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1955/56시즌 개막 이후 61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챔피언스리그
우리는 매 시즌, 좋아하는 팀, 좋아하는 리그, 좋아하는 선수에 관계없이 하나의 똑같은 대회에 열광하고 집중합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유럽 클럽축구의 정점인 챔피언스리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2015/16 챔피언스리그의 조별 라운드가 시작되는 시점에 서 한번쯤 그 챔피언스리그는 도대체 어떤 계기를 통해 누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고 지금까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이어져왔는지 알아보면 어떨까요?
칼럼 한 편에 챔피언스리그 60년의 역사를 모두 다 담아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긴 영광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과 스토리들을 살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1. 1954년, 울버햄튼과 데일리메일, 그리고 르퀴프의 가브리엘 아노
아주 뜻밖이면서 축구팬들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챔피언스리그와 그 전신인 '유러피언컵'은 UEFA(유럽축구연맹)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매년 열광하는 이 대회의 막을 올린 사람은 현대의 축구팬들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매체 '르퀴프'의 기자 출신 편집장이었던 가브리엘 아노라는 남자였습니다.
유러피언컵의 창단 배경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UEFA 공식 홈페이지의 역사 섹션입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러피언컵은 UEFA의 첫 의회가 열린 직후에 창설되었지만, 그것은 UEFA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UEFA의 창립멤버들은 국가대표팀간의 경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의 스포츠 매체 르퀴프와 그 편집장 가브리엘 아노, 그리고 그의 동료인 자크 페런이 수요일 저녁에 진행될 새 대회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그러면, "'가브리엘 아노'라는 남자가 유러피언컵의 창시자다"라고만 알고 넘어가기 전에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계기로 유러피언컵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알아보면 어떨까요?
유러피언컵 뿐만 아니라 발롱도르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가브리엘 아노는 그 자신이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로 12경기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선수이자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잠시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한 축구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축구선수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마친 후 기자생활을 거쳐 르퀴프의 편집장이 된 아노에게 유럽에 있는 유수의 클럽들이 서로 경쟁하는 대회를 만들자는 영감을 줬던 의외의 두 주인공이 있습니다. EPL에서도 활약하며 축구팬들에게 익숙하고 현재 잉글랜드 2부 리그에 소속된 클럽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국내 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영국 매체 중 하나인 데일리메일입니다.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가브리엘 아노를 도와 유러피언컵 창설에 공헌했던 자크 페런이 2006년에 UEFA 측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세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아노가 잉글랜드로 울버햄튼 원더러스(1953/54시즌 잉글랜드 리그 챔피언) 대 부다페스트 혼베드(레알 마드리드 입단 전 푸스카스가 뛰고 있었던 팀), 그리고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경기를 보러 갔다. 울버햄튼이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자 영국의 일간신문 데일리메일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울브스, 이 시대의 세계 챔피언'"
"그 기사를 본 아노는 '레알 마드리드와 AC 밀란 같은 클럽들이 있는데 데일리메일의 주장은 억지다'라고 생각했고 곧 르퀴프 내부적으로 '유럽 클럽들의 대회를 만들면 어떨까. 그럼 울브스가 진짜 챔피언인지 알 수 있을 것 아니냐'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울버햄튼과 데일리메일이 전혀 의도치 않게 씨앗을 심고 가브리엘 아노라는 르퀴프 편집장을 거쳐 제안된 '유러피언컵'에 대한 아이디어는 곧 UEFA와의 조율을 거쳐 구체적인 일정과 규칙을 갖고 1955년 9월 대망의 막을 올리게 됩니다.
2. 1955/56시즌 유러피언컵의 첫 스타, 디 스테파노와 레알 마드리드
사진 2)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초대 우승의 주역, 디 스테파노
그 최초의 시즌이었던 1955/56시즌의 유러피언컵은 현재의 챔피언스리그와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 두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참가 팀은 반드시 각 리그의 챔피언일 필요는 없으며 각 국가의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팀이어도 좋다.(챔피언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었습니다.)
2) 첫 대회의 참가 팀은 (현재와는 다른) 16개팀으로 한다.
1955년 9월, 최초의 유러피언컵 경기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경기의 주인공은 스포르팅 리스본과 파르티잔으로 두 팀은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경기를 마쳤습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지휘 아래 유러피언컵 창설 자체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레알 마드리드는 대회 첫 시즌부터 기세 좋게 승리행진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들의 준결승 상대는 구단 역사상 최다득점자인 군나르 노르달이 버티고 있던 AC밀란.
