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라고 신성욱씨는 말했다. 인공지능의 진화를 꾸준히 다뤄온 과학 저널리스트지만 이를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부모들이 지금처럼 인지교육·조기교육에 매달린다고 그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걸까? 신씨가 4회 연속으로 진행하는 뇌과학 강좌는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3월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열린 첫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시사IN 이명익 |
강의에 앞서 영상부터 하나 보여드리겠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학생 3명과 흰색 옷을 입은 여학생 3명이 등장해 공놀이를 한다. 이들의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 같은 색깔 옷을 입은 학생끼리만 공을 패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 흰색 옷을 입은 팀이 공을 몇 개나 주고받는지 세어보시라(약 40초간 동영상 상영). 모두 세어보셨나? (청중 “15개요” 또는 “16개요”라고 답변) 정답은 16개다.
진짜 퀴즈는 다음부터다. 혹시 영상에서 고릴라를 보신 분? (몇 명이 손을 듦) 절반도 안 된다. 오늘 청중 수준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웃음). 영상을 다시 돌려보면 여학생들이 공을 던지는 동안 덩치 큰 고릴라가 아주 천천히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청중의 절반 이상은 이걸 왜 못 보았을까? 이는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주의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흰옷 입은 학생들에 주목하다 보니 한 화면 속에 나온 고릴라를 못 보았을 뿐이다.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렇다. 이름하여 ‘뇌의 지향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우린 매 순간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산다. 오늘 내가 좀 이르게 도착해 이 동네(서울 용산구 삼각지)를 산책했는데 유독 화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아마 난 앞으로 삼각지를 화실 골목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매 순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뇌가 가진 숙명이다.
좀 전의 영상에는 몇 가지 퀴즈가 더 남아 있다. 자세히 보면 공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뒤쪽에 있던 커튼 색깔이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검은 옷 입은 여학생 3명 중 1명도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걸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 뇌에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다. 옆 사람에게 서로서로 물어보는 것이다. “난 이런 걸 봤는데 넌 뭘 봤니?” 이렇게 묻다 보면 자신이 못 본 것이 있더라도 남을 통해 이를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지혜라 부르고 싶다.
뇌에 관한 최첨단 연구를 이끌고 있는 과학자들이 최근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소셜 브레인’이다. ‘사회적인 뇌’라니, 무슨 뜻일까? 관계를 맺는 뇌라는 뜻이다. 인간 자체가 사회적 동물인 만큼 뇌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단절되면 외로워지고 고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멍청해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더없이 풍요롭고 편리해졌는데 너도나도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는데 지혜는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만 바라보며 우물파기 식 경쟁을 하려 든다. 뇌는 이런 걸 원치 않는다.
인지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위)은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같은 제목의 책도 출간되어 있다. |
퀴즈 하나 더 내겠다. ‘ㅇ ㅂ ㅌ’이라는 한글 초성을 보고 떠오르는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있으신가? 대부분이 <아바타>라고 답하셨다. 실은 내가 여러분 뇌를 갖고 살짝 트릭을 부린 것이다. 이들 초성이 영화 제목이라고 말한 순간 여러분 머릿속에서 곧바로 맥락이 생겨난다.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들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categorizing) 것이다. ‘ㅇ ㅂ ㅌ’을 보면서 혹시 <오발탄>을 떠올리신 분도 있나? 아마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분도 있을 거다. 1950년대 영화인 <오발탄>은 최근에 익숙한 정보가 아니다.
우리 뇌는 이처럼 내게 익숙한 정보를 갖고 제멋대로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우뇌가 받아들인 정보를 가지고 좌뇌가 얘기를 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내 판단이 맞아!” “내 말대로 해!” 하면서. 심지어는 ‘인간의 뇌는 무한하다’며 뇌를 신비화하는 경향마저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뇌는 늘 특정 맥락에 의해 움직인다. 독자적·주체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소셜’이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 살 무렵이면 뇌가 완성된다고?
얼마 전 외신에 ‘400만 달러의 교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년에 50억원가량을 버는 한국의 사교육 강사를 소개한 기사였다. 이걸 보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인류 역사상 교사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인 적은 없었다.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서 보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완벽한 교육의 산업화를 이뤄냈다. 과거 가정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아무 대가 없이 이뤄지던 교육이 불과 20~30년 사이 급격하게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간 셈이다.
