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첼시 유소년팀 출신이자 토트넘 역대 최다득점자인 '천재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
최근 토트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에 나가보면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까지 직접 찾아오는 한국인 팬분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서도 토트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손흥민 선수의 토트넘 입단 이후 토트넘이라는 구단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성모의 더스토리]에서는 그렇게 토트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축구팬분들께서 그들의경기를 더 깊이 있게 즐기실 수 있도록 토트넘이라는 구단에 대한 중요하고 필수적인 정보를 소개해드릴 계획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토트넘 특집' 제 1편의 주인공은 첼시 유소년팀 출신으로 토트넘의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된 천재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입니다. 은퇴한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양팀 팬들은 물론 잉글랜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토트넘과 잉글랜드의 축구 상황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1956년, 첼시의 첫 리그 우승과 테드 드레이크 감독
'축구의 역사를 알면 축구를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축구는 물론, 그 주어만 바꾸면 모든 다른 분야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위의 명제는 결코 그저 형식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지미 그리브스가 처음 첼시와 인연을 맺었던 그 당시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리브스는 1956년에 첼시 유소년팀에 입단했다'라고만 아는 것과 그 1956년이 어떤 해였는지, 당시 첼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알고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첼시와 아스널의 역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가 첼시 유소년팀에 입단했던 1956년은 첼시가 창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1954/55시즌) 바로 다음 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첼시의 감독이자 첼시의 첫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던 남자는, 묘하게도, 아스널의 레전드 공격수 출신인 테드 드레이크였습니다.
아스널의 '명장'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열어젖힌 아스널의 황금기였던 1930년대에 팀의 주포로 활약한 테드 드레이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많고 많은 '레전드중 한 명' 수준의 공격수가 아니었습니다. 아스널 소속으로 184경기에 나서 139골을 터뜨렸던 그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1부 리그 기록에서 한 경기 최다골에 해당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리그 창단멤버이자 초기의 명문팀인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무려 7골을 홀로 터뜨린 것입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5년까지 정식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불운속에 현역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드레이크는 1946년 부터 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레딩 감독 생활을 거쳐 1952년에 첼시 지휘봉을 잡습니다.
그가 첼시 감독으로 부임했던 당시 첼시에는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1905년 창단 이후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던 첼시가 전쟁이 종료된 이후로 드디어 유소년 팀 육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드레이크 감독은 감독 부임 직후 팀의 문양을 바꾸고(펜셔너에서 현재의 사자 문양으로) 팀에 새로운 훈련 방식을 도입하는 한편, 유소년 정책을 본격적으로 확장시키면서 유소년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발굴 및 육성하며 팀을 키워나갑니다. 그 정책에 의해 첼시에 입단한 선수들을 당시 영국 현지 언론에서는 '드레이크의 새끼 오리들(Drake's Duck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첼시 감독에 부임한지 꼭 3년만이었던 1955년, 그의 개혁이 성공하며 첼시는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해인 1956년에 리그 우승으로 한껏 탄력을 받은 드레이크 감독의 유소년 정책으로 인해 첼시 유소년팀에 입단했던 주인공이 바로 지미 그리브스였습니다.
즉, 이번 칼럼의 주인공이자 토트넘 팬들에게 현재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공격수인 지미 그리브스는 그의 커리어의 아주 처음부터, '아스널'의 황금시대의 주포 공격수였던 테드 드레이크에 의해 '첼시'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그 '첼시'에서 두각을 드러낸 끝에 결국에는 '토트넘' 역대 최다득점자가 된 셈인 것입니다.
- 1955년~1961년 20세에 '리그 100골' 기록을 달성한 그리브스
그렇게 1956년에 첼시 유소년팀에 입단한 그리브스는 1957년에 유소년팀에서 114골이라는 경이적인 골기록을 수립한 뒤 곧바로 1군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1957년, 그의 1군 데뷔전 상대팀은 다름 아닌 토트넘, 경기장은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이었습니다. 당시 만 17세였던 그는 자신의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화이트 하트 레인에 모여있는 팬들과 잉글랜드 축구 무대에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연이어 신기록을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군 무대에 데뷔했던 그 해 포츠머스를 상대로 4골을 넣으며 1군 무대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세운 그는 첼시에서 보낸 4시즌 동안 첫 시즌 22골, 2번째 시즌 37골, 세번째 시즌 30골, 네번째 시즌에는 43골을 터뜨리며 20세(290일)의 나이로 '리그 100골'이라는 금자탑을 쌓게 됩니다.
