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강수진 국립발레단장 (동아일보 인터뷰)

3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에 있는 국립발레단의 단장실. 나는 거기서 강수진 단장을 처음 만났다. 내가 가진 그녀의 이미지? 30여 년간 언론에 등장한 발레리나 강수진의 사진, 대개는 20대와 30대의 모습이 지배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보니 마흔여덟에 발레단장으로 변신한 ‘중년 강수진’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런데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 듦으로 인한 얼굴의 변화도 잘 느낄 수 없었고, 그녀의 몸은 여전히 발레리나임을 웅변했으며, 질문에 답하는 말은 삶에 대한 철학과 인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해서다. 거기에 부드러운 눈빛과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 아마도 후배를 가르치고 이끄는 예술 감독으로 일하며 체득한 듯하다. 이것도 그녀에게 훈장이라면 훈장이다.

9개월 된 푸들 강아지 ‘써니’를 안고 인터뷰 중인 강수진 단장. 그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내년 7월 2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오네긴’으로 은퇴공연을 한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단언컨대 발레리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직업인이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해서다. 발레리나의 삶은 클래스(Class), 리허설(작품연습), 공연, 이 세 가지가 전부다. 클래스란 춤을 추기 전 몸을 푸는 스트레칭. 여러 사람이 음악에 맞춰 함께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클래스는 발레리나에겐 생명이다. 하루만 걸러도 자기 몸이 다르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발레 하는 이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고.


―여전하시지요?

“그럼요. 클래스는 지금도 단원들과 함께 매일 합니다.”

당연한 답이었다. 왜냐면 그녀는 국립발레단장이기 이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종신단원이자 올해와 내년 서울과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네긴’ 전막공연을 앞둔 수석무용수이니까. 강 씨가 3년 임기의 제7대 국립발레단장에 취임한 것은 지난해 2월. 벌써 1년 5개월째로 내달이 임기의 절반이다. 그동안 단장(예술감독)으로서 삶이 궁금해 물었다.


―무용수와 예술감독으로 산다는 것, 많이 다르지 않나요.

“예. 하지만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있어 거기에 감사합니다. 사실 단장직은 이전에도 여러 번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더군요. 만약 이번에도 안 맡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게…. 그래서 남편과 함께 귀국했지요. 지금처럼 단원들과 함께 클래스도 하고 작품 코칭을 하는 것은 모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무용수는 작품을 통해 순간순간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갑니다. 전 지금 단원들이 그렇게 매일매일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지난해에 강 단장은 단원에게 ‘팀워크’를 강조했다. 단원 전체가 하나가 돼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그래야 컴퍼니(발레단)도 발전한다는 생각에서다.


“지난해 공연작으로 베토벤 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을 선택한 건 팀워크와 테크닉 향상을 위해서였어요. 올해는 코미디풍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골랐습니다. 이 작품은 단원 각자의 테크닉과 표현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저도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강 단장의 발레인생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녀가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마침내 수석무용수에 오른 1997년의 일. 한 해 전 예술감독이 된 세계적인 안무가 리드 앤더슨(2012년 방한)이 그녀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바로 전설적인 안무가 존 크랑코(1927∼1973·남아공)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주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은 스토리와 표현력을 중시하는 ‘드라마틱 발레’의 발상지. 모나코왕립발레단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들어간 것도 발레리나로 성장하려면 거기서 활동해야 한다는 스승 마리카 브라소바 교장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전 ‘말괄량이’를 못한다고 했어요. 왜냐면 저에게 그런 재미있는 면, 즉 ‘앙큼한 캐릭터’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었지요. 그랬더니 감독님께서는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시작했고 그 후로는 매번 이 작품의 오프닝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제 모습을 보니 이 작품을 통해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이 작품은 워낙 안무가 좋아서 시키는 대로만 해도 관객은 웃어요. 그것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나만의 것을 찾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유머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자신을 더 풍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거야말로 여러 면에서 발레를 삶과 떼놓을 수 없도록 만든 체험이 됐다고도 했다.

