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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록단이 담아낸 ‘세월호’ 피해자 가족]

youngsports 2014. 8. 2. 18:47

[시민기록단이 담아낸 ‘세월호’ 피해자 가족](3)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왜 네가 하고 있냐: 단원고 희생자 고우재군 아버지 고영환씨

일러스트 | 김용민 화백

ㆍ“그만 좀 하라고요? 어떻게 그래요, 억장이 무너지는데”

우재네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 산다. 우리 아파트에서만 15명의 학생들이 희생됐다.

국회 본관 앞 밤 10시, 우재 아버지 고영환씨(47)는 낮부터 계속 고행을 하듯 종이배를 접고 또 접었다. 그가 접는 배들은 아름다웠다. 그가 모 포장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솜씨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는 뭔가를 가슴에서 쓸어내듯이 배를 접었다.

나는 그런 우재 아버지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은 유가족들이 단식을 시작한 날이었다. 그 후 한 차례 추가 인터뷰를 했다.

- 전국 3500㎞를 달리셨다면서요.

“제가 선원들 광주 재판을 다 지켜봤어요. 첫 번째 재판은 괜찮았어요. 판사가 우리들을 이해해 주는 것 같더라고요. 두 번째 갔을 때는 똑같은 판사인데 말투부터 달랐어요. 세 번째 갔을 때는 진짜 아닌 거예요. 그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벌을 주자는 재판이었어요. 선장이나 선원들 불러서 왜 배가 그 지역으로 갔냐, 왜 배를 급선회했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배가 30도 기울어진 그 시점부터 이야기를 물어보는 거예요. 너는 그 상태에서 뭐했느냐, 이런 식으로요. 왜 사건이 났는지 원인을 밝히고 나서 그 사람이 죄가 있는지 밝혀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죄가 있느냐, 없느냐 묻는 재판이 아니라 너는 이미 죄가 있으니 벌을 받아라, 이런 의미였어요. 진상규명이 되는 순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정치인들 다 죽을 것 같아요. 뭔가 있으니까 진실규명을 안 하는 거죠.”

- 그래서 전국을 돈 거예요.

“언론에서도, 법정에서도 진실이 밝혀질 것 같지 않으니까 제가 직접 그 진실을 알리러 다녀야겠다, 해서 자동차를 타고 전국을 돈 거죠. 말하자면 ‘진실규명 여행’을 한 거죠. 여행이 끝나고 보니까 3500㎞ 탔더라고요.”

- 맨 처음 간 곳은 어디예요.

“처음에는 부안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갔어요. 아버지를 먼저 뵙고 시작을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제가 가니까 친척들이 다 모이시는 거예요. 빈대떡 부치고 삼겹살 구워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이번에 사고 난 애 아빠라고 하니까 안타까워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어른들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어요. 그래서 팽목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드렸어요.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제가 아직 아이 사망신고를 못했어요.”

- 우재 사망신고를 아직도 못했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사망신고를 하죠. 그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이를 보낼 수는 없죠.”

- 고향을 떠나 어디를 가셨어요.

“여수요. 회사 다니다 그만둔 동생이 살거든요. 이 친구도 사고 난 건 알고 방송이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 ‘진실’은 모르더라고요. 왜 사고가 났고 부모들이 왜 나설 수밖에 없는지를요. 나도 천안함 사고 날 때 신경을 안 써서 이 친구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 막상 겪어보니 이건 아니더라고요. 진도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해 주었어요. 처음에 팽목항에 갔었는데 해경이 무전기가 없어서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어요. 기가 막혔죠. 경찰이 무전기가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조명탄을 쏘아야 하는데 몇 개 쏘지 않았는데 벌써 다 떨어지고 없는 거예요. 배도 몇 척밖에 없었는데 언론에서는 수백척이라 했잖아요. 그게 현실이었어요. 그 친구가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위험하다고. 그래도 젊은 친구니까 통하는 건 있었죠.”

- 고속도로 휴게실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 만나 보셨다면서요.

