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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풍경

youngsports 2013. 12. 31. 16:54

파리의 명소

브리태니커

프랑스의 수도이며 유럽 최대의 대도시권 가운데 하나.

시테 섬

파리의 오래된 건물, 기념물, 정원, 광장, 가로, 다리 등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경관을 이룬다. 도시가 시작되었던 시테 섬에는 12세기의 훌륭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갈리아-로마 시대의 선원들이 이곳에 주피터를 위한 제단(지금은 클뤼니 박물관에 소장)을 세웠고,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신전이 있던 장소에 교회가 건설되었다. 파리 최초의 주교인 성 드니는 이곳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의 붉은색은 참수형을 당한 후 자신의 머리를 집어들고 걸었다는 전설을 지닌 이 순교자의 피를 나타낸다.

1159년 주교가 된 모리스 드 쉴리는 6세기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대신하여 새로운 고딕 양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1163년에 시작되어 1345년에 끝난 이 공사에는 외관의 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내부를 더 높이 솟게 해주는 플라잉 버트레스(버팀벽)라는 새로운 건축방법이 도입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손상을 당한 이 대성당은 그후 경매에서 한 건축자재상에게 팔렸으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 매매를 무효화하고, 1804년의 황제대관식을 위해 다시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후일 루이 필리프가 방치된 교회를 복구했고, 건축가인 외젠 비올레트 드 뒤크에 의해서도 1845~64년에 복구되었다. 1992년의 복구사업은 산업오염에 의한 부식 때문이다.

생루이 섬

1627년 루이 13세는 건축 청부업자 크리스토프 마리와 2명의 재정가에게 시테 섬 뒤쪽의 두 진흙제방을 60년 기한으로 임대해주었다. 37년이 지나서야 마리는 두 섬을 합쳐 주변에 도랑을 파서 배수시키고, 중앙의 대로에 10개의 나란한 도로들을 배치시켜 땅을 가옥소유주들에게 임대해줄 수 있었다. 생루이장일 교회가 같은 해인 1664년에 시공되었지만, 가장 훌륭한 주택은 루이 르 보가 1640년에 완공했다. 앙주 부두를 끼고 상류 쪽으로 수m 떨어진 곳에 있는 오텔 드 로죙은 1657년에 완공되었다. 건축계약의 일부로 건설되어 센 강 우안과 연결되는 마리 다리는 비록 오늘날의 교통량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되었으나 길이는 원래 그대로이다. 생루이 섬은 번잡한 중심부에서 조용한 지역을 이룬다.

라틴 지구

생루이 섬 건너편으로 센 강 좌안에는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카르티에라탱(라틴 지구)이 있다. 1699년 라신이 이곳에서 죽었고, 들라크루아는 퓌르스탕베르 광장에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이 광장에는 19세기에 옮겨온 출판사들이 모여 있다. 주요찻집들은 예술가·작가·출판업자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1945~55년 실존주의 운동 및 그와 관련되어 부활된 보헤미아니슴(인습을 벗어던진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주의)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문학·요리·사교의 활력적인 중심지이다.

생미셸 대로 너머 서쪽에는 왕의 권한 밑에서 자치를 누렸던 대학지구가 있다. 이곳에서는 1789년까지 수업 외의 시간에도 선생과 학생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다. 루이 9세의 궁정 목사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이 1257년경 창립한 소르본대학은 프랑스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대학은 수세기 동안 파리대학교의 행정본부로 이용되었지만, 1968~71년 완전히 별개인 몇 개의 대학들로 나누어졌다. 소르본대학 건물 그 자체는 분리되어나간 몇몇 대학의 구내로 계속 이용되고 있다. 다른 학부·학교·연구소들은 파리 교육환경의 과밀현상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에서 교외의 보다 넓은 장소로 옮겨졌다. 독자적인콜레주 드 프랑스는 소르본대학의 편협된 신학·라틴어 과정보다 더 자유로운 교과과정을 제공하기 위해 1529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소르본대학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학위가 수여되지 않지만, 특히 철학·문학·과학 분야에 최고의 명성을 지닌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대학들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루이 15세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성 주느비에브에게 봉헌하기 위해 1755년 세운 건축물이 있다. 이것은 원래 파리의 중심 교회로 삼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혁명 정부는 이를 세속화시켜 팡테옹이라고 개칭하고는 혁명 영웅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다. 이곳에 묻힌 이들로는 빅토르 위고, 볼테르, 루소, 졸라 등의 작가들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였던 장 물랭이 있다.