“이 작품은 테크닉이 완전히 다른 발레예요. 그래서 가르치는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지 모르던 우리 무용수들도 공연에 임박하거나 마칠 즈음에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표현력과 기량을 갖게 되지요. 그런 걸 지켜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된 게 아마 32년 만이지요?

“열다섯 살 선화예중 졸업 후에 곧장 모나코왕립발레학교로 떠났으니 그렇게 되네요.”


―그때 이야기를 좀….

“정말로 ‘마이 네임 이즈 수진’이라는 영어 한마디만 외운 상태로 모나코에 혼자 떨어졌어요. 처음엔 매일 울었어요.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맞지 않고…. 거기 와있던 세계 각국의 학생들은 몸도 예쁘고 발레실력은 또 얼마나 뛰어나던지. 우울증으로 하도 안 먹으니 교장선생님께서 밥 안 먹으면 돌려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을 지경까지 갔지요. 그러던 중 친구들이 자꾸 말을 시키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그때 정신을 가다듬었어요.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습뿐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에만 몰두했지요. 오후 9시 취침소등 후에도 몰래 위층 스튜디오에 올라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자정이 넘도록 혼자 연습했어요. 학과시간에도 다른 클래스까지 들어가서 또 연습하고. 그랬더니 입학 넉 달 만에 치른 시험에서 최우수등급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지요. 아마도 ‘하면 된다’는 믿음을 준 계기가 아닐까 싶네요. 왜냐면 유학하던 4년 반 내내 제 생활은 연습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유학 3년째인 1985년에 로잔콩쿠르(스위스)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그해 로잔콩쿠르는 특별했다. 유럽대륙 선발 15명이 미주와 아시아대륙(호주 포함) 선발 15명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다시 경합해 최종순위를 가렸기 때문. 그래서 그해 강수진의 1위 입상은 더욱 빛났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도 승승장구했을 듯한데….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입단해보니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진을 치고 있고, 저는 까마득한 군무의 일원인데 그것도 순서가 다섯 번째였어요. 선배들이 부상당하거나 감기가 걸려야 무대에 설 기회가 오는 자리였지요. 처음 2년은 역시 힘들었어요.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음식도 맞지 않는데다 그해 겨울은 또 얼마나 춥던지. 설상가상으로 얻은 집마저 발레단에서 먼 반지하인데다 곰팡이 냄새까지 진동해서…. 발레단에서는 춤출 일도 없고 생활은 악조건이다 보니 이번엔 폭식증이 오더군요. 얼마나 먹어댔는지 몸이 10kg이나 불어나고, 그 바람에 캐스팅도 못 받고, 그래서 더 먹고…. 악순환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어느 날이었어요. ‘레시필드’라는 작품에 군무자리가 비었어요. 그래서 서게 됐는데 정말로 그날 공연은 나이트메어(Nightmare·악몽)였어요. 왜 TV를 보다보면 다들 팔을 올리는데 팔을 내리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엇박자가 그 무대에서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전 그 다음날로 당장 해고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해고는 시키지 않더라고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설사 무대에 설 가능성이 없어도 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모나코왕립학교 때처럼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항상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이후 그녀에게 연습은 또다시 일상이 됐다. 하루에 토슈즈(발레리나의 무용 신발)를 서너 켤레씩 갈아 치울 정도였다. 어떤 해는 한 시즌에 250켤레를 쓴 적도 있었다.

강 단장 집무실에는 터키인 남편 툰치 소크멘씨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강 단장은 남편을 만난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라고 말했다.

―위기가 기회가 된 듯한데….

“예. 후회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게 그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게 사는 건 정말 힘들어요. 그러려면 1초 1초를 허투루 쓰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제가 선 이 자리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순간순간으로 이뤄진 하루하루, 그게 모아진 것이잖아요. 그러니 힘들어도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최선을 다하는 하루살이처럼 열정적으로 말이지요.”

