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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교육법, 보아 가족

youngsports 2010. 11. 12. 09:31

보아 엄마 성영자씨,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가족 비하인드 스토리
보아의 어머니 성영자씨는 이제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느 곳에서나 주목받는 성공한 어머니다. 삼남매를 각각 서울대학교 출신 피아니스트,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 뮤직비디오 감독, 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에서 사랑받는 가수 보아로 길러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개입과 때로는 냉정하리만큼 절제된 지원으로 자녀들을 각 분야의 정상으로 키울 수 있었던 특별한 교육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때 톱스타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는 보아의 어머니 성영자씨, 그녀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다섯 가족의 힘들었던 과거와 행복을 찾기까지의 시간들 그리고 삼남매의 성장 과정.

뼛속까지 시린 경제난, 눈물겨웠던 가족의 꿈

 


성영자씨(55)의 첫인상은 여느 엄마들보다 더 푸근하고 따뜻했다. 내로라하는 톱스타의 엄마로서 어깨에 약간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오히려 소박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매 순간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역시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막내딸 보아의 데뷔 10년 만에 진솔하게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TBC(현 KBS)에서 연출 일을 하던 성영자씨의 남편 권재철씨(57)는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방송국을 그만두고 지인의 권고로 잘 알지 못하는 스포츠용품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두운 비전에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4, 5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목장에서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 전원주택을 지어 온 가족이 서울에서 이사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자녀들에게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실컷 노래도 부르고 새벽이고 한밤중이고 아무 때나 피아노를 칠 수 있었어요. 급기야 노래방 기기를 집에 설치해 세 아이가 실컷 노래하고 춤출 수 있도록 해주었고요. 아마 도시에 살았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죠. 그때까지는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하지만 이후 예상치 못했던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서른여덟이었던 남편이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지방의회 선거에 나가게 된 것. 하지만 선거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 했다. 열정을 가지고 도전한 시의원의 꿈은 근소한 표 차이로 접어야 했다. 4년 후 다시 도전 의지를 불태우며 재출마를 했지만 또 낙마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옛말에 선거를 치른 집은 간장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두 번의 선거 실패로 성영자씨의 가족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남은 것은 한숨이요, 느는 것은 빚뿐이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둘째아들 권순욱, 아버지 권재철씨, 큰아들 권순훤, 어머니 성영자씨, 막내딸 보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캄캄하고 막막했던 차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 우유 판촉이었어요.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저는 무작정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농장에서부터 3km 이상을 걸어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다녔죠.”

혹시 자식들이 우유 배달하는 자신을 볼까봐 일부러 의정부까지 먼 동네를 택한 그녀는 70km 떨어진 곳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출근했다. 우유가 가득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파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영업활동을 하느라 다리는 뻐근해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였다.

“엄마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그 무렵 첫째는 대학에서 전액 면제 장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 들어오는 레슨 아르바이트를 맡으며 스스로 용돈을 해결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고3인 둘째 뒷바라지와 당시 이미 가수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보아를 위해 더욱 열심히 우유 판촉 활동을 했죠.”

그런데도 집을 담보로 누적된 빚은 늘어만 갔고 결국 집이 경매로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된 가족은 집 아래쪽에 붙어 있던 밭에 작은 창고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 기둥을 세우고 합판을 덧대어 간신히 만든 방 틈새는 신문지나 헌 옷을 이용해 바람을 막았다. 보일러도 없고 전기도 멀리서 끌어와 사용해야 하는 그야말로 움막과 다름없는 초라한 상자 집이었다. 그곳에서 성씨의 가족은 이를 악물고 재기의 꿈을 키웠고 그 결과 세 자녀 권순훤(31), 권순욱(30), 보아(본명 권보아·24)는 자신이 도전한 세계에서 저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눈물의 성공을 거뒀다.

“그 사이 저는 보험설계사 일도 했어요. 다행히 우유 판촉보다 수입이 좋아져서 영업지국의 판매왕에 뽑히기까지 했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좋아하던 춤을 접고 공부를 시작해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했어요. 막내딸 보아는 힘들고 어려운 연습생 시절을 이겨낸 후 데뷔해 월드 스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폭풍 같았던 세월을 겪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엄마의 교육법, 자율식 성과제와 아낌없는 칭찬

 


성영자씨는 자녀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스스로 잡도록 도와주는 것이 엄마로서의 올바른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구속하기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며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했다.

이 시대의 많은 엄마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기를 자식에게 강요해서 정작 아이들이 큰 이상을 품었다가도 더 높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칫 부모의 구속으로 인해 일탈하는 경우도 다반사이기에 그럴 바에는 아이를 방목하며 키우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공부든, 친구들과의 교제든 아이 스스로 선택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대신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조건을 하나씩 붙였다. 꼭 갖고 싶은 물건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부모님과의 약속을 먼저 지킨 후에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약속한 점수에서 0.5점만 부족해도 어림없어요. 사주는 사람에 대한 대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다행히 아이들이 잘 따라줬어요. 저녁에는 꼭 9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한다고 했고요. 기본적인 틀 안에서 자유를 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의 성취욕도 높아지죠.”

5년만에 컴백해 한창 활동중인 막내딸 보아와 함께.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무조건 밀어줬던 것도 성영자씨가 노력한 부분 중 하나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아이를 바꾸려고 한다. 자녀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는 스스로도 충분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잖아요.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밀어주고 도와주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아이의 기쁨이 더 커지고 부모의 응원에 부응하기 위해 더 잘하고자 노력할 수 있어요. 아이를 너무 질타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아이를 더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없도록 하는 장벽과 같아요.”

