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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엄마' 김혜자씨, "꽃다운 아이들을 죽이고도 정신 못차리면 정말 가망이 없잖아요…"

youngsports 2014. 5. 25. 18:23


[단독 인터뷰]'국민엄마' 김혜자씨, "꽃다운 아이들을 죽이고도 정신 못차리면 정말 가망이 없잖아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40일이 다 되어 간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안긴 충격과 분노, 슬픔, 트라우마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배우 김혜자(72)를 떠올린 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는 ‘국민 엄마’로 불린다.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그대 그리고 나> <마더> <엄마가 뿔났다>…. 53년 간의 배우인생 동안, 작품 속 그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때로는 악착 떠는 ‘한국의 어머니’ 였다. 그에겐 103명의 아이들이 있다. 24년 전 부터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매년 한 두차례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을 입양, 돌보고 있다.

그가 세월호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자식을 바다에 둔 엄마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요. 그저, 그 엄마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리고 옆에 가만히 같이 있어주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요.”

경향신문은 지난 20일 그가 지난 10개월간 “빠져 지냈다”는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오스카)가 공연 중인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그를 만났다. 연극 이야기로 시작한 이날 인터뷰는 세월호 참사, 연기자로서의 삶, 아프리카에서 만난 인연 등을 넘나들며 1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출연중인 배우 김혜자씨./ 서성일 기자



<오스카>는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열살 소년 오스카와 소아병동의 간병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미 할머니가 주고 받는 삶과 죽음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다. 김씨는 110분의 공연시간 동안 오스카와 장미 할머니, 오스카의 엄마, 친구들 등 1인11역을 홀로 소화하며 관객을 울리고 웃긴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로 다들 힘든 시기에 이 작품이 작은 위안나마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며 공연 중 장미 할머니와 오스카가 나누는 대화 한토막을 소개했다.

“할머니가 오스카에게 말하죠. ‘산다는 건 늘 고통의 연속이지. 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이 두 가지 고통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단다. 육체적 고통은 누구나 다 겪는 것이지만 정신적 고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겪을 수도 겪지 않을 수도 있단다’라고…”

순간, 그의 눈이 젖었다. 목소리도 흔들렸다. 잠시 감정을 고르고 난 후 그는 ‘휴…’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아이들도 마지막 순간, 엄마 아빠 생각이 단 1초라도 스치지 않았을까요? 내가 죽었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대사를 할 때마다 되게 되게 마음이 아파요. 자꾸 눈물이 나요.”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출연중인 배우 김혜자씨./ 서성일 기자



김씨는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을 방치한 채 저만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들을 구하느라 자기 목숨을 버린 분들도 계시잖아요. 패배주의에 매몰되기 보다는, 또 누구를 탓하는 데 급급하기 보다는, 그런 의로운 분들에게 희망을 갖고,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다운 많은 아이들을 죽이고도 반성을 안 하고 정신을 못 차리면 정말 가망이 없는 거잖아요.”

김씨는“이번 공연이 끝나면 또 아프리카로 아이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극중 김씨가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직접 부르는 에디뜨 피아프의 샹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도 들을 수 있는 <오스카>는 내달 15일까지 공연된다.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출연중인 배우 김혜자씨./ 서성일 기자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2006년 연극 <다우트> 이후 6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죠. 110분 동안 혼자 1인11역을 소화해내야 하는 모노드라마 연기는 젊은 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출연 제안을 받으면서 원작인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의 소설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어요. ‘참, 대단한 작품이구나’ 생각했지요. 죽음을 앞둔 열살 소년의 천진한 질문을 통해 우리 인간이 살면서 품는 의문과 유한한 삶의 과정을 말하니까요. 특히 오스카가 장미 할머니에게 ‘하느님은 왜 우리처럼 아픈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라고 묻는 대목이 너무도 절박하게 느껴졌어요. 저 또한 처참한 환경에 처한 수많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봐오면서 끊임없이 신께 했던 질문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모노드라마를 하는게 힘든 일이지만 ‘난, 할 거야’라고 마음 먹었어요.”