그런 노력의 결과랄까, 그녀는 1992년에 처음으로 주역을 제안 받는 데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그녀는 주역으로는 처음으로 무대에 선다. 반응은 커튼콜이 20분간이나 이어질 만큼 뜨거웠다. 이어 1995년 ‘잠자는 숲 속의 공주’, 1996년 ‘오네긴’, 1997년 ‘한여름 밤의 꿈’, 1998년 ‘카멜리아 레이디’에서도 주역에 기용됐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에는 무용계의 오스카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여자무용수상을 받게 된다. 슈투트가르트 원예가가 신품종 난을 개발해 거기에 ‘수진 강’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그즈음.


―호사다마를 실감한 것도 그때지요?

“예.”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직후였다. 지젤 공연을 앞둔 강수진은 금이 간 왼쪽 정강이뼈 조직이 곪아 무대에 제대로 설 수조차 없게 됐다.

“5년째 앓던 것인데 그 지경으로 악화된 거죠. 의사마다 뼈는 붙지 않을 거고, 다시 무대에 설 수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간 수많은 절망을 겪어봤는데 그때의 그 절망은 색깔부터가 전혀 달랐어요. 발레리나로서 최고위치에서 겪은 것이니까요.”

당시 나이 서른둘. 걷질 못하니 집안에 틀어박혔고 청소마저 엉덩이를 밀고 다니며 했단다.

“그때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지금의 제 남편뿐이었어요. 그리고 저를 위해 스트레칭 방법도 개발해 주었고요. 그런데 아홉 달이 지날 즈음 뼈가 조금 붙더군요. 희망을 갖고 누운 채로 스트레칭을 시작했지요. 그래도 근육은 붙질 않더군요. 의사들은 역시 뼈가 완전히 붙을 수는 없을 거라 말하고. 하지만 저의 뼈와 근육은 완치되었고 그리고 재기했습니다.”


―참 어려운 시기였을 텐데….

“그땐 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그런 경험 있으세요? 절망감에 사람도 보기 싫고 우울하다보니 멍하게 앉아만 있는….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번의 발레인생을 이렇게 길게 다시 구가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요.”


―참 긍정적이시네요.

“전 어렸을 때부터 쉬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원한 것도 아닌 부상이 나를 스톱시켰어요.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쉬었기 때문에 이렇듯 오래도록 발레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때 그게 저를 묶어두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어려울 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에게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 행운의 여자예요. 그런 남편을 만난 게 그 무엇보다도 큰 복이라 생각하지요.”

그녀는 팬들의 사랑에도 감사했다.

“다시 두 발로 서게 되었을 때는 정말로 발레를 처음 하는 어린아이상태였어요. 다리가 45도 이상 올라가지 않았을 정도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대로 돌아간 뒤에도 참 많은 실수를 했어요. 제가 자신감을 회복할 때까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팬들의 사랑 덕분이에요. 그 힘이 꿋꿋이 발레를 계속할 수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저는 팬들이 보내주는 사랑의 파워를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느낍니다.”


―내년에 은퇴하신다고요?

“네. 내년이면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들어간 지 30년이잖아요. 그리고 저도 오십 줄(정확히는 마흔아홉 살)에 들어서고요. 은퇴공연(2016년 7월 22일)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네긴’으로 결정했는데 그날은 제 남편 생일이에요. 올 11월(6∼8일)에는 이 작품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함께 올립니다. 제가 출연하는 전막발레로 한국공연은 이게 마지막일 듯싶네요. 은퇴 후에 어디서 뭘 할지는 아직 생각 중이고요.”

그녀에게 나이 듦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의외였다. 자신은 그걸 오히려 행복하게 생각한단다. 자기더러 다시 젊어지라고 하는 것은 싫다고 했다. 이유는 이렇다.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쌓이게 되는 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이 곧 인생의 행복임을 깨달아서란다.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알게 됐으니 나이 듦에 오히려 감사하단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The Third Age)’이라는 책에서 진정 행복한 사람은 중년이라고 부르는 마흔 이후에도 ‘2차 성장(2nd Growth)’의 징후를 보인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그 징후 중 하나가 바로 강수진 단장처럼 나이 듦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다. 따라서 그녀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녀의 말대로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고 열정을 불살라온 사람만이 누리는 인생의 특권이다. 그녀가 아름다운 건 스스로 찾은 행복 덕분인 듯하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