가브리엘 아노가 ‘울버햄튼이 세계 최고’라는 데일리메일의 기사 제목을 보고 즉시 떠올렸던 바로 그 두 팀이자 2015년 현재 대회 역대 최다우승팀 1, 2위에 올라있는 레알 마드리드와 AC 밀란(각각 10회, 7회)이 첫 대회에서부터 준결승전에서 격돌한 것입니다.
1956년 4월 19일과 5월 1일, 양팀의 홈 구장에서 열린 두 팀의 맞대결에서 양팀은 각 팀의 최고 레전드 공격수인 노르달과 디 스테파노가 모두 골을 터뜨리는 격전을 펼쳤고 레알 마드리드는 결국 합산스코어 5-4로 결승에 진출합니다.
유러피언컵 최초의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한 팀은 스타드 드 랭스. 우승 경력으로만 놓고 보자면 AC 밀란에 비해 손쉬워 보이는 상대일 것 같은 랭스에는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인 레이몽 코파가 뛰고 있었고 랭스는 오히려 전반 시작 후 10분만에 두 골을 먼저 터뜨리며 승기를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는 '유러피언컵 최초의 스타'로 불리는 디 스테파노가 있었습니다. 의외의 두 골을 먼저 내준 레알 마드리드는 전반 14분 터진 디 스테파노의 골에 힘입어 전열을 가다듬은 후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격수 헥토르 리알의 결승골에 힘입어 결국 유러피언컵 초대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립니다.
3.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잉글랜드와 맷 버즈비의 강단
유러피언컵 첫 시즌이었던 1955/56시즌, '축구종가'임을 자부하는 잉글랜드 팀은 그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일까요? 또는 그들이 스스로 참가를 거부한 것일까요? 그 원인은 클럽이 아니라, 축구협회 또는 리그 측에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대해 다룬 대부분의 서적 또는 주요언론기사에서 뒤늦게 공통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내용에 의하면,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프랑스 언론사에 의해 제창되어 시작되는 유러피언컵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것이 오히려 잉글랜드 축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영국의 정론지 가디언에서는 그런 당시 협회의 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근시안적이고 바보 같은 풋볼리그의 의장은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또는 고의적으로 그러길 원치 않았고), 그 대신 새로운 리그컵을 창설하겠다고 나섰다. 그런 그의 시도는 그의 판단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협회의 입장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피해자가 된 팀은 다름 아닌 첼시였습니다. 1953/54시즌 우승을 차지했던 울버햄튼에 이어 창단 50주년이 되던 해 1954/55시즌에 아스널 레전드 공격수 출신의 테드 드레이크 감독의 지도아래 최초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첼시는(아이러니하게도, 아스널의 UEFA컵 우승을 이끈 조지 그레엄 감독은 첼시에서 스타 선수가 된 후 아스널에 입단했습니다) 초대 유러피언컵 참가 요청을 받았으나 협회의 반대의사를 전달받고는 그대로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첼시로서는, 최초로 리그 우승을 거둔 바로 다음 시즌에 더 넓은 무대로 나가서 클럽을 더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날린 셈이며 더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잉글랜드로서는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 현대의 축구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또 하나의 팀이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마찬가지로 유러피언컵 참가 요청을 받습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지난 시즌과 똑같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이번에 우승을 차지한 팀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팀을 이끈 감독은 첼시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나섰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명문으로 만든 주인공 맷 버즈비 감독이었습니다.
1955/56시즌, 평균연령 22세의 1군 팀('버즈비의 아이들')을 이끌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버즈비 감독은 축구협회의 반대입장을 전해들은 직후 협회 및 UEFA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난 끝에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맨유의 유러피언컵 참가를 막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냅니다.
그리고 그는 곧 맨유 이사진 회의에 직접 참가해서 이사진들에게 "축구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만의 것이 아니며 미래는 저곳에 있다"는 말로 맨유 이사진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버즈비 감독의 결단과 맨유 이사진의 그에 대한 지지 덕분에 맨유는 유러피언컵에 출전한 첫 잉글랜드 팀이 됩니다.
