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돈 없으면 못하는 것’. 요즘 무상급식·무상보육을 놓고 국회와 지자체, 교육청에서 나오는 얘기를 보면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듯하다. 한쪽에선 “돈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하고, 다른 쪽에선 “그래도 해야 한다. 하지만 돈은 네가 내라” 하며 다투고 있다.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결국 국회는 파행을 맞았다.
서울 노원구는 재정자립도가 19%밖에 안 된다.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꼴찌다. 그런데 근로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많은 보수를 주는 ‘생활임금’을 가장 먼저 도입했다. 저녁이 있는 반찬가게, 복지 목욕탕, 어르신 우울증 예방사업 등 알찬 ‘복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치구의 ‘용감한’ 복지 실험. 이 정권의 용어를 빌자면 ‘창조복지’라 부를 만하다.
‘가난한’ 자치구의 ‘용감한’ 복지 실험
공용 주차장과 체육시설을 관리하는 노원구서비스공단의 계약직 경비원 A씨. 올해 초 노원구와 최저임금인 시급 5210원에 고용계약을 맺었다. 하루 7시간씩(점심시간 제외) 월 25일 근무하고 주휴수당을 포함해 월 95만8640원의 기본급을 받는다. 여기에 식대(13만원)와 명절 상여금 등 수당(6만5000원)을 더하면 그의 월급은 115만3640원이 돼야 한다. 그런데 A씨 통장에는 매월 143만2000원이 찍힌다. 차액 27만8360원은 노원구가 지급하는 ‘생활임금’이다.
생활임금은 주거비 교육비 등을 고려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말한다. 현실적이지 못한 최저임금의 한계를 극복하려 도입된 개념이다. 노원구는 올해 물가 등을 고려할 때 근로자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판단해 27만8360원을 추가로 부담하고 있다. 구에서 직접 고용한 근로자 1349명 중 보수가 최저임금에 머무는 101명(약 7%)이 혜택을 받는다. A씨는 26일 “퇴직 후 첫 직장인데 다른 곳의 경비원 임금보다 훨씬 낫다”며 웃었다.
노원구는 2012년부터 구 행정명령을 통해 생활임금을 적용했다. 노원구와 구에서 출자·출연한 기관의 근로자가 대상이다. 노원구는 연간 510건(320억원 규모)의 공사·용역을 발주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 계약을 따내려는 민간업체도 근로자에게 생활임금을 줘야 ‘수주 인센티브’를 누릴 수 있다.
노원구 생활임금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올 최저임금 5210원보다 31% 높은 6850원이다. 환경미화·경비·사무보조·주차안내원 등이 받는다. 내년엔 월 149만5000원이 되고 수혜자도 150여명으로 늘어나지만 예산은 2억여원이면 충분하다. 민간 계약업체에 파급되는 효과를 고려하면 이 돈으로 훨씬 많은 근로자에게 임금 개선 효과를 안겨주는 셈이다.
‘45만원 복지’…아이디어가 절반
노원구는 서울 자치구 중 재정자립도가 꼴찌인 반면 복지 수요는 1등이다. 기초생활수급자(2만1375명), 장애인(2만8000명), 65세 이상 노인(6만1000명), 독거노인(1만5107명), 저소득 한부모 가정(2983가구) 등 다방면에서 그렇다. 중앙정부와 연계된 복지사업 등 이것저것 떼고 나면 쓸 수 있는 예산은 얼마 안 된다. 그런데 왜 자꾸 ‘복지 욕심’을 내며, 어떻게 복지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걸까.
지난 4일 노원구는 직원들이 청사 식당에서 저녁 반찬거리를 사갈 수 있는 ‘직원용 반찬가게’를 열었다. 퇴근 후에 가사에 쫓기는 여직원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서다. 반찬 가격은 한 가지(150∼300g)당 2000∼3000원. 메뉴는 오징어볶음 애호박볶음 등 손쉬운 요리로 미리 예약을 받아 정해진 수량만 판다. 전체 여직원 340명 중 시행 첫날 69명, 그 다음 주에는 132명이 반찬을 사갔다.
비용은? ‘제로(0)’에 가깝다. 예산이 얼마나 들었느냐는 질문에 한참 고민하던 담당 직원은 “반찬 포장을 위해 포장기계(45만원 상당)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나머지 재료비, 포장비, 조리원 초과근무수당은 모두 구매자가 지불하는 반찬값에서 나온다. 45만원을 투자해 132명이 ‘복지’를 누리고 있다.
돈 안 들이는 복지는 기발한 발상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노원구는 2011년 동네 ‘통장(統長)’ 680여명을 ‘복지 도우미’로 전환했다. 나날이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르신 대상 우울증 설문조사’. 통장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닌 덕에 설문조사 비용 수십억원을 아꼈고, 위기 가구 발굴 건수는 2012년 1906건, 지난해 3476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발품은 예산을 아껴준다. 1991년 건축된 노원구 중계동 목련아파트는 2619가구 중 1850가구의 욕실에 욕조가 없다. 장애인과 노약자 가구도 많다. 그런데 지난해 7월 아파트 상가 목욕탕이 경영난에 문을 닫았다. 주민들이 씻기 어려워지자 노원구는 지난해 11월 목욕탕을 직접 인수키로 했다.
걸림돌은 돈이었다. 내부 리모델링에 4억8000만원,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 설치에 2억원이 필요했다. 여기서 발품이 빛을 발했다. 노원구는 서울시의원과 공조해 시 예산 3억5000만원을 확보하고, 목련아파트 상가 소유자인 SH공사에서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결국 노원구는 전체 공사비 6억8000만원 중 26%(1억8000만원)만 들여서 지난 1일 ‘노원 복지 목욕탕’을 개장했다. 평일에 하루 평균 75명, 주말엔 130여명이 이용하고 있다.
“복지엔 저작권 없다. 좋은 건 베껴라”
‘직원용 반찬가게’는 덴마크에서 일하기 좋은 기업 1위로 꼽히는 제약회사 로슈 덴마크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19일 집무실에서 만난 김성환 노원구청장은 “좋은 복지는 베낄수록 좋다”며 “혁신과 발전은 절박함에서 온다”고 강조했다.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복지’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절대빈곤을 해소하려면 기초수급제도가 필요하지만 그 다음 단계도 돈으로 하려면 비효율이 생긴다. 주민 참여와 공동체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북유럽 복지모델에 한계가 온 배경에는 정부 재정으로 주도하다 주민 참여가 떨어진 점도 있다. 복지는 돈만 갖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노원구의 복지 실험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19일 생활임금 조례를 발의하고 내년 예산 3억5000만원을 편성했다. 복지 전달체계를 동 중심으로 옮긴 ‘동 복지협의회’는 서대문구가 도입해 ‘원조’ 노원구를 제치고 보건복지부 복지행정상 공모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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