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아일랜드 골웨이 대학에 법학 명예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연설중인 만델라. 로이터 뉴스1 |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 타계]
27년간의 옥살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첫 흑인대통령. 5일(현지 시각) 95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자유를향한 길고도 먼 여정을 걸어왔다. 그러나 고난으로 점철됐던 그의 인생 역정은 차별 없는 인류를 향한 사자후였고, 인류 공동체
를 향한 진전이자 진보였다. 만델라 대통령의 95년 일대기를 엮어봤다.
“우리는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이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빈곤과 수탈과 고통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것을
서약합니다. …(중략)… 우리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든 국민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당히 걸어가는 사회,
양도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이 보장되는 ‘무지개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경험하는 일이 다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1994년 5월10일, 76살의 노투사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여러 색깔이 어울려 찬란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무지개 나라’를 역설했다.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찢어놓았던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지배집단의 인종차별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넬슨 만델라의 삶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불굴의 투쟁 자체였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헌신은 한세기에 걸친
대하극이자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의 케이프주 트란스케이 지역에서 태어났다.
2009년 11월 유엔은 이 날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해 이듬해부터 기념하고 있다. 만델라의 부계는 토착 템부 부족의 추장
가문이다. 만델라라는 성은 친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만델라의 중간 이름인 ‘롤리랄라’는 모계인 코사 부족의 낱말로
‘나뭇가지 잡아당기기’ 또는 ‘말썽쟁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땐 부족 작명에 따른 ’마디바’란 애칭으로 불렸다.
만델라는 9남4녀의 남매 중 처음으로 학교 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넬슨이란 영어 이름은 초등학교 교사가 지어주었다.
만델라는 19살때인 1937년 동부 이스턴케이프에 있는 포트헤어대학교에 입학해, 평생의 벗이자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그의 첫 대학생활은 1학년 때 학생대표위원회가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동맹휴업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하면서 끝났다.
만델라는 포트헤어를 떠나 남아공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그의 한 법률회사에 취직한 뒤,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계속했다.
남아공대학의 통신 교육으로 법학사 과정을 마친 뒤 25살이던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 곳에서 만델라는 동급생이자 인종주의 철폐 투쟁의 평생동지인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조 슬로보와
독일계 유대인 해리 슈바르츠를 만난다. 둘은 뒷날 만델라 정부에서 각각 주택장관과 주미 대사를 지냈다.
이듬해인 1944년, 남아공의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목사인 다니엘 밀란이 이끄는 극우 야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노선을 주창하자,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청년동맹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다. 첫번째 아내인 에볼린 응토코 메이즈와 결혼한 것도 이 즈음이다.
1948년 남아공 총선에서 국민당의 집권은 서른살 만델라의 삶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2년 뒤인 1950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 의장을 맡은 데 이어, 34살 때인 195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함께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해 흑인 인권운동과 법률 서비스를 했다.
그해 12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만델라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폭력 평화투쟁을 지향했다.
1956년 만델라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자유헌장’을 작성한 ‘반역죄’ 혐의로 150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소됐다.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61년 피고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이는 그러나 이듬해 시작될 기나긴 감옥 생활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재판 투쟁 중 만델라에게는 몇가지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1957년엔 첫번째 아내 에블린 응토코 메이즈와 13년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한다. 만델라가 사회운동을 하느라 2남2녀의 생계에 무관심했던데다,
에블린이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여서 갈등이 쌓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델라는 그 몇달 뒤 우연히 만난 사회복지사 위니 마디키젤라에게 첫눈에 반해 재혼한다.
1960년 3월엔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갈라져나온 범아프리카회의(PAC)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7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유혈사태(샤프빌 학살)가 벌어진다. 영화 <파워 오브 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평화시위 운동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이듬해인 1961년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산하에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초대 사령관에
올랐다. 초기 투쟁 방식은 주로 백인 정부와 군에 대한 사보타지였지만, 그해 첫해 12월 정부 청사 공격을 시작으로 점차 백인
민간인, 군사시설, 산업시설에 대한 도시 게릴라 투쟁을 본격화했다. 남아공 정부와 미국은 이 조직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무력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만델라 자신의 무장투쟁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44살이던 1962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거주지 이탈 및 파업 선동
혐의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프리토리아 감옥에 갇힌 것. 이듬해 로벤섬 감옥으로 이감된 데 이어, 1964년에는 국가반역죄
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기나긴 옥중투쟁아 시작됐다.
