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World

[한준 이슈] 레전드 그 이상, 축구는 크라위프 전후로 나뉜다

youngsports 2016. 3. 25. 13:42

[한준 이슈] 레전드 그 이상, 축구는 크라위프 전후로 나뉜다


축구계는 크라위프와 같은 '이상주의자'가 필요하다

크루이프-95010818s.jpg

항상 축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던 크라위프


지난 한 주 동안 세계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한 인물은 꽤 오랫동안 현장에서 떠나 있던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요한 크라위프(68)였다. 스페인 라디오 방송 ‘엘 몬 아 RAC1’이 20일 크라위프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보도했고, 22일 최종적으로 그의 폐암 투병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이 기간 세계 유력 언론이 크라위프가 축구 역사에 갖는 상징성을 칭송했다.

 

크라위프는 자신이 정기적으로 컬럼을 기고하는 네덜란드 신문 ‘더 텔레흐라프’를 통해 “사실 내게 언론은 과중한 짐과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수 많은 미디어가 나의 상황에 보여준 반응에 감동했고, 가슴이 따뜻해졌다”고 밝혔다. 늘 거침없고, 단호하며, 냉철한 독설로 ‘이상주의’를 설파하던 크라위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이었다.

 

다소 과할 정도로 자신의 축구적 이상을 밀어붙이는 크라위프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를 잃을 수 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두가 그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경기력이 수반되지 않은 결과는 가치가 없다. 경기력 없이 얻는 결과는 지루하다”고 말했던 크라위프의 이상은 ‘고집불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고집으로 인해 축구는 ‘혁신’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서력을 기준으로 한다. 서력에 다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아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누어 해를 헤아리고 있다. 인류 사회의 기술적 진보는 1차적으로 산업사회를 가속화시킨 헨리 포드를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은 스마트폰의 시대를 연 스티브 잡스를 ‘기원’으로 삼는다. 잡스는 이 시대의 혁신의 아이콘이다. 축구계에선 크라위프가 바로 그런 존재다.


IMG_7329.jpg

 기자가 직접 만났던 크라위프. 카메라 정면을 익살스럽게 응시하며 화려한 연변을 자랑했다.


크라위프, 축구의 지적 진보를 이끈 혁명가


축구사는 크라위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C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 일명 ‘티키타카’로 불리는 스타일로 세계 축구를 정복한 배경에는 크라위프이즘이 있다. 크라위프가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남긴 수 많은 발언은 진보한 현대 축구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공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공을 가져야 한다. 공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볼 점유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공을 소유해야 공격할 수 있다. 공을 소유한다면 상대의 공격을 허용 할리 없다. 크라위프는 “우리가 공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는 득점할 수 없다”는 매우 단순한 진리를 통해 자신 만의 방법론을 구축했다. 개인 드리블을 중시했고, 거친 몸싸움을 용인했던 초기 축구는 규정 변화와 전술 발전 속에 점점 더 수비적으로 변해왔다. 그 흐름을 공격으로 돌려 놓은 이가 크라위프다.

 

공 소유력을 중시하면서 크라위프는 발로 공을 차는 것이 기본 사항인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신장이나 몸집과 같은 신체 조건, 주력이나 순발력과 같은 운동 능력, 심지어 공을 다루는 기술 보다 공을 운반하는 타이밍과 루트를 결정하는 판단력, 즉 선수의 지능적 요소를 강조했다. 축구라는 스포츠의 지적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데 주력한 것이다.


크라위프는 "스피드가 무엇인가? 스포츠 신문은 스피드라는 것을 통찰하는 데 있어서 혼동하는 것 같다. 보라. 내가 나머지 사람들보다 조금만 먼저 뛰기 시작하면 내가 더 빠른 선수인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물리적 스피드를 이길 수 있는 축구 지능의 힘을 말했다. 크라위프는 현연 선수 시절 놀라운 가속력을 통한 돌파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 자신은 비결을 신체 능력 보다 판단력으로 설명했다.

 

공을 다루는 기술 역시 창조적 사고력과 영리한 판단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기술이란 저글링을 1000개씩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연습하면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서커스단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단 한 번의 터치로 패스를 하는 것이다. 적절한 스피드로 당신의 동료가 받기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것이 기술이다."


동료의 발 1미터 앞 공간에 떨궈주는 패스를 통해 경기 템포 상승, 상대에 수적 열세를 야기할 수 밖에 없는 횡패스 금지 지시 등 현대 축구에서는 매우 당연시 되는 요소들을 먼저 설파하고 시류를 만든 것이 크라위프다. 크라위프는 늘 생각하는 축구를 지향했고, 모든 플레이에 대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또 전했다. 이를 통해 팀 전체를 지적으로 만들었다.

 

크라위프는 “축구는 실수를 가장 적게 하는 이가 승리하는 경기”라고 했는데, 속임수에 능했던 크라위프는 실수 조차 이용했다. "내 스스로 실수를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난 실수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자화자찬인 동시에 자녀들과 게임을 할 때도 이기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는 그의 승부 접근법을 담고 있다.