4. 1956/57시즌, 레알 마드리드 VS 맨유(또는 스페인 VS 잉글랜드)
그렇게 유러피언컵에 참가한 맨유는 당시 맨시티 홈경기장 메인로드에서 열린 그들의 첫 '홈경기'(아직 올드트래포드에 조명시설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에서 벨기에의 명문 안더레흐트에 10-0 승리를 거두며 파죽지세로 4강전까지 진출합니다.그들의 4강전 상대는 다름아닌 유러피언컵 초대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였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대 맨유, 또는 스페인 최초의 유러피언컵 챔피언 대 잉글랜드 최초의 유러피언컵 참가 팀이 맞붙은 4강전에서 양팀은 양팀 팬들에게 현재도 최고의 레전드로 추앙 받는 디 스테파노와 보비 찰튼이 각각 자신의 홈경기에서 골을 터뜨린 가운데 합산스코어 5-3으로 4강전을 마칩니다.
두 팀의 4강전이 모두 끝난 후, 맨유의 버즈비 감독의 리더십에 반한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그에게 감독직을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맨체스터를 떠나서 마드리드로 오시죠? 파라다이스를 선물해드리겠습니다."
맷 버즈비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맨체스터가 저의 천국입니다."
결국 그렇게 맨유를 꺾고 다시 결승전에 진출한 레알 마드리드는 피오렌티나를 2대 0으로 꺾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합니다.
그 바로 다음 시즌, 맨유는 또 다시 4강전까지 순조롭게 진출하며 다시 한 번 유러피언컵 우승에 도전하는 듯 했으나 레드 스타 벨그라데와의 8강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비행기 급유를 위해 착륙했던 뮌헨에서 재이륙 과정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탑승객 중 대부분이 사망하고 1군 선수단 중 8명이 사망하는 '뮌헨 참사'를 당하며 그대로 유럽은 물론 잉글랜드 무대에서 한동안 멀어지게 됩니다.
5. 1960/61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연승행진을 끊어낸 운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
뮌헨 참사가 있던 1957/58시즌에도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는 이미 유럽 최고의 공격수였던 디 스테파노에 이어 1958년에 헝가리 출신의 전설적인 공격수 푸스카스(매년 시상하는 푸스카스 상이 바로 이 선수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입니다)까지 영입하며 결국 유러피언컵 5연패라는 아마도 다시는 반복되기 힘들 대업을 달성합니다.
그 정점을 찍었던 순간은, 1959/60시즌 레알 마드리드 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프루트의 결승전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햄든파크에서 펼쳐진 당시 결승전에는 12만 명이 넘는 팬들이 모여든 가운데(레인저스의 팬이었던 소년 시절의 알렉스 퍼거슨도 그 관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디 스테파노의 해트트릭과 페렌츠 푸스카스의 4골을 앞세워 프랑크프루트에 7-3 승리를 거뒀습니다.
정점에 이르고 나면 곧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 경기가 끝난 바로 다음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독주는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 세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운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였습니다.
1960년 11월 9일, 레알 마드리드 홈경기장에서 펼쳐진 레알 마드리드 대 바르셀로나의 경기에서는 유러피언컵의 초반 역사에서 큰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처음으로 유러피언컵 홈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경기 전까지 5시즌 동안 홈에서 10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행진을 막아낸 선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 또한 재미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 중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현재 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는 우루과이 출신의 공격수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루이스 수아레스였습니다.
수아레스의 두 골로 레알 마드리드와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친 바르셀로나는 2주 후 그들의 홈 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레알 마드리드를 유러피언컵에서 탈락시킨 최초의 팀이 됩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축구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을 결코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요소들이며 역으로 그런 요소들이 하나하나 모여 오늘날 그들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리그 최대 라이벌을 꺾은 바르셀로나는 기세 좋게 결승전까지 진출합니다. 그대로 그들이 우승을 차지했다면, 스페인이라는 ‘국가 차원’에서는 별로 손해 볼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를 꺾은 바르셀로나를 제압하며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팀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다른 한 나라이자 역사적으로는 한 때 스페인에 합병당하며 60여년간 지배권을 내주기도 했던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였습니다.
6. 1961/62시즌 에우제비오 VS 푸스카스
사진 3) 벤피카와 포르투갈의 영웅, 에우제비오
그렇게 유러피언컵의 두 번째 우승자가 된 벤피카와, 5시즌 동안 자신들의 것이었던 트로피를 잃어버린 레알 마드리드는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1961/62시즌 결승전에서 만납니다.
벤피카가 2연패에 성공하느냐, 레알 마드리드가 1시즌 만에 다시 왕좌를 되찾느냐가 걸린 맞대결, 양팀에는 유럽 축구사에 그 이름을 남긴 두 걸출한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오와 푸스카스가 있었습니다.
8강에서 유벤투스를 힘겹게 꺾고 올라온 레알 마드리드와, 4강에서 토트넘을 꺾고 결승에 올라온 벤피카는 1962년 5월 2일 암스테르담에서 불꽃 튀는 맞대결을 펼칩니다.