-미세한 표정과 몸짓, 말투의 변화만으로 장미 할머니에서 열살의 오스카로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이 인상적이예요.

“제가 무슨 짓을 한들, 열살처럼 보이겠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장미할머니보다 오스카에 제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좀 천둥벌거숭이 같거든요. 그렇다보니 오스카를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표정, 몸짓이 따라온 것 같아요.”


-체력적으로 힘드시죠.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누가 저더러 그래요. ‘대책 없는 정신력’이라고. ‘그러면 안 되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그래서 이 연극을 하면서부터 공연이 없는 월요일마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영양제 링거를 맞아요. 생전 처음 보약도 지어 먹고 있고요. 더블 캐스팅(주요 배역에 두 배우를 동시 캐스팅해 공연하는 방식)도 아닌데 제가 아프면 연극이 막을 내려야 하니까요.”

-이 작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관조가 담겨 있어요. 손꼽고 싶은 대사는 어떤 것인가요.

“할머니가 오스카에게 말하죠. ‘산다는 건 늘 고통의 연속이지. 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이 두 가지 고통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단다. 육체적 고통은 누구나 다 겪는 것이지만 정신적 고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겪을 수도 겪지 않을 수도 있단다’라고요. 저에게 큰 위안이 된 말이에요. 또 오스카가 죽기 며칠 전 ‘삶은 선물받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과 ‘하느님이 엄마 아빠를 꼭 만나서 세상을 보는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없느냐’고 한 대사가 가슴에 박혔어요.”

순간, 그의 눈이 젖었다. 목소리도 흔들렸다. 잠시 감정을 고르고 난 후 그는 ‘휴…’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아이들도 마지막 순간, 엄마 아빠 생각이 단 1초라도 스치지 않았을까요? 내가 죽었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대사를 할 때마다 되게 되게 마음이 아파요. 자꾸 눈물이 나요.”

-세월호 여파로 지난 한달여 동안 온 국민이 큰 분노와 슬픔에 잠겨 지냈어요. 지혜로운 장미 할머니라면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똑같은 상황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내 자식이 바닷속에 있지 않은데 자식을 바다에 둔 엄마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요. 그저, 그 엄마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리고 옆에 가만히 같이 있어주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요.”

-유가족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그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을 방치한 채 저만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들을 구하느라 자기 목숨을 버린 분들도 계시잖아요. 패배주의에 매몰되기 보다는, 또 누구를 탓하는 데 급급하기 보다는, 그런 의로운 분들에게 희망을 갖고,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꽃다운 많은 아이들을 죽이고도 반성을 안 하고 정신을 못 차리면 정말 가망이 없는 거잖아요. 저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큰 고통을 주시고 또 우리가 거기에서 뭘 배우기를 바라시는 건지 정말 묻고 싶어요.”



김혜자는 누구?

이화여대 응용미술과 2학년 때인 1961년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선발됐다. 그러나 연수를 끝내기도 전에 연기생활을 그만뒀다. 졸업도 안 한 채로 11살 연상의 남편(작고)과 결혼을 해버렸다. 그는 “열망만 컸지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4년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아이가 엄마보다 친구를 더 찾는 것을 보곤 외로워졌다. 다시 연기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운명인지 때마침 길에서 연극하던 경기여고 선배와 마주쳤다. 선배는 그에게 연극을 하면 연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나이 27~28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김혜자는 “제가 배우가 될 성 싶어 보이셨는지 연극연출가 허규 선생님이 저를 극단 실험극장으로 데려가셨고, 허규, 김정옥 두 선생님이 제게 연기를 가르쳐 주셨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3년 간 연극만 하며 지내면서 ‘연극계 신데렐라’가 됐다. 그러다 1969년 MBC가 개국하면서 스카웃됐다. 1983년 스크린 데뷔작 <만추>로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연기자로 데뷔한 지 어느덧 53년입니다.

