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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예슬아, 울고 웃게 해줘서 [2014.07.28 제1021호]

youngsports 2014. 8. 21. 08:55
고마워 예슬아, 울고 웃게 해줘서 [2014.07.28 제1021호]
[이명수의 충분한 사람] 날마다 1천 명 넘는 관람객이 모여드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3반 17번 박예슬 전시회’ 기획한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


  싸이월드 공감 
»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자신의 인터뷰 기사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하륜 스님은 “세월호 관련 모든 자원봉사자와 종교인을 대신해서 한 인터뷰인 만큼 공덕이 있다면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회향합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길게 하고 싶었던 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작금의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스님은 “가족 잃은 슬픔에 진실이 묻히는 슬픔까지 두 번 겪지 않도록 잘 알아보지도 않은 채 ‘카더라 통신’만 믿고 비판, 비난, 외면하지 말고 내 가족 일처럼 끝까지 함께 지켜봐주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이해가 되던지 내가 대신 네, 대답했다.

예슬이에게 남기는 글도 작품이 되고

지금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세월호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막말과 냉대는 살인 행위에 가깝다. 세월호 가족들은 실제로 그것 때문에 죽고 싶다고 절규한다. 자신들의 탐욕과 무능을 헌법 수호로 포장해 세월호 특별법을 침몰시키고 있는 정치인들,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 몰염치하고 비정한 인간들이 그 주범이다. 그로 인해 세월호 가족들의 일상엔 절망과도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월호 가족들은 입학특례를 요구한 적 없다. 전원 의사자 지정이나 추모공원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독립기구가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거 하나 제대로 해달라고 아이 잃은 부모들이 뙤약볕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국회까지 1박2일을 걸었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핀다. 서울 광화문 단식농성장 가까이에 있는 한 작은 갤러리에는 매일처럼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지상에서 사라진 한 아이의 기억과 함께하기 위해서다. 전시회의 이름은 ‘단원고등학교 2학년3반 17번 박예슬 전시회’다. 7월4일부터 무기한으로 진행 중인 전시회인데 참사 100일째인 7월24일이면 관람객이 2만 명을 넘길 것이다.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20평 남짓한 작은 갤러리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 거기에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원형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기획한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를 만났다. 전시회가 끝난 늦은 밤, 예슬이의 재능과 유쾌함이 가득한 공간을 독점한 채 치유자 정혜신이 터잡기 하듯 기록되지 않은 대화를 시작했고 내가 뒤를 이었다. 때론 관람객의 처지에서 때론 전문가인 체하는 포즈로 때론 예슬이의 눈높이에서 찬찬히 묻고 깊이 들었다.


-갤러리 구조도 그렇고 전시회가 단출하고 다정해 보이네요. 근데 끝나는 날을 정해놓지 않았어요.


=네. 예슬이가 유치원 때부터 세월호 사고 이틀 전까지 그린 그림 41점과 그 아이가 디자인한 구두 2점, 옷을 실물 전시했는데요. 시작할 때 무기한 전시를 한다고 하면서도 그게 되겠나 했는데 점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선언적 의미가 많았다면 지금은 ‘이거 무기한 가겠다’ 싶어요. 사람들이 오는 것도 그렇지만 향후에 이 공간을 채워낼 수 있는 동력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거 같아요.

-사람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 동력이란 건 뭔가요.

=요즘도 하루 평균 1천 명 넘는 관람객이 오는데 공간이나 전시의 규모를 감안하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숫자죠. 이 뙤약볕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길게 줄을 서 계세요. 왜 그렇게 많이 오실까. 제 생각엔 다들 제 마음과 비슷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죄스러움, 미안함. 여기 와서 그나마 덜어보려는 마음. 그런 것들요. 여기 입구에 포스트잇 편지가 빽빽하게 붙어 있잖아요. 그건 제 기획이 아니에요. 어떤 날 보니까 1층 편지함에 빨간색 편지가 있는 거예요. 어떤 아이가 여기 왔다가 예슬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간 거예요. 아, 사람들이 여길 와서 그냥 가기 힘들어하는구나, 예슬이한테 뭔가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포스트잇을 놔둬봤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저렇게까지 됐죠. 저는 저것도 예슬이 전시회의 하나의 중요한 작품이라고 봐요. 그런 식으로 점점 업그레이드될 거예요.


이 공간 자체가 치유적 공간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오나요.

