술을 하라고 했다. 마취를 시작하자 수술대에 누운 김근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김근태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시술용 의자가 전기고문을 받던 의자로 연상한 치과에도 가기를 꺼린다. 물고문당할 때 냄새가 익었던 특정 비누도 쓰지 않는다. 만성비염과 손수건을 달고 살던 김근태. 그는 임종 직전 무의식 상태에서도 코로 영양분을 공급하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가족들을 울렸다. 평생 그의 생을 옥죈 고문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2007년 12월에는 완치 불가의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 늘 부족함이 많다던 그가 떠났다
김근태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했다. 김근태조차 ‘반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 신 후보가 뉴라이트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지막 화두는 정권교체를 향한 야권통합이었다. 김근태는 지난 3월 민주당 내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정당 인사들과도 만나 대통합을 역설했다.
김근태는 ‘희망’을 얘기했다. <희망의 근거> <희망은 힘이 세다>…. 책 제목에도 희망이 많다. 김근태에게는 “(1980년대) 죽음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이 있었다. 블로그에 적은 세 가지는 ‘정직한 나라(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동아시아연합)’였다.
----------------------------------------------------------------------------------------------------------------------------------------------
■ 강제징집된 12남매의 막내
김근태는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2남매의 막내였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친은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강제로 그만두게 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운동 역정이 시작됐다. 1967년 상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뽑힌 김근태는 8월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이끌고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김근태의 친형인 소설가 김국태(2007년 사망)는 1970년 발표한 단편 <물 머금은 벌>에서 데모 주동자로 강제징집된 아우를 형이 훈련소로 전송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우’는 ‘형’에게 “비록 내가 이처럼 부당하게 끌려가지만 나는 내가 한 행동에 후회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여섯 명의 형·누나는 어릴 때 숨지고 그 다음 세 형은 6·25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12남매 중 10번째인 형 김국태가 사실상 집안의 맏이 노릇을 했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왼쪽)이 1988년 석방된 뒤 부인 인재근씨(오른쪽)와 함께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과 수배해제 및 사면복권 쟁취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수배생활의 벗이 된 인재근
김근태는 1970년 제대하고 복학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이들의 공소장에 표현한 ‘공소 외 김근태’는 그의 별명이 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이 막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다.
1970년대 어느 겨울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시간을 넘겨 서울 도곡동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자리뛰기로 찬바람과 맞섰지만,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다.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피신 상태에서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형윤 상대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는 도피 중이던 1977년 8월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 중이던 이화여대 출신 인재근을 만나 결혼했다. 1977월 5월 김근태가 6세 연하인 인재근에게 서울 광나루의 선상 매운탕집에서 “나랑 결혼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다.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좋았다”고 했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냈다. 말을 배우고 가장 많이 한 말이 “양심수 석방”이라고 하는 그는 김근태의 ‘민주화 동지’였다.
■ 고문과 투옥으로 메워진 30~40대
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민련 집행위원장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김근태)이었다.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았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다.
공안당국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1987년 대통령선거를 경주교도소에서 맞이했다. 선거 당일 자정이 넘자 그는 교도관에게 결과를 물었다.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패배였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갖다 바친 패배’에 절망했다. 그는 여소야대 13대 국회가 출범한 뒤 1988년 6월30일 수감생활 2년10개월 만에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로 석방됐다.
김근태는 1989년 1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87년의 패배 후 흩어진 민주·진보세력을 다시 묶고, 그는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통합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다시 1992년 8월까지 그를 옥살이 시켰다.
■ 시작도 끝도 비주류였던 정치
김근태는 1995년 정치의 문턱을 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까지, 27년간의 3대 독재에 맞섰던 ‘재야 운동가’에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해 9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축으로 한 재야 인사들을 이끌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부총재를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세력, 민주정통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복권되지 않아 15대 총선 출마가 불투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가 강력하게 김근태의 복권을 요청했고, 김 대통령이 결국 받아들여 15대 총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됐지만 개혁성향이 강한 김근태는 ‘비주류 정치’를 시작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근태는 2001년 9월 당 대표 선임을 둘러싸고 “당 위에 군림하는 특정계보가 있다”며 동교동계 해체를 촉구했고, 이에 권노갑 전 고문이 “동교동계는 민주당의 뿌리이고 역사”라고 발끈하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노무현 후보와 ‘개혁후보 단일화’를 조율하다 실패했다.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를 잡지 못하고 그해 3월 후보를 중도 사퇴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 ‘바보 김근태’의 두 목소리가 부딪친 시절이다.
노 대통령과는 자주 충돌했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그는 직접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는 개인성명을 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당 복귀 후에는 2006년 6월부터 8개월간 침몰하던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다.
세는 없고 바른길과 명분을 고민하던 김근태 정치는 느렸다. 재야 시절과 달리 고비마다 망설임도 많았다. 그러나 달궈지는 쇠처럼 결심하면 단단했다. 2007년 한·미 FTA 반대 단식농성이 그랬다.
■ 평생을 괴롭힌 고문 후유증
김근태는 17대 대선에 다시 도전하다가 2007년 6월 도중에 사퇴했다. 몸을 던져 ‘야권통합의 불’을 댕긴 것이다. 건강도 포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갈수록 커져가는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2001년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그에게 측근들은 고음 연설 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코 수술을 하라고 했다. 마취를 시작하자 수술대에 누운 김근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김근태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시술용 의자가 전기고문을 받던 의자로 연상한 치과에도 가기를 꺼린다. 물고문당할 때 냄새가 익었던 특정 비누도 쓰지 않는다. 만성비염과 손수건을 달고 살던 김근태. 그는 임종 직전 무의식 상태에서도 코로 영양분을 공급하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가족들을 울렸다. 평생 그의 생을 옥죈 고문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2007년 12월에는 완치 불가의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2008년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진중권 당시 중앙대 겸임교수(왼쪽)가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을 인터뷰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늘 부족함이 많다던 그가 떠났다
김근태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했다. 김근태조차 ‘반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 신 후보가 뉴라이트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지막 화두는 정권교체를 향한 야권통합이었다. 김근태는 지난 3월 민주당 내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정당 인사들과도 만나 대통합을 역설했다.
김근태는 ‘희망’을 얘기했다. <희망의 근거> <희망은 힘이 세다>…. 책 제목에도 희망이 많다. 김근태에게는 “(1980년대) 죽음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이 있었다. 블로그에 적은 세 가지는 ‘정직한 나라(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동아시아연합)’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항상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욕심 같은 바람은 ‘생각의 사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입니다.”
+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마음이 푸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사귀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언제 보아도 언제 바람으로 스쳐 만나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
밤하늘의 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폭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의연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오늘 거친 삶의 벌판에서
언제나 청순한 마음으로 사는
사슴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모든 삶의 굴레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언제나 화해와 평화스런 얼굴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오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나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미국 시인, 1807-1882)
아름다운 사람, 영혼, 김근태 의사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역사·정치·경제·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루스 커밍스(68) 인터뷰 2 (0) | 2012.02.22 |
---|---|
브루스 커밍스(68) 인터뷰 1, (오마이뉴스) (0) | 2012.02.22 |
희망제작소 좋은 시장학교 지역리더가 되기 위한 십계명 (0) | 2011.11.04 |
故 김준엽, 12차례 관직 사양한 올곧은 지식인… 진보·보수 모두의 ‘참 스승’ (0) | 2011.06.08 |
스티글리츠 "미국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회" (0) | 2011.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