크루이프-1266332s.jpg

 크라위프는 누구보다 생각의 속도가 빨랐던 선수다.


크라위프는 "내 팀에서 골키퍼는 첫 번째 공격수이고, 스트라이커는 첫 번째 수비수다"라고 했다. 피치 위의 선수를 포지션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전원의 멀티 플레이어화를 추구했다. FC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던 마지막 시즌에는 훈련장에서 수비수에게 골키퍼 장갑을 끼도록 하는 실험을 벌이기도 했다. 골키퍼 라인에서의 빌드업 능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에서다. 이를 통해 선수들을 향한 기술적 요구는 더 높아졌다.


크라위프가 올스타팀의 ‘불용론’을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각자 포지션에 특화된 최고의 선수가 아닌, 전체 팀으로 하나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팀이야 말로 강하다는 것이다. "각 포지션별로 최고의 선수를 골라고 가장 강한 베스트11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11명의 선수로 가장 강한 하나의 팀을 만들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위프는 돈으로 승리를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은 팀을 왜 이기지 못하나? 난 골을 만들 수 있는 돈가방은 본 적이 없다." 축구 팀은 오직 하나의 팀으로 전원이 서로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유기체처럼 기능할 때 가장 강하다. 물론 그 11명의 선수가 크라위프가 원하는 수준의 기술력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가장 단순한 축구를 위한 가장 어려운 고민


그렇기 때문에 크라위프의 방법론은 전 세계 모든 팀에게 적용되기 어렵다. 크라위프 스스로도 그 어려움을 인정했다. “축구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축구를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설파하는 축구 이론은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 당연하고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외면하고, 쉬운 길을 택한다면, 발전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의 시각을 도용하기 보다는, 나만의 시각으로 패배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한 크라위프는 그 어려운 미션에 도전한 인물이다.

 

공격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공격 전술을 구축하는 것은 그래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수비 전술을 만드는 것 보다 어렵다. 골을 넣는 것은 골을 먹히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창조적인 사고와 더불어 고도의 정밀함을 요한다. 실점에 대한 위험 요소도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크라위프의 승리 방정식은 “언제나 상대보다 한 골을 더 터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크라위프의 팀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을 이뤘고, 1992년에는 바르사의 창단 후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다. 크라위프 스타일이 세계 축구를 지배했다. 누구도 그 방식을 감히 따라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한 세대의 팀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영구불멸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는 아약스와 바르사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기초를 만든 이가 크라위프다. 


크루이프-1228573s.jpg

짧은 기간 불꽃 같은 시간을 보낸 지도자 크라위프


그러나 지도자로 크라위프의 전성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불리함에는 각각의 유리함이 있다”는 말로 그 어떤 조건도 ‘완벽함’을 담보할 수 없다고 했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총 8년 동안 바르사의 역대 최장기 집권 감독으로 재임한 크라위프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바르사 감독으로 총 11개의 트로피를 들었지만, 1994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AC밀란에 0-4 참패를 당했고, 그 뒤로 두 시즌 동안 주요 대회 무관에 그쳐 사임했다. 2009년 비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카탈루냐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기까지 그는 일선을 떠났다.

 

크라위프는 1970년에 선수로 전성기를 보냈고, 1990년대에 지도자로 황금기를 보냈다. 선수와 감독 모두로 시대를 뒤흔들만한 성공을 이룬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아약스와 네덜란드에서 ‘토털풋볼’의 부흥을 이끈 크라위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그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20년이 지나 그의 축구가 세계를 정복하는 모습을 야인의 자리에서 목격했다. 영국이 축구를 만들고, 브라질이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크라위프야 말로 축구를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스포츠로 바꿔 놓은 혁명가일 것이다.


바르사, 크라위프, 과르디올라 그리고 리더십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끈 바르사는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14개의 우승컵을 들었다. UEFA챔피언스리그만 두 차례 더 우승하며 역대 최고의 팀으로 불렸다. 그 이전에 바르사 지휘봉을 잡았던 네덜란드 출신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도 크라위프의 지지를 받은 감독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레이카르트 감독이 남긴 유산에 크라위프 스타일을 더 강하게 적용해 대업을 이뤘다. 지금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는 과르디올라 감독은 “바르사라는 대성당을 지은 이는 크라위프다. 그 후임 감독의 역할은 그저 이를 보수하고 발전시킨 것뿐이다. 영광스러운 바르사의 플레이는 크라위프 축구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했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와 바르사에 매우 결정적인 존재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그리 빠르지도 않았던 미드필더 과르디올라는 볼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고, 그 볼을 언제 어디로 보내야 하는 지에 대해 잘 아는 선수였다. 바르사B팀에서 과르디올라에게 주어진 역할은 오른쪽 미드필더였지만, 크라위프는 당시 바르사B 감독이었던 카를라스 레샤크에게 수비 라인 앞의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시켰고, 빠르게 1군으로 끌어 올려 팀 플레이의 중심으로 삼았다.