아낌없는 칭찬도 그녀가 아이들을 키우며 절대 빠뜨리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녀는 칭찬 교육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둘째 아들과 보아는 물론,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큰아들에게도 틈틈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식물이나 동물도 사람이 칭찬의 말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란대요.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어요. 특히 자녀들은 칭찬해줬을 때 부모가 기대한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요. 심지어 잘못을 했을 때도 그것조차 경험이 되어 앞으로 더 성숙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니 무조건 다그치거나 질책해서는 안 돼요.”

음악으로 성공한 삼남매의 좌충우돌 성장 과정

 


성영자씨의 교육법대로 보아네 삼남매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큰아들 권순훤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좋아해 다섯 살 때부터 가르쳤다. 물론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피아노 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특한 아들은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모인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한 달에 몇 백만원의 레슨 비용을 투자할 때 그 비용에 1/10 정도밖에 안 되는 20여 만원의 레슨을 받으며 죽기 살기로 연습했다.

“저는 원래 아들이 과학고를 거쳐 카이스트에 들어가기를 원했어요. 남자아이가 피아노를 너무 좋아하니까 처음에는 이상했거든요. 하지만 아들이 피아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곁에서 보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저렇게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네가 단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해봐라’고 했죠.”

그 결과 권순훤은 당당히 서울대학교 음대에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온 가족은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렸고 실제 그 모습은 모 일간신문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아이들을 방목해서 기르더라도 자기가 가야 할 길에 대한 룰이 정확하게 있더라고요. 무척 놀랐어요. 그때의 기분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정말 감격스럽죠.”

둘째 아들 권순욱은 그림 그리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밤새 만화책 한권을 뚝딱 만들어 다음날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돌려보기까지 했다.

“큰아이와 막내의 레슨비가 많이 들잖아요. 보아는 영어에 가야금까지 가르쳤거든요. 그러다 보니 둘째에게는 제가 좀 소홀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혼자 매일 그림을 그리더니 어느 날부터는 춤을 추기 시작하더라고요. 고등학교에서 댄스 경연대회를 한다기에 가족이 다 같이 보러 갔는데 정말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성영자씨는 자신의 교육관대로 아들이 춤을 추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 혹시 공부하기 싫어서 춤을 선택했나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있었지만 무대 위에서 멋지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아들을 보면서 ‘내 아이가 단지 춤으로 끼를 발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터득하고 그 마음을 다스리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춤이 좋다면 정말 열심히 해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각종 춤 대회에서 1등을 휩쓸어오더라고요. 상금도 많았고요.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하다 보면 또 다른 무언가가 마음에 와 닿아서 잡힐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그냥 춤을 추라고 했죠.”

그래서 고3 때도 춤을 추라고 내버려뒀다. 물론 대학 입시에는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변했다. 갑자기 미대에 가고 싶다며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성씨는 아들이 선택한 길을 열어주기 위해 생활비를 털어서라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춤만 추다 보니 자기 몸값이 안 나간다며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로서 정말 기뻤어요. 제가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구속했으면 탈선의 길로 빠졌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자유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한 모습이 대견했고요.”

결국 둘째 아들 권순욱은 삼수 끝에 홍익대학교 미대에 합격했다. 일찍이 미술을 시작한 아이들이 입학하기에도 쉽지 않은 곳인데 그는 단 2년의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가수 보아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서인영, 폭시, 서영은, 팝핀 현준, 소리 등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막내딸 보아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사랑받고 있는 월드 스타다. 세 살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어린 딸은 둘째 오빠 권순욱을 따라다니며 춤을 추고 배우다가 지역의 한 댄스대회에서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하게 됐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보아를 키우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던 곳만 해도 무려 15곳이 넘었다.

“보아는 어릴 때부터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항상 녹화해서 따라 부르고 거기에 나오는 춤까지 다 외웠어요. 또래 아이들보다 유독 튀는 걸 좋아했고요. 멀쩡한 바지를 잘라 핫팬츠를 만들기도 하고 길게 기르던 생머리를 한쪽만 짧은 단발 커트로 잘라서는 귀밑 애교머리까지 늘어뜨리고 나타난 적도 있어요. 그런 스타일은 난생처음 봤어요.”

공부에도 관심이 많았던 보아는 초등학교 때 반장과 전교회장을 지냈고 서울 삼육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기도 했지만 끼를 그대로 살려 남들보다 일찍 연예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데뷔해 맘고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 엄마로서 울컥하기도 했다.

“제 딸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여자이고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면 지금의 보아도 없었겠죠. 평범하지 못한 부분에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떳떳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무조건 밀어줬어요.”

처녀 시절 시인을 꿈꿨던 성영자씨는 요즘도 틈틈이 시를 쓴다. 얼마 전 자신의 인생과 교육 이야기를 글로 담아낸 자서전에 이어 기회가 된다면 시집도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왔듯이 막내딸 보아가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엄마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하고자 한다.

“보아가 대학도 가고 서른 살 즈음에는 결혼도 했으면 좋겠어요. 스타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말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좀 자유롭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요.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잘 판단하겠죠. 저는 그저 아이들의 곁에서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줄래요.”

------------------ 레이디 경향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