먼저 화력을 뽐낸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푸스카스. 그는 전반전에만 세 골을 터뜨리며 레알 마드리드에 3-2 리드를 안겨줬지만 벤피카의 '독수리'들 역시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후반전, 에우제비오는 두 골을 터뜨리며 팀의 5-3역전승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벤피카가 레알 마드리드를 물리치고 2연패를 거두며 장기집권을 하는 것 같던 시점에서 마침내 유럽 축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나라의 두 팀이 등장합니다. 밀라노를 연고로 하는 두 팀, AC 밀란과 인터 밀란입니다.
7. 이탈리아, 혹은 두 밀란의 등장
지금까지 살펴본 유러피언컵의 초기 역사에서 유러피언컵 트로피는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잠시 축구를 떠나 '세계사'로 지평을 넓혀보자면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스페인 여왕의 지원으로 항해에 나섰던 콜롬버스와 인도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가 열어젖힌 '대항해시대'의 최대 강국으로 군림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국가의 유러피언컵 독점은 체사레 말디니, 지아니 리베라, 조세 알타피니 등이 이끈 AC 밀란에 의해 막을 내립니다.
룩셈부르크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알타피니의 8골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며 기세 좋게 새 시즌을 시작한 AC 밀란은 그대로 결승까지 진출, 지난 시즌 챔피언이자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는 벤피카와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지난 시즌 결승전에서 후반전에 두 골을 기록하며 벤피카에 우승을 안겨줬던 에우제비오가 전반전에 선제골을 터뜨리며 벤피카의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듯 했으나, AC 밀란에는 리베라와 알타피니가 있었습니다. 알타피니는 결국 후반전에만 두 골을 터뜨리며 이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14골을 터뜨렸고, 그의 기록은 훗날 리오넬 메시가 동률을 이룬 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경신할 때까지 약 50년간 유러피언컵 역사의 최고 기록으로 남습니다.
1962/63시즌, AC 밀란에 의해 이탈리아로 넘어온 유러피언컵 트로피는 다음 2년 동안 같은 도시, 같은 나라, 같은 경기장에 남습니다.
1963/64시즌 이탈리아와 인터 밀란의 팬들이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레전드 중 한 명인 산드로 마졸라의 두 골로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인터 밀란은 바로 다음 시즌에는 또 하나의 유러피언컵 챔피언 벤피카를 1-0으로 꺾으며 그들이 결승전에서 꺾은 두 팀에 이어 세 번째로 유러피언컵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됩니다.
8. 셀틱의 우승과 맨유의 극적인 컴백
레알 마드리드가 6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1965/66시즌, 유러피언컵 전통의 강호 벤피카는 맨유의 조지 베스트라는 젊은 유망주에게 홈에서 전반 11분만에 두 골을 내준 뒤 1-5로 처절하게 무너지며 그대로 탈락합니다.
그 경기 후에 '그라운드의 비틀즈'(또는 '다섯번째 비틀즈')라는 별명을 얻은 베스트와 잉글랜드와 맨유의 영웅 보비 찰튼, 스코틀랜드가 낳은 최고의 골잡이 데니스 로를 앞세운 맨유는 그러나 바로 다음 경기에서 파르티잔에게 1-2로 허무하게 패하며 결승진출에 다시 한 번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합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결실을 맺게 됩니다.
파르티잔이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유러피언컵 3연패를 노리는 인터 밀란을 꺾고 결승에 올라온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는 파르티잔에 2-1승리를 거두며 결국 6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 유러피언컵 트로피는 마침내 유럽 대륙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주인공은 '축구 종가'를 자부하며 첫 시즌에 불참했던 잉글랜드가 아니라, 더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였습니다.
1966/67시즌,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명장 조크 스타인 감독은 리스본에서 열린 인터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10명의 글래스고 출신 선수들을 출전시키면서 지역 고유의 선수들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 셀틱에 유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팀이라는 영광을 안겨줍니다.
스타인 감독은 비록 국내의 축구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한국의 모든 축구팬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박지성을 맨유로 영입한 주인공이자 현대 축구팬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바로 스타인 감독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스타인 감독이 남긴 한마디가 퍼거슨 감독이 맨유 감독에 부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타인 감독은 내게 그가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말했다. 내게 그 기회가 왔을 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알렉스 퍼거슨 감독)
그리고, 1967/68시즌, 꼭 10년 전에 뮌헨 참사를 당하며 대다수의 축구전문가들로부터 팀이 그대로 무너질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맷 버즈비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과 리빌딩으로 인해 10년 전 버즈비 감독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던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드디어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합니다. 그들의 첫 결승전 상대는, 일찍이 조지 베스트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바 있었던 벤피카였습니다.