“저는 연기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저의 삶 자체지요.”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등 수많은 TV드라마에서 엄마 역을 맡으셨잖아요. 그래서 ‘국민 엄마’라는 별칭도 얻으셨고요. 다른 역도 많은데, 단골로 엄마 역만 맡은 게 여배우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엄마로 나오는 걸 좋아해요. 그러니 어떡하겠어요. 하지만 같은 엄마 역이라고 해도 특이한 작품들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여>라는 TV 단막드라마는 남의 아이를 훔쳐다 키우는 여자의 이야기였죠. 봉준호씨가 보고 ‘아!’ 하면서, 나중에 꼭 자기 영화에 저를 캐스팅하겠다고 마음 먹게 했다는 작품이에요. 그 결과가 봉 감독이 저를 기용해 완성한 <마더>였고요. 또 제가 굉장히 이기적인 엄마로 등장하는 영화 <마요네즈>도 있었어요. 영화에서는 이렇게 다른 걸 시도할 수 있어 좋았던 것 같아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셨죠.

“김수현씨는 저를 끊임없이 실험해요. <엄마가 뿔났다>는 엄마인 자기에게도 휴가를 달라는,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었어요. 입센의 <인형의 집> 같은 거잖아요. <사랑의 뭐길래>에서도 남편에게 죽어 지내면서도, 구시렁구시렁 할 말은 다 하는 엄마였어요. 그러고보면 배우에게는 헛된 시간은 없는 것 같아요. 배우는 게 있지요. 그래서 고맙고요.”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이제 그런 것은 없고, 실낱 같더라도 사람들에게 아직은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작품도 그런 관점에서 골라요.”

그가 작품 선택시 이 같은 기준을 갖게 된 데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24년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기아와 질병, 전쟁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다. 밀림, 야생동물을 상상하면서 떠난 24년 전의 첫 길. 그러나 검은 대륙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울고만 다녔다”고 회고했다. 그리곤 이내 ‘아, 주님이 나를 유명한 배우로 만들어주신 것은 이런 일에 쓰시려 한 것이구나’ 하는 자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년에 한두번씩 꼭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안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연극이 막을 내리면 다시 아프리카 아이들을 만나러 떠나겠다고 했다.

-그동안 입양한 아프라카 자식들도 많지요. 몇명이나 되나요.

“103명이에요. 저는 목돈이 생기면 그 애들에게 줄 몫을 먼저 떼어내 월드비전에 맡겨놔요. 제게 가장 큰 걱정은 언젠가 제가 돈을 못 벌게 돼 아이들에게 후원을 못해주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도 또 ‘내가 못 벌면… 음, 하나님이 해주시겠지’ 그래요(웃음).”

-많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으셨겠지요.

“케냐에 갔을 때에요. 여덟살 된 한 유목민 아이가 아픈 동생을 돌보고 있었어요. ‘밥을 언제 먹었냐’고 물었더니, ‘사흘전에 먹었다’고 해요 저는 ‘이 애가 굶어죽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애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그 애 이름이 ‘에꾸아무’라면서 찾아달라고 했죠. 하지만 못 찾는 거예요. 유목민이어서 여기저기 떠도는 데다 나중에 알고보니 에꾸아무가 우리나라로 치면 김, 이, 박과 같은 성씨여서 서울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던 거예요. 겨우 7년만에 그 애를 찾았어요. 제가 펴낸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실은 그 애의 사진 덕분이었어요.”

-몹시 반가우셨겠어요.

“그랬죠. 그런데 에꾸아무가 저를 만나자마자 막 우는 거예요.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죽지 말고 살아있어. 내가 꼭 올게’라고 말했는데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대요. 제가 안찾았으면 어쩔 뻔 했어요.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헛소리, 헛희망 이런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입양한 자식이 103명이 된 것은 에꾸아무와 그 아이의 두 동생을 입양하면서예요.”