“휴게실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밥 먹다가 텔레비전을 보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활동하는 모습이 나와요. 그러면 어떤 나이 많이 드신 분이 그래요. 저 사람들은 국가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데 왜 나서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런 말 들으면 답답하죠. 국가에서 진실을 안 밝혀주니까 부모들이 나서서 하는 거라고 설명을 드리면 당신은 뭔데 나서냐고 그래요. 나이 드신 분들은 말이 잘 안 통하는 면이 있어요. 여행하다가 중간에 서명 작업하는 부모님들과 합류하기도 했는데 부산에서는 대부분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어요. 그런데 어떤 60대 노인분이 그래요. 그만 좀 하라고. 그렇게 하면 돈 더 받느냐고. 제 하는 일을 돈과 연결시키면 저희는 억장이 무너지죠. 애들 얼굴밖에 안 떠올라요. 마산에서는 서명 작업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딸에게 세월호가 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전단지 주니까 나 그런 거 몰라요, 딱 치면서 가더라고요. 서명 작업하던 어머니들이 많이 울었어요. 우리에게 구원파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어요.”

- 아이 잃은 것만 해도 고통스러운데 그런 일들을 겪어서 더 많이 힘드셨겠네요.

“힘들어도 시골 구석까지 가서 제가 서명을 받았어요. 허름한 구멍가게에 가서 음료수 한 병 사고 나서 서명 좀 해달라고 하면 이게 뭐냐고 물어봐요. 왜 해야 되는지 설명해 드리면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기 때문에 나, 글 몰러, 그러세요. 제가 대신 적어드릴게요, 그러면 어르신들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차에서 자고 먹고 그랬어요.”

- 함께해주는 친구분들은 많은가요.

“제가 서울 제기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나왔거든요. 그 친구들이 운영하는 밴드가 있어요. 하루는 내 이야기를 올렸는데 한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친구야, 국가가 나쁜지는 알겠는데 정치 이야기는 우리 밴드에 올리지 마라. 내 삶의 이야기를 올리는 건데 그 친구들은 정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거죠. 사람들이 자꾸 세월호 이야기를 접하다보니 우리 유가족에게 짜증나는 게 아니라 세월호 자체에 짜증이 나는 거예요. 시원하게 해결이 되면 끝나는 건데 안되고 자꾸 공전되니까 일반 사람들도 우리처럼 견디기 힘든 거죠. 그래도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죠. 외국으로 이민간 친구는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해요. 그러면서 저에게 물어봐요. ‘왜 국가에서 해야 될 일을 네가 하고 있냐.’ ‘그렇지 내가 할 일은 아니지?’ ‘너도 이민 와라. 내가 그럴 줄 알고 대한민국을 버리고 왔단다.’ 그래요. 스케이트 선수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했잖아요. 세월호 사고가 나기 전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했는데 지금은 제가 딱 그 친구 기분이에요.”

-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재 생각이 많이 나시죠.

“제가 견딜 수 없는 건 우재도 제 아버지처럼 보냈다는 거예요. 팽목항에서도 아버지 가셨을 때와 똑같았어요. 아버지가 실수로 12층에서 떨어지셨어요. 마산에 있는데 여동생한테 전화가 왔더라고요. 119구급대가 왔어요. 사람이 떨어졌으면 빨리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되잖아요. 근데 여동생이 보고 있었는데 안 가더라는 거예요. 아버지는 살아계셨는데. 그렇게 30~40분이 지나니까 경찰이 오더래요. 그러면서 수습하고 가야 되니 기다리라고 그러더래요. 그 상황에 자살했냐고 물어보고 주소 적고 이름 적고 11층까지 올라가서 상황파악을 하더라는 거예요. 상황파악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사람을 살려두고 봐야 하는데.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나니까 구급차가 그냥 가더래요. 왜 가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시체는 싣고 가지 않는다고 그러더래요. 살아서 움직이고 계셨는데 동생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러더니 성바오로 병원에서 앰뷸런스가 오더래요. 이제 장례 치르겠다는 거 아니에요. 말이 되냐고요. 법적으로 경찰이 그렇게 조사를 해야 된다니까 동생과 어머니는 그런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3년 만에 내 아들이 죽은 거잖아요. 똑같은 현상이 보이는 거잖아요. 지금, 부모가 돼서 아무것도 못하고 애를 보낸 거잖아요. 이런 상황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감당이 안되는 거예요.”

- 우재를 그렇게 보내서 많이 고통스러우시겠어요.

“제가 우재를 찾고서야 경우 밥 한술 떴어요. 5일 동안 밥을 한 끼도 안 먹었던 거죠. 많은 부모님들이 그러셨을 거예요. 시간이 어떻게 흐른지도 모르겠는데 기억은 생생해요. 우재가 친구들과 잘 지내고 동생들도 잘 돌봐주었어요. 장례식 때 어떤 한 친구가 찾아와서 서럽게 우는 거예요. 한 시간 동안 목놓아 울었어요. 그 친구 우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같이 울었어요.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친구가 잠시 동안 우재를 괴롭혔나 봐요. 돈도 빼앗고 그랬대요. 근데 우재는 괴롭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친구로 대해 주었대요. 이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우재야, 죽을 때까지 너를 잊지 않을게.’ 