이로 인한 긍정적 측면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뇌과학 측면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뇌 발달’을 ‘지능 계발=성적 향상’으로 연결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세 살이면 아이의 뇌가 거의 완성된다? 그러니 부모가 제때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아이 지능이 계발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신경망 최소 단위인 시냅스의 밀도가 일생 동안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면 생후 2~12개월 무렵 최고조에 달했다가 그 뒤로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1980년대까지는 이것만 보고 3세 이전에 뇌가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시기 시냅스가 툭툭 끊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씨에서 싹이 나면 농부가 쭉정이를 골라 버리듯 뇌 또한 일단 시냅스로 가설공사만 해놓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나가며 뇌의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뇌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초창기에는 시냅스가 많을 때 뇌 성능도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 옛날 얘기를 시장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다. 언론도 이를 거든다. 1990~ 2010년 주요 일간지를 분석해보니 기사에서 뇌과학을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의사나 과학자가 아니었다. 사설 학원장이었다. 뇌과학 기사를 사실상 사설 학원장들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좌뇌와 우뇌를 고루 발달시켜야 한다’ 따위 선전에도 속지 마시라. 요즘 뇌과학자들은 좌뇌·우뇌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듣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의 뇌는 온전한 인간의 뇌가 아니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 시기 아이들의 뇌는 공사 중이다. 인간이라는 집을 잘 짓기 위해서다. 열두 살이 지났다고 뇌의 준공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부터는 뇌가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한 차례 뒤집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그 바람에 사춘기의 ‘발광’이 나타나긴 하지만, ‘나는 어디서 왔을까?’처럼 이전에 없던 질문을 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이때부터 우리의 뇌는 인간의 뇌로 본격 도약하기 시작한다. 이성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세계관·인간관·종교관 등 인간만이 갖는 특질들이 이 시기 이후 발달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뇌과학에서는 ‘전두엽이 발달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니 부모들이 기억하셔야 할 게, 열두 살 이전의 아이는 인간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웃음). 이 시기에는 동물적 본능이 훨씬 우세하다. 전 세계 아이들은 ‘다다다다’ 뛰어다닌다. 인종·문화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렇다. 심지어는 전쟁터의 아이들도 뛰어다닌다. 이것이 뇌 발달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를 허용치 않는다. ‘사뿐사뿐 걸어라’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한다. 한국은 더 그렇다. 학교에 가면 ‘정숙씨’가 늘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다(웃음). 그 결과 아이들은 ‘눈 뜨고 자는’ 유체이탈 능력만 향상시킨다.
그런데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 이후 교육에 이를 접목해 ‘과학에 기반한 교육(SBE:Science -Based Education)’을 시도하는 나라들이 있다. 독일·스웨덴·덴마크 등이 대표적인데, SBE를 받아들인 이들 나라는 교실 디자인부터 다르다. 우리처럼 교사가 앞에 서 있고 학생들은 뒤에 일렬로 앉아 있는 방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책걸상을 아예 없앤 학교도 있다. 50분 수업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뇌는 10분 이상 집중하면 ‘멘붕’이 오기 때문이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세계 최고 수준 성적을 거뒀다고 떠들어대는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이들 나라는 PISA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두 살 이전의 아이에게는 무엇이 중요할까?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충격을 받는 한국어가 ‘24시간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이라고 한다(웃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이렇게 쓰인 간판을 보는 순간 침이 고인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반응은 쉽게 말해 먹어본 자와 먹어보지 않은 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문자 해독력과는 별개로 ‘내가 몸으로 경험했느냐 경험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열두 살 이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몸으로 하는 경험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여러분은 ‘물’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시나. 어떤 이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우산을 들고 나를 마중 나왔던 엄마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할아버지와 날마다 갔던 뒷산 약수터를 떠올릴 것이다.
‘다른 것과 관계 맺기’가 뇌를 만들어간다
뇌를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인지공학자들은 이를 ‘언어의 풍경’이라 표현한다. 내가 몸으로 기억한 모든 것이 언어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언어의 풍경이야말로 한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의 성격·소양·창의성 이 모든 게 언어의 풍경으로 이뤄진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라는 존재, 곧 자아는 언어의 풍경과 다름없다.
ⓒ시사IN 자료 아이들에게는 뛰며 노는 활동처럼 몸으로 하는 경험이 뇌 발달에 필수적이다. 인지공학자들은 몸으로 기억한 모든 것이 ‘언어의 풍경’을 이룬다고 말한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을 보면 언어의 풍경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설날 딸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 갔더니 한지공예 체험 부스에 있는 여러 색깔 종이 중 짙은 하늘색 종이만 동이 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요즘 여자아이들은 이 색깔을 ‘엘사(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색’이라 부른단다. 한국 아이건 미국 아이건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언어의 풍경이 표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언어의 풍경은 유전자로 타고나는 게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데서 온다. 그런 만큼 누굴 만났고, 무엇을 보았고, 내 발로 뭘 디뎠는지가 중요하다. 곧 인간의 뇌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통해 계속 유지되고 발달된다. 물리적으로 보면 그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뇌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무수한 뉴런들이 뻗어나와 잔가지처럼 서로 얽혀 있다. 이들 잔가지는 일종의 전깃줄로 이해하시면 된다. 실제로도 전기가 흐른다. 이들 전기가 새지 않으려면 뉴런을 보호하는 껍질이 잘 생성돼야 한다. 그런데 이 껍질을 만드는 재료는 우리 밖에 있다. 곧 밖에 있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맺기가 뇌를 만들어가는 셈이다. 뉴런이 무수한 가지를 뻗고 있는 자체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기 위해서다. 이렇게 밖에 있는 재료를 만나 그 정보를 기억하고 저장하고 처리하기 위해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에게 관계를 맺지 말라, 놀지 말라고 말한다. 부모들도 고립돼 있다. 함께 아이를 길러주던 삼촌·이모들은 오늘날 모두 노량진에 가 있다(웃음). 아이를 기른다는 건 결국 밖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이다. <중용>은 “하늘 아래 나 아닌 다른 존재들과 만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이요(天命之謂性), 이를 따르는 게 인간의 길이며(率性之謂道), 이를 한평생 갈고 닦는 게 교육(修道之謂敎)”이라고 말한다. 현대 뇌과학자들이 찾아낸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질을 2500년 전 공자님은 다 간파하고 계셨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