1968년 5월 29일,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 구장에서 열린 두 팀간의 결승전에서 처음 골망을 가른 것은 뮌헨 참사의 생존자인 보비 찰튼이었습니다.
뮌헨 참사 발생 후 10년만에 결승에 오른 맨유의 첫 골을 그 생존자인 찰튼이 터뜨리는 상징적인 순간, 웸블리 구장에 모여든 수많은 팬들이 승리를 예감했지만 벤피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후반 34분 그라차의 골로 결국 1-1로 쫓아왔고 정규시간은 그대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연장전, 등번호 7번 유니폼을 입은, 수년 전 혼자의 힘으로 벤피카를 격파했던 조지 베스트는 골키퍼로부터 이어진 롱볼을 이어받아 벤피카 골키퍼를 완전히 제치고 텅 빈 골문에 결승골을 성공시킵니다. 그 순간, 이미 승기는 맨유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그들은 찰튼과 브라이언 키드가 추가골까지 터뜨린 끝에 4-1 대승을 거두며 마침내 대망의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립니다.
사진 4) 1967/68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맨유. 맷 버즈비 감독의 좌우로 앉아있는 것이 보비 찰튼(좌)과 데니스 로, 버즈비 감독 뒤의 검은 머리를 한 선수가 조지 베스트.
9. 1970~76년, 네덜란드와 독일의 등장(페예노르트, 아약스, 뮌헨)
사진 5) 1970년대 유럽 축구 최고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우어
뮌헨참사를 극복하고 맨유를 잉글랜드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팀으로 만든 맷 버즈비 감독은 그로부터 얼마 가지 않아 은퇴를 선언했고, 맨유는 그가 떠난 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리그 우승도, 유러피언컵 우승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1968/69시즌, 4강전에서 맨유를 꺾은 AC 밀란은 결승전에서 4-1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두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결승전의 상대는 곧 이어질 1970년대에 유럽 축구를 혁신하며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유러피언컵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두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이끈 두 개의 명문팀 아약스와 바이에른 뮌헨에 의해 양분됐습니다. 그러나, 각각 나란히 3년씩 연속 우승을 차지한 두 팀에 앞서서 1969/70시즌에 우승을 차지한 팀이자 네덜란드 최초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팀은 아약스가 아닌 페예노르트였습니다.
1969/70시즌, 오스트리아 출신의 명장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 이끈 페예노르트는 역시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명장 조크 스타인 감독이 이끈 셀틱과 결승전에서 만났습니다. 스타 선수들의 활약보다는 감독간의 지략대결이 눈부셨던 그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는 결국 이미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던 셀틱을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하펠 감독은 이 시즌에 페예노르트에 현재까지도 유일한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안겼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13년 후 함부르크를 이끌고도 그들의 최초이자 유일한 대회 우승을 이끌며 유럽 축구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한명으로 존경 받고 있습니다.
하펠 감독의 리더십 덕분에 페예노르트가 네덜란드로 가져온 유럽 축구의 왕좌는 바로 다음 시즌부터 아약스로 이어졌습니다. 요한 크루이프라는 유럽 축구 역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토탈사커'라는 새로운 축구 철학을 앞세운 아약스는 1970/71시즌부터 차례로 파나타이코스, 인터 밀란, 유벤투스를 결승전에서 격파하며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약스는 3번의 결승전에서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으며, 요한 크루이프는 인터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홀로 두 골을 터뜨리며 팀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습니다.
아약스에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다면, 바이에른 뮌헨에는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뮌헨에는 베켄바우어를 중심으로 게르트 뮐러와 울리 회네스, 제프 마이어와 파울 브라이트너 등 1974년 독일 국가대표팀에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3/74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결승전 재경기에서 뮐러와 회네스의 두골씩에 힘입어 처음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바이에른 뮌헨은 다음 시즌에는 1960~70년대에 구단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보낸 리즈 유나이티드에 2-0 승리, 1975/76시즌에는 프란츠 로스의 프리킥골로 생테티엔에 1-0 승리를 거두며 3년 연속 우승을 완성합니다.
10. 1976~1984년, 잉글랜드의 황금시대
사진 6) 리버풀과 잉글랜드의 황금기를 연 주역 케빈 키건
레알 마드리드, 벤피카, AC 밀란, 인터 밀란, 셀틱, 페예노르트, 아약스, 바이에른 뮌헨.