=처음엔 30~40대가 많았는데 점점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요. 요즘은 20대 이하, 20대 이상이 반반씩인 거 같아요. 저 귀퉁이 벽이 명당이에요. 저기 앉아 있으면 저는 은폐가 되고 전시장 풍경은 한눈에 보이거든요. 사람들이 전시작을 보다가 많이 울어요. 그러면 저도 따라 울게 돼요. 어떤 때는 막 웃어요. 예슬이 작품에 이런이런 성격이 다 드러난다면서 자기도 그렇다며 웃는 거예요. 그런 모습 보면 나도 웃긴 거예요. 그 친구들이 뭘 보고 웃는지 아니까요. 전체적으론 여기 온 사람들이 치유받고 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보면서 가여워서 어떡하지, 불쌍해서 어떡하지, 이런 분위기도 물론 있죠. 하지만 처음에 잠깐 그래요. 꼬맹이나 중딩들도 까불고 웃지는 않지만 되게 편해하고 오래 앉아 있다가 가요. 여러 번 오는 아이들도 있어서 제가 물어보면 “처음에는 눈물도 많이 났는데요, 집에 가면 자꾸 생각이 나요. 저 오늘 세 번째인데요. 편해져서 그림 보고 웃기도 했어요.” 이런 얘기를 해요. 고등학생들, 20대 초·중반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치유적 공간이네요.

=네. 어떤 50대 여자분이 2시간 가깝게 계셨는데 너무 우시는 거예요. 예슬이와 특별한 관계가 있겠구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여쭤보니까 지난주에 남편을 잃으셨대요. 장례 치르고 일주일 좀 넘은 시기였는데 상실감도 커서 넋 놓고 있다가 예슬이 전시회 소식을 듣고 무작정 온 거래요. 와서 남편 때문에 우는 건지, 예슬이 때문에 우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많이 흘리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괜찮으시다는 거예요. 가면서 또 와도 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언제든지 오시라고 했죠. 그분을 보면서 이 공간 자체가 위안을 받는 공간이 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슬이가 치유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고마워라, 우리 예슬이. 두 손 모아.

»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장 대표가 예슬이 전시회를 해주겠다고 제안한 거라면서요.

=네. 언젠가는 전시회를 해주고 싶어서 그림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예슬이 아버지의 인터뷰를 제가 보게 됐고 그 순간 ‘전시회를 내가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겠다기보다는 하게 되겠구나, 그런 쪽에 가까웠죠. 그러고 있다가 부모님을 뵙고 그림을 봤는데 제 첫 판단은 이게 전시가 되겠다였어요. 그때부터 예슬이 친구들에게 과정을 설명하고 예슬이에 대한 기억, 기록, 갖고 있는 사진, 영상을 다 달라고 얘기했죠. 페이스북에 비밀그룹을 만들어 예슬이 친구 두 명과 계속 의논했어요. 어떤 식으로 하려고 한다, 너희들이 좀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님과는 더 오래 의논했고요.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길 바랐다”

-예슬이 뒤에서 함께한 사람이 많았겠군요.

=네. 엄청나게 많았죠. 전 기획자로서 예슬이의 꿈을 담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결정만 했고 그다음부터는 뒤에서 너무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죠. 전시회 관련 제 트위트를 열심히 날랐고 페북을 공유해줬어요. 포스터 2만 장을 만들어서 10매, 20매, 30매 단위로 포장해서 전국에 보냈는데 그것도 다 자원봉사자들이 했죠. 예슬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옷을 만들어준 디자이너는 정말 짬을 내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내내 울면서 작업했다더군요. 예슬이가 디자인한 구두를 만들어준 디자이너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며 감탄했고 나이 드신 구두 장인들은 예슬이 사연을 알고 얼마나 정성껏 만들어주셨는지 몰라요. 제주도에 사는 어떤 분이 포스터를 보내달라는 이메일은 아직도 찡해요. “아이들이 제주도에 수학여행 오려고 했는데 결국 못 왔다. 포스터라도 와서 곳곳에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지금 이 공간이 된 거죠.

-예슬이의 꿈이란 주제를 잡았다고 했는데 예슬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슬이의 꿈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뭐 이런 목표가 있었을 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이걸 보고 사람들이 진짜 많이 울길 바랐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생각하길 바랐고, 여기가 참회의 공간으로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잊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도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는 사람들이 정확히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쉽게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바란 건 그냥 와서 봐라, 이 아이가 얼마나 꿈이 많고 노력한 아이인지 봐라, 우리들이 이 아이를 죽였다, 이런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어요. 초기에 많은 부분은 증오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가. 저에 대한 증오일 수 있고, 사람들에 대한, 세월호를 가라앉힌 어른들에 대한 증오일 수도 있죠. 전시를 하면서 치유라기보다는 조금 누그러든 측면은 있어요.