생제르맹 대로와 생미셸 대로가 만나는 곳에는 로마 시대에 세워진 목욕탕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486~1500년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택인 클뤼니 박물관 구내에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현재 6폭으로 된 유명한 일각수 태피스트리 〈라 담 아 라 리코른 La Dame a la licorne〉을 포함하여 중세기 예술품이 수집되어 있다. 강가에 솟아 있는 구릉 꼭대기에는 뤽상부르 공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생미셸 대로가 지난다. 뤽상부르 궁전은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1612~21년에 건축된 것이다. 뤽상부르 공원에는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장난감 배를 띄울 수 있는 연못, 꼭두각시 인형극장, 조상(彫像)들이 있다. 이 공원의 남쪽에 몽파르나스 지역이 있다. 강 좌안 하류 쪽에는 모네관(館)과 1806년 이래 5개의 프랑스 아카데미들이 사용해온 프랑스 연구소가 있다. 근처에서 시테 섬의 끝을 가로지르고 있는 퐁뇌프('새로운 다리'라는 뜻)는 1578~160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름과는 달리 파리의 다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이 다리보다 건축 시기가 앞서는 다른 다리들은 재건되었음). 200년 동안 퐁뇌프 다리는 파리의 주요도로이자 상설시장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다리에서 여름 장을 여는 관습이 부활되었다.

관청지구

지방 및 중앙정부는 파리 전체 사무실 공간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센 강 좌안에 카루셀 다리로부터 에펠 탑까지 강과 나란히 뻗은 이 지역은 제7구이며, 프랑스 혁명 이래 오래되고 훌륭한 대저택들에 행정사무실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관청지구'로 알려져 있다. 모든 건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앵발리드 광장과 국회 사이의 케도르세(오르세 강변도로)에 있는, 나지막하고 장식이 많은 외무부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은 프랑스 혁명기에 점유당했던 부르봉 궁전(1722~28)에 들어서 있다. 이 궁전은 혁명 이후의 정권들에 의해 조금씩 증축되었는데, 특히 강을 마주한 그리스식 주랑(柱廊)은 1807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강 근처에 있는 오래된 오르세 철도역은 사용되지 않다가 보수되어 1986년 19세기 미술·문명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이전에 죄 드 폼에 있었던 세잔·마네·모네·르누아르·고흐 등의 인상파·후기인상파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색인 : 오르세 박물관).

앵발리드

앵발리드 관(폐병관)으로 알려진 대규모 복합건물은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7,000명의 노령·상이군인들의 보호시설로서 5년(1671~76) 만에 완공되었다. 병원건물들 위로 솟아 있는 금도금된 돔(1675~1706)은 생루이 교회에 속한 것이다. 고전시대의 로마 것보다 더 자유롭게 고전적 원리를 적용했던 이 건물은 17세기 파리의 건축양식이 되었다. 돔 구조물 바로 밑에는 붉은 반암(斑岩) 석관(石棺)으로 덮인 6개의 관들이 있다. 관 속에 또다른 관이 들어가 있는 식으로 된 이 6개 관에는 루이 필리프 왕의 노력으로 1840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부터 반환된 나폴레옹의 유해와 유물들이 들어 있다. 가로수가 서 있는 거대한 앵발리드 광장은 케도르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출연으로 세워진, 알렉산드르 3세 다리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에펠 탑과 육군사관학교

센 강이 남서쪽으로 굽어진 근처에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에펠 탑이 서 있다. 에펠 탑은 철근을 노출시킨 트러스 탑으로 안전성과 외관에 회의를 가졌던 사람들의 거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9년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1909년 박람회의 사용권이 만료되었을 때,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안테나로서의 가치 때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증축으로 원래 300m이던 탑 높이가 18.4m 더 높아졌다. 3개의 단 중 가장 높은 단에 서면 64km 이상까지 시야가 미친다. 20세기에 와서 에펠 탑은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게 되었다.

약 8,000㎡에 달하는 탑의 기부로부터 거대한 들판인 샹드마르스('3월의 들판'이라는 뜻)가 육군사관학교까지 펼쳐져 있다. 1769~72년에 지어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는 현재 국방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이 들어서 있다. 원래 육군사관학교의 행군장소로 사용되었던 샹드마르스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던 장소였다. 육군사관학교 뒤에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본부가 있다. 강 건너 에펠 탑의 맞은편에 있는 샤요 궁에는 많은 박물관이 있다. 이 궁은 1878년의 박람회 때 남겨진 건물인 트로카데로 궁을 대신하여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되었다. 조상들이 줄지어 있는 이 궁의 테라스에서는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강쪽으로 경사진 계단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개선로

북쪽으로는 클레베르가 거리가 구릉 위의 샤요 궁으로부터 원형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 원형광장으로부터 12개의 인상적인 가로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별(에투알) 모양을 이루고 있어 1753년부터 에투알 광장으로 불렸으나 1970년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이 광장의 중심부에는 1806년 나폴레옹이 세우도록 한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 너머로 V자형 교외지역인 뇌이의 맨 끝 쪽에는 약 3.2km에 걸쳐 1970년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고층 건물군이 있다. 데팡스 소구라고 불리는 이곳은 상업·공업·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제2의 개선문이라고 하는 대 아치 문이 세워졌다.