8개의 클럽이 유러피언컵 우승 타이틀을 들어올리고, 특히 그 중에서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클럽들이 주도권을 잡는 동안 맨유의 1회 우승에 그치며 자존심을 구긴 잉글랜드 축구는 1970년대 후반 들어 마침내 그 황금시대를 화려하게 열어젖힙니다.
그 주인공은 현대의 축구팬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클럽이지만, 그들의 첫 우승의 주역이 됐던 인물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현재도 과소평가 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1976/77시즌, 잉글랜드의 최다 유러피언컵 우승팀인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를 만나 3-1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의 영광의 서막을 엽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수는 다름 아닌 케빈 키건이었습니다.
1978, 79 두 시즌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한 키건은 자신이 리버풀 선수로서 뛴 마지막 경기였던 1976/77시즌 결승전에서 본인이 직접 득점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리버풀의 공격을 이끌며 팀에 첫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채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로 이적합니다.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팀을 떠난 케빈 키건을 대체하기 위해 리버풀이 영입한 선수가 다름 아닌 훗날 리버풀의 '킹'으로 불리게 되는 케니 달글리쉬입니다. 그는 곧바로 키건의 빈 자리를 메우며 리버풀에서 보낸 자신의 첫 시즌, 첫 유러피언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의 1-0 승리를 이끕니다.
케빈 키건, 케니 달글리쉬의 맹활약(비록 그 둘이 같이 뛰지는 않았지만)과 명장 밥 페이슬리 감독의 지휘 아래 2년 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리버풀은 곧 그 바통을 같은 잉글랜드 출신의 다른 팀에게 건네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팀이 바로 유러피언컵 역사상 가장 동화 같은 우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노팅엄 포레스트입니다.
1978년 9월 13일, 1978/79시즌 1라운드에서 2년 연속 유러피언컵 챔피언인 리버풀을 합산스코어 2-0으로 꺾으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노팅엄 포레스트는 그대로 결승까지 진출, 스웨덴 명문 말뫼를 1-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다음 시즌 결승에서 2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이 출전한 함부르크를 만난 노팅엄 포레스트는 존 로버트슨의 선제골과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문장으로 손꼽히는 피터 쉴튼의 철벽 같은 방어 덕분에 결국 1-0 승리를 거두며 2년 연속 유러피언컵 챔피언이 됐습니다.
그 두 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를 이끈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은 자신이 부임했던 1975년 당시 2부 리그 중위권이었던 노팅엄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후 곧바로 1부 리그 우승을 이끈 데 이어 유럽 최고의 무대를 2년 연속 제패한 공으로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출신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1부 리그 우승 경험이 단 1회 뿐인 노팅엄 포레스트는 리그 우승 횟수보다 유러피언컵 우승 횟수가 많은 클럽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팀으로 남게 됐습니다.
사진 7) 2부 리그에 있던 노팅엄 포레스트를 이끌고 1부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2년 연속 우승을 이끈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 그를 기념하는 팬들.
다음 시즌인 1980/81시즌, 밥 페이슬리 감독은 리버풀을 이끌고 준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각각 격파하며 자신과 리버풀의 세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했고, 1981/82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보다는 '덜 놀랍지만', 여전히 놀랍게도 잉글랜드 풋볼리그 창립초기부터 강팀으로 이름을 날린 아스톤 빌라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으며 잉글랜드 클럽의 6년 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11. 1985년, 헤이젤 참사와 잉글랜드의 몰락
잉글랜드의 6년 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유러피언컵에서 강세를 보이던 함부르크에 의해 끝을 맺습니다. 함부르크는 현대 축구팬들에겐 감독으로 더 익숙한 펠릭스 마가트의 결승골에 힘입어 그 해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미셸 플라티니가 이끈 유벤투스를 꺾고 그들의 첫 유러피언컵 트로피를 들어올립니다.