-기억에 남는다는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기억에 남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자기 기억도 잊어버리는데 남에 대한 기억을 한다는 게. 그런 의문에서 이 전시가 시작됐어요. 잊지 않겠다는 노력은 그 아이들이 누구냐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우연히 예슬이를 알게 됐고 전시를 하는 과정에서 예슬이를 조금씩 더 알게 되고 다른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된 거고요. 아까 1층 입구에 붙어 있는 사진의 아이들이 11명인데 그중 한 명만 살았어요. 몇백 명을 다 볼 능력은 없고 저 사진이 저에게는 시작이에요.


예슬이가 봤다면 ‘헐’ 했을지도

‘잊지 않겠다는 노력의 시작은 그 아이가 누구냐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에 아프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애정이 생기고 그러면 안 잊는다.

-예슬이는 너무 예뻐요, 재능도 얼굴도. 그래서 그런 재주가 없는 평범한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하지 하는 마음이 든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모든 아이들은 각자가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예술적이에요. 진짭니다. 어떤 아이는 춤으로, 어떤 아이는 공부로, 어떤 아이는 웃음으로, 어떤 아이는 살가움으로. 우리가 자세히 안 봐서 모르는 거죠. 궁금해하면 알 수 있어요. 저 같은 기획자 250명이 있어서 아이 하나에 한 사람씩 달라붙는다면 아이의 꿈을 끄집어내서 어떤 형태로든 기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의 꿈이 있고 뛰어난 기획자가 있으면 전시든 뭐든 다양한 방식으로 그 꿈을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부모님들이 저를 만났을 때 ‘우리 애도 잘 그렸는데’ 그러면 ‘제가 볼게요’ 합니다. ‘우리 애는 영화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면 ‘제가 볼게요’ 합니다. ‘우리 애는 음악을 잘했는데’ 그러면 또 ‘저한테 줘보세요’ 합니다. 제가 경험이 있는 일이기도 하고 실제로 예슬이 전시처럼 시작한 프로젝트도 있지만 현재 저 혼자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위 사람들과 그런 의논을 많이 해요. 아이들의 꿈을 찬찬히 살펴보고 기록된 것을 다 모아놓고 이 부분들을 가지고 예슬이 전시처럼 아이들의 꿈을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획자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250명 아이들 꿈이 예슬이 전시회처럼 예술적·문화적으로 표현된다 생각하니 아이들이 통증이 아니라 설렘으로 다가왔다. 예슬이 전시회 같은 장영승의 이런 시도가 최선이고 유일무이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세월호 아이들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물꼬는 트였다는 생각이다.

-예슬이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이 전시회를 좋아했을까요.

=좀 짜증을 내는 부분도 있을 거 같아요. 자기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제가 해석한 것들이 있거든요. 저 뒤에 있는 그림은 콜라주인데 분명히 예슬이가 하다가 찢어버렸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걸 제가 따로 오려서 액자도 투톤으로 하고 딱 걸었어요. 예슬이가 봤다면 ‘헐’ 했을 거예요. 또 여기 이 그림에는 ‘나는 절대 여자이고 싶지 않아’라는 자기 속마음이 담긴 글이 쓰여 있잖아요. 싫었겠죠. 집 평면도도 궁상맞다고 싫어했을 수 있고요. 근데 이 풍경화는 예슬이도 자랑스러워했을 거 같아요. 저도 이 그림 너무 좋아하거든요. 이 전시 공간 자체를 이 색깔로 칠하고 건 것도 이 그림이 너무 좋아서예요. 저 구두 만든 건 예슬이가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문가도 이런 축을 가진 디자인은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걸 구두 장인 할아버지가 나무로 다 깎았어요. 멋지잖아요.


조카가 사랑스러운 큰삼촌처럼

장영승의 목소리가 한껏 경쾌해졌다. 작가와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진 기획자 같기도 재능 많고 경쾌한 조카가 사랑스러워 죽겠는 큰삼촌의 수다 같기도 해서 나도 함께 웃었다. 예슬이가 내 가슴속으로도 쑥 들어온 느낌. 장영승은 이 전시회가 예슬이로 시작해서 예슬이들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내가 제일 많이 암송하는 시는 예슬이 전시회 날 도종환 시인이 아이의 시선으로 써서 낭송한 ‘엄마’라는 시다. 그 한 대목을 가만히 읊조렸다.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고마웠어요… 

몸은 여기 없지만 엄마가 기도할 때마다 엄마 곁으로 올게요. 

엄마 눈물 속에 눈물로 돌아오곤 할게요. 

사월 아침 창가에 새벽 바람으로 섞여오곤 할게요. 

교정의 나무들이 새잎을 낼 때면 연둣빛으로 올게요. 

남쪽 바다의 파도처럼 엄마에게 밀려오곤 할게요”

그렇게 예슬이들이 우리 기억 속으로 편안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장영승들이 나타나길 기원했다. 두 손 모아.


심리기획자 이명수, 녹취 전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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