크라위프 자신도 그런 선수였다. 모든 선수들이 자동적으로 역할을 바꿔가며 능동적인 축구를 하기를 바랐지만,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령탑의 존재는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탁월한 공격 능력과 득점 능력에도 전방 보다 중원, 중원 보다 후방으로 내려가 경기 전체를 리드하는 임무를 즐겼다. 크라위프 축구의 리더는 중원에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내다보고, 조정한다. 크라위프는 이러한 마에스트로가 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동료들이 실수를 벌인 뒤 질책하는 선수는 진짜 리더가 아니다. 진짜 리더는 피치 위에서 다른 선수들이 실수를 범할 것마저도 이미 알아 차리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 시대에 펼친 놀라운 경기 영향력과 상징성을 통해 바르사의 중앙 미드필더 교과서가 됐다. 그라운드 위의 감독은 곧 좋은 감독이 될 재목이다.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의 길을 걷고 있다.


과르디올라의 등장 이후 차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등 중원에서 공을 관리하며 경기를 조율하는 선수가 꾸준히 배출될 수 있었다. 크라위프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하는 리오넬 메시의 진화 과정도 이와 같다. 공을 쥐고 드리블하기를 즐겼던 아르헨티나 소년은 점차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크라위프는 이상적인 축구를 꿈꾸지만, 결코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메시에게 충분한 연봉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는 떠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편도 아니다. 그의 관점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다. 바르사의 경기력과 운영 방식에 지독한 독설을 퍼붓기도 서슴지 않는다. 조국 네덜란드의 축구에 대해서도 그렇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0-1로 패하며 1978년 이후 무려 32년 만에 준우승을 차지한 네덜란드 대표팀을 향해 “결승전 경기 내내 추하고 천박하며 형편없었다. 끔찍하고 슬플 정도로 지저분한 안티 풋볼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외로운 영웅, 초월적 레전드


크라위프는 “기회는 논리적”이라고 했다. 모든 상황에 대해 ‘왜’와 ‘어떻게’를 생각하는 크라위프는 축구계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이 됐다. 자신의 전성시대를 연 아약스에서 토탈풋볼을 함께 창시한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종국에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결별했다. 자신이 함께 성장 시킨 동료 선수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주장직에서 내려온 것이 바르사 이적의 단초였다.

 

선수 시절에서 돈을 따라 다닌다는 지적에 네덜란드 팬들로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바르사 내에서도 회장 선거를 둘러싼 정치 게임 속에 잠시 명예 회장직에 올랐다가 물러났다. 친정팀 아약스에서 맡은 기술 고문 역할도 오래 하지 못했다. 바르사 지휘봉을 내려 놓은 이후 크라위프는 정처 없는 생활을 해왔다. 그의 소속은 그냥 크라위프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안 좋은 것이죠. 사사건건 다른 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들게 되거든요.” 크라위프의 참견과 독설은 그렇게 결국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크라위프가 축구에 끼친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경력 내내 대립각을 세운 주제 무리뉴 마저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2009년 겨울, 기자는 카탈루냐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바르셀로나에서 가진 기자회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유럽의 고고한 취재진 조차 회견이 끝난 뒤 크라위프에게 달려가 사인을 요청했다.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를 매주 목격하는 스페인 현지 취재진에게도 크라위프는 초월적인 영웅으로 숭배를 받고 있었다.

IMG_7398.jpg

스페인 취재진에게 사인을 해준 크라위프


실제 크라위프의 회견에서 느낀 분위기는 ‘냉랭함’보다 유머였다. 글로 옮기면 거칠 수 있는 거의 언사는 특유의 너스레와 블랙 유머, 그리고 웃음이 결합되어 한 편의 토크쇼처럼 보였다. 크라위프는 그의 복잡한 비유법과 표현에 대해 “당신을 이해시키고자 했다면 더 나은 설명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 언론을 불신했고,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 사이 쌓인 오해의 불순물이 크라위프라는 인물에 부정적 이미지를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위프라는 인물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았다. 크라위프를 잃는 것은 단지 한명의 추억의 스타를 잃는 슬픔의 문제가 아니다. 크라위프의 독설은 전술적 게으름에 빠지고, 결과와 효율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지루하고 손쉬운 선택을 내리려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크라위프의 방식 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크라위프가 없다면 아마도 축구는 훨씬 더 지루한 스포츠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축구계은 아직 크라위프가 필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도 바르셀로나에서 건축 중인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크라위프가 꿈꾼 축구 대성당은 계속해서 산통을 겪으며 더 웅장한 건물로 지어지고 있다. 투병 중인 사실을 떠나서도, 크라위프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크라위프의 이상은 영원 해야 한다. 그가 남긴 말 하나 하나는 이미 현대 축구의 바이블이 되었다. 크라위프가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겨 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기도한다.


바르사를 수식하는 말이 ‘클럽 그 이상’이라면, 크라위프는 한 명의 축구 레전드 그 이상이다. 어쩌면 그는 축구 그 자체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말했듯, 그의 뒤를 이을 감독, 나아가 모든 축구인들의 임무는 그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글=한준 (풋볼리스트 기자, 스카이스포츠 축구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