1983/84시즌은 처음으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승부차기로 결정된 시즌이었으며, 그 시즌의 우승자는 다시 한 번 리버풀이었습니다. 승부차기 끝에 AS 로마를 4-2로 꺾으며 리버풀이 트로피를 되찾아올 때만 해도, 잉글랜드의 팬들은 그들이 마침내 가져온 축구의 종가라는 자부심이 그대로 영영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시즌인 1984/85시즌 결승전에서, 축구계 최악의 비극인 동시에 잉글랜드 축구계에 치명타가 된 헤이젤 참사가 발생합니다.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오른 리버풀은,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당대 유럽 최고의 선수이자 그 해 3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미셸 플라티니의 유벤투스와 결승전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팀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일부 리버풀 훌리건들의 난동을 피해 도망치려던 팬 중 39명이 그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벽에 깔려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잉글랜드는 그 즉시 모든 유럽대륙간 경기에 5년간(리버풀은 7년) 출전할 수 없다는 중징계를 받게 됩니다. 리버풀이 열어젖힌 잉글랜드의 황금기가 리버풀의 일부 훌리건들에 의해 막을 내리는 안타까운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잉글랜드가 다시 유럽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 14년 후인 1998/99시즌에 잉글랜드로 영광을 가져오는 퍼거슨 감독의 맨유는 그 후로 머지 않아 리버풀로부터 잉글랜드 리그 최다 우승 타이틀마저 가져오게 됩니다.
사진 8) 헤이젤 참사를 추모하고 있는 유벤투스와 리버풀의 레전드 미셸 플라티니(좌), 이안 러시
12. 1985년~1990년, 패권이동 양상의 변화와 사키의 AC 밀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8시즌 중 7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한 잉글랜드의 모든 팀들이 유러피언컵 참가가 금지된 바로 그 시점부터, 유러피언컵은 분명히 그 전과 달라진 양상으로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의 유러피언컵 우승팀 또는 국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곳에는 분명히 아래와 같은 일정한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스페인(레알 마드리드) -> 포르투갈(벤피카) -> 이탈리아(AC 밀란/인터 밀란) -> 영국(스코틀랜드 + 잉글랜드 : 셀틱과 맨유) -> 네덜란드(페예노르트와 아약스) -> 독일(바이에른 뮌헨) -> 잉글랜드(리버풀, 노팅엄 포레스트, 아스톤 빌라).
위 진행방향을 살펴보면 그 사이사이에 예외의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1965/66시즌의 레알 마드리드, 1968/69시즌의 AC 밀란 등), 유러피언컵의 향방은 분명히 일정한 흐름을 타고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양상을 띄었습니다.
그러나, 정점에 있던 잉글랜드가 갑자기 사라진 뒤로, 유러피언컵은 더 이상 일정한 흐름대로가 아니라 예상하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헤이젤 참사가 벌어진 그 시즌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유벤투스를 시작으로 그 이후로 4시즌간 우승을 차지한 팀들은 모두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팀들이었습니다.
1985/86시즌 루마니아의 스테우아는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바르셀로나의 4번의 페널티킥을 모두 막아낸 골키퍼 헬무트 두카담의 눈부신 활약으로 동유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팀이 됩니다.
1986/87시즌에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포르투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으며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7/88시즌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아인트호벤이 승부차기 끝에 벤피카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셀틱, 아약스에 이어 유럽에서 세번째로 트레블을 달성한 팀이 됩니다.
그렇게 전과 다르게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유러피언컵에서 마지막으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주인공은 1980년대 말에 명장 아리고 사키 감독이 이끈 AC 밀란이었습니다.
1988/89시즌, AC 밀란의 전설적인 '오렌지 삼총사' 중 두 명인 반 바스텐과 루드 굴리트의 골에 힘입어 스테우아를 4-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한 AC 밀란은 그 다음 시즌에는 삼총사 중 다른 한 선수인 레이카르트의 결승골로 벤피카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합니다.
사진 9) AC 밀란과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함께 활약한 '오렌지 삼총사' 굴리트(좌), 레이카르트(가운데), 반 바스텐
13. 1992년~1999년, 바르셀로나의 첫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시대의 개막
AC 밀란이 마지막(현시점까지)으로 2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된 직후 세르비아의 명문 레드 스타 벨그라데가 승부차기 끝에 마르세이유를 꺾고 깜짝 우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날 결승전에서 패한 마르세이유는 그로부터 2시즌 후 이름을 유러피언컵에서 챔피언스리그로 개명한 후에 가진 첫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 됩니다.
레드 스타 벨그라데와 마르세이유의 우승 사이에서 1991/92시즌, 유러피언컵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마지막 대회의 우승 트로피는 마침내 현대 축구팬들에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단골손님으로 익숙한 이름인 바르셀로나에게 돌아갑니다.