‘민족의 창’은 1980년대 남아공 백인 정권을 상대로 집중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2년 케이프타운 인근의 핵발전소 공격,
1984년 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는 공군본부를 겨냥한 폭파 사건, 1986년 더반에서의 자동차 폭탄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도로변 지뢰매설 공격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도 생겼다. 만년에 만델라는 이처럼 무차별적인
무장투쟁이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했다가 ‘변절’ 논란을 낳기도 했다.
만델라는 1982년 로벤섬 감옥에서 케이프타운 교외의 감옥으로 이감된다. 나이 64살, 이미 20년을 복역했지만
석방은 기약이 없었다. 남아공의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정부는 국제사회의 빗발치는 만델라 석방 요구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미국 흑인가수 스티비 원더는 1985년 히트곡‘아이 져스트 콜드 투 세이 아이 러브 유’(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란 노래가
삽입된 뮤지컬 <우먼 인 레드>의 오스카상 수상식에서 이 노래를 만델라에게 헌정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남아공 국영 방송국은 스티비 원더의 모든 노래를 방송 금지하는 치졸한 조처로 맞섰다. 만델라는 철저히 격리되고 차별
받는 남아공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다.
만델라의 옥중투쟁은 1989년 남아공 대선에서 극우 국민당 후보이면서도 인종차별 철폐 등 개혁 노선을 내세운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가 당선하면서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의 석방을 전격
단행했다. 그의 석방은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수감 28년만이었다. 백인 소수 권력층이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박, 더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갈등
과 비용에 굴복한 것이다.
만델라는 석방 일성으로 “무장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더 이상 무장투쟁이 필요없도록 흑백간 정치협상을 갖자”고
제안했다. 남아공의 평화는 흑인들의 광범위한 참정권 인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만델라와 데클레르크는 곧장 흑백 공존사회 건설을 위한 수차례 예비회담을 했다.
이듬해 만델라는 합법화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 자격으로 데클레르크 정부와 수차례 협상을 통해 임시정부 헌법안을
기초했다. 둘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다.
만델라는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이 상이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칭찬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며 “지금도 우리는
온세상에서 차별 시스템의 종식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94년, 남아공 흑인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자유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했다.
이 나라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도 만델라가 처음이었다. 76살의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출범시켜, 수십년간 나라를 할퀸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데 온 힘을 쏟았다.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에 젖은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억눌렸던 흑인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의 대통령 임기 5년은 이런 갈등을 수습하고 왜곡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이 짙었다.
만델라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지만, 엄청난 격무와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엔 너무 고령이었다.
퇴임 2년 뒤인 2001년(83살)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노쇠해진 몸도 그의 정열까지 갉아먹진 못했다.
2007년 만델라는 89살의 나이로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과 ‘디 엘더스’(The Elders)라는 자문 그룹을 구성했다.
말 그대로 ‘원로들’이란 뜻이다. 셋째부인 그라사 마셸과 데스먼드 투투 주교, 코피 아난(전 유엔사무총장), 엘라 바트(인도 인권
운동 변호사),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리 자오싱(전 중국 외교부장), 메리 로빈슨(전 아일랜드 대통령),
무함마드 유누스(방글라세디 그라민 은행 설립자)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
“우리가 무관심과 냉소, 이기심 탓에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 미래 세대에게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합시다. 인도주의가 더이상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별이 없는 한밤중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진실한 형제애와 평화가 금과 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지다고 말한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었음을 우리 모두가 증명하도록 노력합시다.”
만델라가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했던 절절한 호소는 이제 후대 인류의 과제로 남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신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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