그는 이야기를 할 때 온 몸으로, 온 감성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얼굴표정은 풍부했고, 손의 움직임도 잦았다. 화제에 따른 감정의 ‘희노애락’이 조그만 그의 얼굴, 특히 두 눈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런 감성이 그를 ‘대 배우’로 만든 토대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화제를 다시 연극으로 돌렸다. 극중 그가 직접 부르는 에디뜨 피아프의 샹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얘기를 꺼냈다. ‘노래를 감미롭게 잘 부르시더라’고 하며 한번 들려달라고 청하자, “아잉, 싫어” 한다. 하지만 그는 곧 부르기 시작했다. “데 쥬끼 퐁 베세 레 미앙(Des yeux qui font baisser les miens), 엉 히끼 뻬흐 쉬흐 싸 부쉬(Un rir‘qui perd sur sa bouch)…” 하면서 시처럼 읊더니, 어느새 리듬을 탄다.

“지방공연을 하고 있을 때 기타리스트 이병우씨가 오셨는데 저더러 ‘선생님, 노래 너무 잘 불러’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딱 알아들었어요. ‘아, 이건 노래로 부르면 안되는구나, 장미 할머니의 대사처럼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엔 내레이션처럼 혹은 시처럼 읊다가 노래인지 대사인지 모르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보면, 꽃을 참 좋아하시죠. 그리고 몇년전만 해도 어느 인터뷰에선가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요.

“꽃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까요. 전 여자로서 감정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도, 한 여성으로서도 그렇죠. 저는 제일 경계하는 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말이 많아지고 뻔뻔해지는 거예요. 여기저기 참견하고, 아무데서나 퍼질러 앉고, 또 다리를 쩍 벌리고 앉고, 전 그런 거 정말 싫어요. 여자는…, 여자잖아요. 나이 먹으면 수치심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전 정말 그런 거 경계해요.”

-어느 여자나 그렇겠지만, 특히 여배우에겐 늙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슬프죠.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장미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하잖아요. ‘늙는다는 건 추한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추하지 않게 늙는지도 이 연극은 보여주죠. 쉬운 말로, 열일곱살 얼굴은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 타고난 것이지만, 40, 50이 넘어가면 자기가 만든 얼굴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가 얼굴에 조금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혹 현재 연애하고 계시나요.

“연애할 나이는 아니죠(웃음). 이제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나이라고 할까.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어요. 그런데 연애감정하곤 달라요.”

-그럼 남자친구?

“아휴, 난 남자친구라는 말도 좀 흉측한 것 같애. 3년 전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예전에 제게 이랬어요. ‘김혜자씨, 하나님은 참 오묘해. 나이를 먹으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게 만들잖아. 그게 있으면 우리가 마음으로라도 죄를 지을텐데, 나이 먹으면 그 마음을 없애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전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서 얼마나 인간에 대해 잘 이해하시는 말씀이신가 싶어 감탄했어요.”

-연극에서 장미 할머니가 오스카에게 하루 하나씩 하느님께 소원을 적은 편지를 쓰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김 선생께서도 이뤄지길 바라는 소원이 있으신가요.


“일단 이 연극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해달라고 빌어요. 또 이 연극의 오프닝과 클로징에 쇼팽의 녹턴 2번 야상곡이 흐르잖아요. 클래식을 잘 모르는 제가 이 곡을 처음 들은 것은 백건우씨 콘서트를 보고서에요. 따라라라라~ 얼마나 멋있던지. 마치 별이 하늘에서 막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백건우씨가 연주하는 그 곡을 다시 들은 건 작년에 백건우씨의 섬마을 콘서트를 방송에서 보면서였어요. 그리고 저도 <오스카…>가 성공하면 섬에 가서 공연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죠. 연극을 한번도 못본 분들에게 이 연극을 보여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