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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가 만난사람]영원한 37세, 사회와 소통하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youngsports 2012. 2. 25. 17:32
2012 02/28주간경향 964호

ㆍ“정치에 디자인 접목돼 부드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이상봉은 독특한 차림과 파격적인 연출, 폭넓은 활동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패션 디자이너다. 특히 한글을 비롯한 한국적 소재를 디자인에 접목시켜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이를 세계 무대에 소개하면서 자신과 국가의
브랜드 파워를 높이고 있다. 자원봉사와 재능기부 등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이며, 사회 다양한 분야와 활발히 소통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그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패션위크’에 다녀왔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한국 패션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콘셉트코리아 FW12’에 참여해 한국의 돌담을 모티브로 한 의상을 선보이고, 뉴욕 아트디자인박물관(MAD)에서 ‘패션, 아트 그리고 한국문화’라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국내외 무대에서 한국의 패션을 대표하면서 ‘국민 디자이너’ ‘포스트 앙드레 김’으로 불리는 그를 지난 2월 1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이상봉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돌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였다면서요.
“아하하.(크게 웃음) 담이라는 개념이 도로죠. 그걸 저는 소통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돌담의 아름다운 모습, 그것을 현대화시키는 작업, 그런 패션을 한번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한글 작품은 없었습니까.
“안 그래도 어떤 분이 이제 한글은 안 하느냐고 묻더군요. 매 시즌마다 빠지지 않고 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열 벌밖에 안 되니까 그 안에는 없었지만, 그 테마에 맞추어서 하는 거죠. 테마가 단청이면 거기에 맞는 한글을 넣어요. 이번에는 돌담이기 때문에 돌 안에 한글 담아보자고 해서 돌담처럼 동글동글하고 원만한 한글을 돌 안에 넣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한글이 패션 디자인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2006년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박람회)에서 한글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발표하면서다. 그는 2002년부터 매 시즌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해왔다.

이번 뉴욕 행사와 관련해 ‘패션 한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패션은 문화이기도 하지만 무궁무진한 산업이에요. 옷만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가구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디자인이기 때문이죠. 디자인의 중심에는 패션이 있어요. 정말 패션 한류가 돼서 국민 삶이 좋아지고 그것이 수출까지 된다면 그야말로 국가 파워가 엄청나게 되는 거죠.”

뉴욕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패션 한류, 뉴요커를 사로잡다’라는 보도도 있던데,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까.
“패션은 워낙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에 그리 쉽게 볼 문제가 아니거든요. 세계 100대 브랜드에 우리나라는 삼성하고 현대, 딱 두 개만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가운데 패션 기업이 15개 이상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패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막대한 거죠. 그런 만큼 도시나 국가 간에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그 정도로 그걸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요. 지금으로서는 한국의 패션이 세계 주류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해요.”

가능성을 봤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우리가 IT(정보기술)를 비롯해서 세계 10대 강국에 드는 분야가 많은데, 전통문화나 디자인 같은 분야는 이십 몇 위나 삼십 몇 위거든요. 그것 때문에 국가 브랜드 가치가 15위 정도 된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우리가 패션에서 가능성을 발전시켜 10대 강국 안에 들어간다면 그게 바로 선진국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를 상품화하고 세계화한 작업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게 한글이 아니겠습니까. 한글의 재발견과 6~7년 동안 한글 작업을 해온 감회가 어떻습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랑을 국민으로부터 받았어요.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연령에 상관없이 그 응원이 상당히 컸거든요. 특히 젊은 세대가 더 열광했어요.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이 기성세대보다 더 강했어요. 기성세대는 정작 젊은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걱정만 했던 거죠. 차라리 사대주의는 기성세대가 갖고 있었던 것이고, 콤플렉스도 기성세대가 갖고 있었던 거예요. 젊은이들은 그런 게 없어요. 우리 것에 대한 열망은 젊은이들이 더 강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 (한글에) 내가 너무 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닌가, 이제 그만해야지, 새로운 걸 찾아내야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도 젊은이들의 뜨거운 호응을 보고 그 사랑을 돌려줘야 된다는 생각에서 어떻게든 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갖게 돼요.”

그러면서도 한글에만 머물지 않고 소나무, 전통가구, 산수화, 단청 등으로 끊임없이 주제를 확장시켜왔잖습니까. 여러 작업 중에 한글 이외에 가장 반응이 컸던 게 무엇입니까.
“제가 한글 이외에 참 많은 작업을 했거든요. 저기 빨간 책 있어요.”
그는 막 나온 그의 작품 화보집 ‘The Truth of Lie’를 보여주었다. ‘거짓말의 진실’이 아니라 ‘이상봉의 진실’이다. 흔히 쓰는 Lee, Yi, Rhee 대신 아무도 쓰지 않을 듯한 Lie를 성의 영문 표기로 선택한 데서도 그의 독특한 감성이 느껴진다. 화보집 맨 첫 장에 실린 것이 백의, 태극, 한복 등 한국적인 모티브로 작업한 양장이다.

“제가 1985년도에 제 브랜드를 가졌어요.
태극기 하고 백의민족이라는 걸로 처음 시작을 했거든요. 이번에 뉴욕 MAD 강연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해 제가 작업한 것들을 죽 보여주었는데, 사람들이 상당히 놀라는 걸 봤어요.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한글이면 한글, 단청이면 단청, 그 하나의 작업만 봤는데 그런 걸 한꺼번에 모면서 감흥이 있었던 거죠. 많은 걸 해왔지만 한글 이외에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건 단청이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청은 한국 문화에서 가장 화려하고, 우리나라에 왔다 간 사람이면 다 알아요. 고궁을 다 한 번씩은 가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생활에 쓰인 건 하나도 없어요. 고궁이나 사찰 같은 특별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죠. 그걸 생활 속으로 끄집어내면서 실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너무 튀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화려한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반응은 뜻밖이었어요. 그 직전 시즌에 했던 산수화보다 파장이 두 배 정도였다고 할까요.”