아약스 시절 선수로서 팀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으로서 지휘한 바르셀로나는 현재 사우스햄튼의 감독을 맡고 있는 로날드 쿠만의 프리킥 골로 삼프도리아에 1-0 승리를 거두며 오랜 유러피언컵 우승 도전의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크루이프 감독의 바르셀로나는 그 후로 우승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 팀이 가지고 있던 철학과 정신은 그 후에 라마시아 출신이자 그 결승전에 주장으로서 출전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과르디올라에게 전승되어 훗날 다시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끝으로 '유러피언컵'이라는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챔피언스리그'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로부터 현재까지의 20여년은 아직 우리가 한마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엔 아직 지난 시간이 너무 짧으며, 유러피언컵 초기 역사와 같은 '절대강자'도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챔피언스리그라는 이름으로 리그가 개편된 이후의 챔피언스리그의 특징은 '절대강자가 사라진 혼전의 시대'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양상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뚜렷해집니다.
1990년대에 챔피언스리그에서 다른 리그나 국가의 팀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강세를 보인 것은 세리에A의 클럽들이었습니다.
1991/92시즌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패한 삼프도리아를 시작으로 1997/98시즌 유벤투스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에서 패할 때까지 그들은(삼프도리아, AC밀란, 유벤투스) 7시즌 연속 결승전에 진출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상대가 누구고 우승자가 누구이건 간에 결승전에는 반드시 이탈리아의 팀이 있었던 셈입니다.
1998/99시즌, 퍼거슨 감독의 맨유가 트레블을 달성하며 구단으로서는 31년만이자 헤이젤참사 후 첫 잉글랜드 클럽의 우승을 이끈 직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챔피언스리그는 매년 누가 패권을 잡을지 알 수 없는 완벽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듭니다.
14. 2000년~현재, 새로 시작되는 2015/16시즌과 챔피언들의 '네버엔딩스토리'
'챔피언스리그'라는 이름으로 대회명을 개명한 이후 대회에서 최다우승을 차지한 팀은 스페인의 두 거함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입니다.(4회씩) 그 과정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10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그 이전까지 우승횟수가 1회에 불과했던 바르셀로나는 5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레알 마드리드, AC 밀란에 이어 세 번째로 우승횟수가 많은 팀이 됐습니다.(바이에른 뮌헨과 동률)
2000년대 이후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장면들은 우리 국내 축구팬 분들에게도 익숙한 것들입니다.
지네딘 지단의 아름다운 발리슈팅으로 우승을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2001/02시즌), AC 밀란 대 유벤투스의 승부차기에서 부폰을 상대로 우승을 확정짓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셰브첸코(2002/03시즌), 2006/07시즌까지 자신의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가 같은 팀에서 들어올렸던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스스로 다섯차례나 들어올린 파올로 말디니.
사진 10) AC 밀란 선수로 나란히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부자 체사레 말디니(좌), 파올로 말디니
포르투를 이끌고 깜짝 우승을 달성한 무리뉴 감독(2003/04시즌), 0-3으로 뒤지고 있다가 3-3으로 따라붙어 '이스탄불의 기적'을 달성한 리버풀(2004/2005시즌), 존 테리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눈앞에서 날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드록바가 완성해낸 첼시(2011/12시즌), 그리고 2010년이후로 매년 펼쳐지고 있는 메시(바르셀로나)와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의 우승 및 득점왕 경쟁과 다시 한 번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른 바이에른 뮌헨까지.
이번 칼럼에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린 이야기는 챔피언스리그 60년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들에 불과합니다. 그 긴 승부의 역사속에는 훨씬 더 많고 디테일한 사연들이 숨어있으며 그런 하나하나의 스토리들은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축구팬들이 매년 열광하는 챔피언스리그의 토대를 만들어왔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되는 2015/16시즌 챔피언스리그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까요?
과연 이번 시즌에는 아리고 사키 감독의 AC 밀란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우승하는 팀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또는 2011/12시즌 첼시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팀이 나올 수 있을까요? 매시즌 16강에 진출하지만 아직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는 아스널은 과연 아르센 벵거 감독의 재임기간 중에 첫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위 질문 중 우리가 답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 대신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챔피언스리그는 1953/54시즌 잉글랜드 1부 리그 챔피언이었던 울버햄튼과 그들에 대한 데일리메일의 기사 제목에서 영감을 받은 프랑스의 르퀴프지 편집장 가브리엘 아노의 제안에서 시작됐습니다.
그 후로 60년간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낳으며 이어져온 챔피언스리그와 그와 함께 살아 숨쉬는 수많은 레전드들과 명장들의 '네버엔딩스토리'는 바로 오늘 새벽 경기에서 다시 시작되어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글. 네이버 칼럼니스트 이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