샤를 드골 광장 남동쪽에는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되었던 장소인 콩코르드 광장이 있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는 때때로 개선로라고 불리며, 데팡스 소구로부터 루브르 박물관까지 뻗은 큰 축의 동부를 형성한다.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 사이에 있는 튈르리 공원에는 예전에는 박물관이었으나 현재는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죄 드 폼과 오랑주리 회화관(繪畵館)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바이킹들은 885년 시테 섬 서쪽 끝에서부터 강 건너편의 우안에 걸쳐 진을 쳤으나 파리의 포위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약 1200년경 필리프 2세가 신도시 성벽 바로 바깥쪽으로 같은 장소에 서쪽 방어를 돕기 위해 직4각형으로 된 십자군성을 축조했다. 그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증축과 개조가 이루어졌으며, 1852년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규모의 궁전이 완공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강을 따라 뻗은 남쪽 화랑과, 4각형 안마당(쿠르 카레)을 둘러싼 궁전의 4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사모트라케의 승리〉·〈밀로의 비너스〉·〈모나리자〉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BC 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

예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개조작업이 벌어졌다. 1980년대초 2개의 화랑 사이에 있는 거대한 나폴레옹 안마당에 새로운 출입구와 지하 연회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출입구를 덮기 위해 I. M. 페가 설계한 높이 23m의 유리 피라미드는 강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강 좌안으로 걸쳐진 아르 다리는 파리의 모든 다리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다. 처음에는 철교(1803)였으며, 도보자들이 계속 이용해왔던 이 다리에서는 센 강변의 경치가 자세히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 북쪽으로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국립음악 아카데미가 있는 오페라 광장이 있다. 오스만 대로 너머의 언덕에는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우뚝 서 있는 몽마르트르 지역이 있다. 카페와 나이트클럽들이 있는 이곳은 환락가의 중심지이며, 시인·화가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리볼리가(街)

리볼리가는 콩코르드 광장으로부터 남동쪽으로 강과 나란히 뻗어 있다. 이 거리를 낀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에는 팔레 루아얄이 있다. 이것은 추기경 리슐리외가 왕가에 양도한 것으로, 현재는 국가 고위기관인 참사원이 들어 있으며, 근처에 국립도서관이 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여러 거리들은 1183~1969년에 파리의 중심 상가였던 알 소구이다. 철골과 유리로 된 19세기의 독특한 시장 건물들을 해체할 때 일반 대중들이 큰 소란을 일으켰고, 해체한 후 생긴 거대한 공간에는 1979년 지하층을 포함한 여러 층의 상업 센터가 들어섰다. 이 센터의 주위에는 차량통행이 없는 구역이 둘러싸고 있다. 알 광장으로부터 세바스토폴 대로를 가로질러 조르주 퐁피두 국립예술문화 센터가 있다. 널리 상트르 보부르라고 알려진 이 건물은 1977년에 문을 연, 유리와 금속으로 독특하게 설계된 거대한 구조물이다. 이 건물은 파리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명소이다. 근처의 마레('저습지')로 알려진 지역에는 국립고문서보관소와 피카소 박물관이 있다.

리볼리가의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1789년 7월 14일에 있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제군주의 희생자들을 해방시킨 사건이라기보다는 전제군주에 대한 상징적인 타격이었다. 사실상 수년 간 사용되지 않았고 왕의 명령으로 해체될 계획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에는 사건 당일 단지 4명의 위조범, 2명의 정신이상자, 그리고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젊은 귀족이 수감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 감옥은 점령당한 후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바스티유 광장을 만들게 했다. 1859년 이곳에 건설한 철도역은 새 오페라관 건축을 위해 1984년에 완전히 없앴다. 오페라 하우스는 1991년에 개관되었다.

공원·녹지

파리는 센 강의 확 트인 시야와 가로수가 있는 강둑으로 공원이 잘 형성된 도시이다. 약 8만 7,000그루의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가 길가에 줄지어 서 있다. 그러나 공원 및 녹지는 파리 시 전역의 11%에 불과하다. 현대적인 도심부에 있는 공원과 정원의 대부분이 과거 도시 외곽에 왕을 위해 남겨두었던 땅에 조성되었다. 영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런던의 공원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나폴레옹 3세는 파리로 가는 길에 있는 2개의 옛 왕실 군사보존지를 영국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곳이 현재 서쪽에 있는 불로뉴 숲과 동쪽에 있는 뱅센 숲이다. 또한 그는 넓은 지역을 산책로와 정원지로 조성했다. 공공광장, 가로수, 강둑의 나무들, 각종 정원들은 각 구에서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