올해는 어떤 활동이나 작품을 할 계획입니까.
“우선 다음주에 파리에 가서 쇼를 해야 되고요. 그 다음에 약속된 건 올 가을에 집배
원복을 내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제가 현정화 감독을 만났어요. 제가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탁구예요. 현 감독의 얘기가 우리나라 국가대표 유니폼을 일본에서 만들어오는데, 일본 것보다 촌스럽다는 거예요. 저도 같이 흥분을 했죠. 그래서 런던올림픽 때 탁구 유니폼은 제가 해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집배원복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된 겁니까.
“그건요, 코 꿴 거예요.(웃음) 제가 에티오피아에 간 사이에 팀장이 가능성을 얘기한 게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어요. 나중에 자료를 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의 전달자로서 묵묵히 일하는 집배원을 위해서 실용성뿐만 아니라 멋과 의미를 담고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유니폼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지난해 11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과 함께 에티오피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에티오피아·페루·파라과이·스리랑카·세네갈 등 5개국 KOICA 봉사단의 유니폼도 디자인했다. 한글과 각 나라 국기를 결합한 디자인이다.

디자이너로서 재능기부를 많이 하고 사회와 활발하게 소통한다는 평가를 듣는데, 그와 관련한 특별한 사연이나 철학이 있습니까.
“제가 한글을 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대중적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글 홍보대사와 환경재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되니까 거기서 공부를 하게끔 자료를 주잖아요. 그러면 이왕 하게 되니까 떠들게 돼요. 사랑은 받는 것만큼 돌려줘야 된다, 또 나의 조그만 재능이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당연히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거죠.”

그는 자신의 디자인 감각을 패션의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넓힌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릇, 휴대폰, 다이어리,
아파트, 담배, 침구 등에도 그의 디자인은 적용된다.

요즘 디자인의 시대라고 할 만큼 디자인이 우리 생활에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디자이너가 옷만 만드는 게 아니라 안경, 구두,
화장품, 가구도 만들 수 있어요. 외국에서는 호텔도 만듭니다. 아르마니(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가 그런 걸 하잖습니까. 그 사람은 호텔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디자이너의 역할이 커진 거예요. 디자이너가 삶을 만들어가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직업이라면 이제는 그 정도의 책임감도 가져야 된다고 얘기를 하죠.”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로군요. 가장 안 바뀌는 정치에 디자인을 접목할 수 없을까요.
“아! (손뼉을 치며) 그 얘기 좀 쓰세요. 디자인에서 가장 ‘하드’한 게 건축이잖아요. 지금 사회에서 가장 힘 있고 딱딱한 게 정치인 것 같아요. 디자인은 가장 ‘소프트’하거든요. 가장 감성적이고… 정치에 디자인이 접목돼서 정말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 부드러워졌으면 좋겠어요.”

한국의 패션 산업 수준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패션을 받아들이는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지금 수입 브랜드의 타깃이 한국이에요. 그 이유는 가장 유행을 빨리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프랑스나 이탈리아도 한국 시장에 가장 촉수를 세우고 있다는 게 수입 브랜드 담당자들의 얘기예요. 이걸 긍정적으로 볼지 부정적으로 볼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지금 명품을 먹여 살리는 곳은 아시아고요, 그 중에 한국도 들어갑니다. 분명한 것은 그 테스트 마켓이 한국이라는 겁니다.”

하얗게 민 맨머리에 동그랗고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구레나룻과 수염, 흰 셔츠에 검은 상하의…. 대중에게도 익숙해진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패션 디자이너의 패션과 스타일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헤어스타일을 비롯한 본인의 패션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겁니까.
“저 자신을 만들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디자이너의 색깔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건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냥 어느 날 장발 시대 때 춤추러 갔다가 (머리칼이) 휘날리는 내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이런 거고, 수염은 나도 모르게 막 일하다가 세수도 못하고 부스스하게 나올 때가 많아서 기르게 된 것이었고요. 수염 기른 건 거의 디자이너 생활하면서니까 30년 가까이 되고 머리 민 것도 20년 가까이 돼요. 너무 오래 돼서 그냥 생활일 뿐이에요.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겉옷을 안 갈아입고 나오거든요. 디자이너는 스스로 자기를 스타일링하고 자기를 유행에 맞추지 않습니다. 유행을 만들어 가고 옷을 만드는 사람이지 그것을 입고서 대중 앞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죠.”

옷은 직접 해서 입습니까.
“제 옷을 어떤 때는 못 넣어요. 이런 얘기 하면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데, 저도 외국 나가면 50%, 70% 마지막 세일하는 것 입고 오거든요. 그게 훨씬 싸니까요. 미안해서 못 넣죠.”

그러면 입고 있는 옷이 직접 디자인한 게 아닙니까.
“이건 다 제 옷인데, 자투리 갖고 한 거예요. (바지를 가리키며) 이건 15년 된 것이고, 지금 30년 된 옷도 입어요. 가죽 자투리, 가윗밥 나서 찢어진 것, 쇼복 낡은 것, 이런 걸 제가 덧대거나 고친 것이에요.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저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많이 그렇게 해요.”

나이는 공개를 계속 안 할 겁니까.
“제가 서른일곱에 (나이를) 버린 뒤로는 안 할 생각이고요. 저도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라요. 잊어버려요. 아직까지도 도전하고 있고 제 세포나 정신은 퇴화하고 죽어가고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얘기해요. 자기 최면 걸고 있는 거죠.(웃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