우재가 로봇 같은 기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동아리도 로봇동아리였어요. 우재가 저한테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공업고등학교를 간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반대했어요. 말이 좋아 엔지니어지, 회사를 위해 일하는 잡부와 같은 거예요. 제가 해 봐서 알아요. 기계를 고치는 제 일이 좋은 거면 하라고 하겠는데 힘드니까 좀 더 편한 일 하라고 반대했던 거죠. 그래서 단원고를 가게 되었는데…. 많이 미안하죠. 작년에 처음으로 우재랑 동생이랑 함께 여행을 떠났어요. 어렸을 때는 많이 갔는데 커서는 제가 휴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바빴으니까…. 우재가 어느 새 힘이 엄청 좋아졌더라고요. 함께 격투기를 하는데 조금 더 하면 제가 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만 하자고 그랬어요. 올해 또 여행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대신 저 혼자 이렇게 ‘진상규명’ 여행을 하게 돼 버렸네요.”

- ‘진상규명 여행’은 잘 마무리한 건가요.

“제가 돌다가 한 번은 퓨전식 막걸리 파는 술집을 갔거든요. 마포갈비 같은. 거기서 회사 같이 다닌 후배들이랑 술 먹으면서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젊은 친구들이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우리 자리로 오더니 그게 사실이냐고 묻더라고요. 자기들도 세월호 사건 때문에 화가 난다면서요. 그날 그 친구들이 안주 다 사줬어요. (그런 일 생기니) 애 낳기 싫다는 친구도 있더라고요. 애 낳아 그런 사고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요.”

- 젊은 친구들이 애 낳기가 싫대요?

“저희 반에 정호(가명) 아빠가 있어요. 정호 동생이 공부를 정말 잘해요. 이번에 기말고사를 봤잖아요. 영어, 수학 등 전 과목이 한두 개밖에 안 틀렸대요. 근데 국어만 한 개를 맞은 거예요. 아빠가 놀라서 어찌된 거냐, 물으니 ‘국어도 싫고, 국가도 싫어요. 아빠는 도대체 국회에 가서 뭐 했어요?’ 그러더래요. 애가 지금 진실규명도 안되고 있으니까 반항하듯이 국어 시험지를 받자마자 쫙 1번을 찍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한 개만 맞은 거예요. 

생존 아이들도 연수원에 있을 때는 자기끼리만 있으니까 텔레비전을 안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근데 밖으로 나와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자기들이 겪었던 거하고 너무 다르게 이야기하니까 충격을 받은 거예요. 자기들의 사고를 교통사고라고 했잖아요. 친구들이 많이 죽었는데 국가에서 그러고 있으니 애들이 화가 많이 나는 거죠. 그 친구들이 그러더래요. ‘나도 죽었으면 왜 죽었는지 모르고 그냥 묻혔을 거 아니에요?’ 이런 나라에서 생존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많이 되죠.”

- 우재에게도 여동생이 한 명 있지요?

“딸이 이번에 친구들이랑 대부도로 놀러가겠대요. 갯벌에 경운기 타고 들어가서 조개도 캐고 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빠는 안 가면 좋겠는데…, 그랬어요. 자기를 못 믿느냐고 잘 다녀오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딸은 믿는데 바다는 못 믿어’ 했어요. 이번 사건으로 딸이 어디 가면 많이 불안해요. 이제 하나 남은 자식이잖아요. 그마저도 잘못될까봐 걱정이 되는 거죠.”

- 여행 하면서 느낀 점이 많을 것 같아요.

“마지막은 대구에서 장식했어요. 대구가 의외로 편했어요. 고생하네요, 하고 말 거는 분도 있었고 우는 분도 있었어요. 지금 책임지지 않는 당 찍어서 미안하다고. 그런 이야기 들으면 대구가 좀 바뀌긴 바뀐 것 같아요. 그렇게 유가족들이 350만명 서명 받아서 줬는데 정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국민을 무시하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죠. 그래도 전국을 돌면서 많은 이야기 나눴으니 그걸 바탕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가야죠. 다시 시작해야죠.”

<김순천 | 안산시민기록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