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16 19:39수정 : 2014.05.1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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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7일 5·18 민중항쟁 당시 마지막 새벽 방송을 한 김선옥씨가 16일 오후 광주학살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한 민주열사들의 넋이 안장된 광주 북구 망월동 구묘역을 찾아 묘비를 둘러보고 있다. 광주/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세월호도 5·18도 잊으면 안돼…우리가 우릴 지켜야죠”마지막날 새벽 동이 트기 전이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눈물을 흘릴 경황도 없었다. 계엄군의 진입을 앞둔 긴박한 순간, 그는 마이크를 잡았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여성이 절규하듯 쏟아내는 이 방송을 새벽에 집에서 듣고 있던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980년 5월27일, 열흘간의 항쟁 마지막날 새벽 광주에 울려 퍼졌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지금껏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5월19~21일 항쟁 초기 길거리 방송의 주인공이었던 전옥주·차명숙씨는 검거돼 마지막날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4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오월 마지막 새벽 방송의 주인공은 김선옥(56)씨였다. 그는 지난 9일 <한겨레>와 만나 “광주를 지키려면 시민들이 모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엄군이) 시민들을 다 죽일 수는 없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온다’고 방송했던 거죠”라고 말했다.
마지막밤 학생들 돌아가라 다독여
영창 끌려가 전기고문 위협받기도
지금도 정신적 외상 시달려
“생존자 아프게 하지 말고
끝까지 보듬고 같이 가야”시민군 지도부는 계엄군 진입 전날 밤 여성과 고교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김씨는 옛 전남도청에 꾸려진 시민군 상황실을 빠져나오기 전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5월27일 새벽에 세차례 방송을 했다”고 말했다.
많은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란 처절한 호소를 듣고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갖고 있다. 김씨가 마치 거리를 돌며 방송을 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은 옛 전남도청 옥상에 걸린 고성능 앰프의 효과 때문이다. 옛 전남도청 10㎞ 반경 안에 살던 10만여명의 시민들이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80년 5월 그는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김씨는 5월22일 오페라 해설집을 사려고 광주 금남로 인근 서점에 나갔다. 계엄군은 5월21일 금남로에서 집단 발포(오후 1시)하고 퇴각(오후 5시30분)한 뒤였다. “분수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학생들이 시위를 했는데, 피해는 시민들이 입는다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는 “아, 이것이 전쟁이구나. 국가가 광주(국민)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엔 누가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다. 여성들은 취사반이나 인근 병원으로 배치됐다. 그는 옛 전남도청 민원실에 마련된 상황실에서 방송하는 일을 맡았다. “전공이 성악이니까요. 음악다방에서 디제이 아르바이트를 해 방송기기를 만질 수 있어 안내방송에 제격이었지요. 그런데 방송이 나의 일이 돼버렸지요. 마지막날까지….” 그는 ‘○○동에서 주검이 발견됐다’는 등의 소식을 방송으로 시민들에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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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사망자 및 상이 후 사망자, 생존자 중 자살자 |
김씨는 “차량통행증과 유류보급증, 외신기자 출입증, 야간통행증 등을 발급하는 일을 맡았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배가 고프면 주먹밥을 먹었고, 쪽잠을 잤다. “나중엔 밤에 암호를 시민군들에게 알려주고, 어쩔 때는 총알도 나눠주고 그랬지요.” 마지막 밤에 그는 도청 2층으로 올라가 여성·고교생 등에게 “어둡기 전에 나가라. 아무 일 없으면 내일 오라”고 토닥였다. 김씨도 마지막날 새벽 방송 끝난 뒤 도망쳐 나왔다. 두렵고 무서웠다. 옛 전남도청에서 멀지 않은 산수동 자취방까지 뛰어가 몸을 숨겼다.
김씨는 80년 7월 교생실습을 하던 중 합동수사대에 붙잡혀 당시 광주시 서구 치평동에 있던 육군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폭도 김선옥’의 사진을 찍고, 먼저 붙잡혀 온 시민군들에게 주전자로 물을 먹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맨발에 새까만 발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사관은 “지하실 전기판에 올려야겠네” 하며 위협했다. 김씨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두달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김씨는 “세상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가는 것을 보고 큰 상실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듬해 후배들과 교생실습을 했지만, 교직 발령을 내주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탄원서를 써서 사정을 호소해 83년 3월 음악 교사로 발령이 났다. “5·18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딸이 5·18에 연루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어머니(당시 51)는 교직 발령 두달 전에 세상을 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지금도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며 산다. “머리가 반쪽 날아간 시신이 바닥에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는 꿈을 꾼다”고 한다. 옛 전남도청에 들어갔을 때 봤던 그 주검이다. 김씨가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딸(33) 때문이었다. 미혼모로 딸을 키우던 그는 2006년 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오월단체에도 가입하고, 국립5·18묘지에에도 처음 가보았다. 2011년에 딸이 결혼한 뒤 명예퇴직했다. 딸은 며칠 전 어버이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의를 위해 싸워온 엄마가 참 대단하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혼자 울었다.
그는 최근 세월호 참사를 방송으로 본 뒤 몸져누워 버렸다. ‘국가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세월호와 80년 5월은 닮은꼴이다. 김씨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80년 5월 생존자들 가운데는 트라우마 때문에 술과 빚더미로 고생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자살자도 늘고 있다.([♣그래픽 참조♣]) 5·18구속부상자회 광주남구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세월호나 오월이나)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생존자를 아프게 하지 말고 끝까지 보듬고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켜야 합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