20세의 나이에 이미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가 된 그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찾아옵니다. 이탈리아의 명문으로 이탈리아 리그 내 경쟁은 물론 1955년부터 시작된 유러피언컵에서도 계속해서 우승을 노리고 있던 AC 밀란이었습니다.
AC 밀란에서 제의한 거액의 이적료에, 새로운 도전을 원했던 그리브스의 의지까지 맞물려서 첼시는 결국 그리브스를 AC 밀란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리브스는 첼시 선수로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해 홀로 4골을 터뜨립니다.
그가 첼시에서 뛴 마지막 시즌(1960/61)의 리그 골 기록은 41골(40경기). 그 기록은 현재까지도 첼시의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첼시를 떠난 후 첼시는 그리브스와 마찬가지로 첼시 유소년 팀 출신의 다른 공격수를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리브스에 이어서 새로 첼시의 주포로 떠올랐던 선수가 바로 프랑크 람파드가 신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첼시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보비 탬플링입니다.
(사진=AC 밀란으로 이적했을 당시의 지미 그리브스)
- 1961년, AC 밀란에서의 악몽과 잉글랜드 복귀
그리브스는 은퇴 후 영국 TV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의 AC 밀란 행에 대해 '젊은 나이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말이 그의 AC 밀란에서의 선수생활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첼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AC 밀란에서도 데뷔전부터 골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잉글랜드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골행진이 이탈리아에서도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컸지만 그는 곧 많은 문제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가 겪은 모든 문제들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네레오 로코 감독과의 불화였습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그리브스는 로코 감독이 원해서 영입한 선수가 아니라 그의 전임자였던 쥐세페 비아니 감독이 원해서 AC 밀란으로 데려왔던 선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아니 감독은 그리브스가 AC 밀란에 입단하기 전에 심장마비를 겪었고 AC 밀란은 그를 곧 새 감독으로 교체했습니다. 그렇게 AC 밀란 지휘봉을 잡은 것이 로코 감독이었습니다. 그리브스는 로코 감독에 대해 은퇴 후 데일리미러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로코 감독은 잉글랜드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는 분명히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감독과의 불화속에 그리브스의 이탈리아 생활은 점점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삼프도리아 전에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선수를 걷어차며 퇴장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은 그와 로코 감독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로코 감독은 그리브스의 파울 때문에 프리킥으로 득점을 내줬다고 불만을 표했고 그리브스는 같은 경기에서 자신이 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감독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14경기에 나서 9골을 기록했지만, 결국 그렇게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한 시즌은 악몽처럼 끝나게 됩니다. AC 밀란이 그를 이적명단에 올리자 잉글랜드의 두 클럽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영입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의 친정팀인 첼시, 그리고 그가 미래에 최다 득점자가 될 토트넘이었습니다.
(사진=토트넘 최고의 명장 빌 니콜슨 감독과 지미 그리브스. 니콜슨 감독은 그리브스의 '친정팀'인 첼시와의 영입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를 토트넘으로 데려왔다)
- 1961년, 빌 니콜슨 감독의 결단과 토트넘 입단
그리브스 영입에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8만 파운드를 투자했던 AC 밀란은 그를 헐값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AC 밀란에서 실패를 겪은 시점에도 여전히 22세의 미래가 창창한, 잉글랜드에서 이미 리그 100골을 기록한 공격수였습니다.
그의 영입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당연히 그의 친정팀이었던 첼시. 첼시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그를 다시 첼시로 데려오기 위해 첼시는 그를 이적시킬 당시 받았던 8만 파운드보다 많은 9만 파운드 이상의 이적료를 제시했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경쟁자가 등장했습니다. 토트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인 빌 니콜슨 감독이었습니다.
양팀은 이적료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니콜슨 감독은 어떤 금액을 지불하고서라도 그리브스를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 데려올 각오로 결국 99,999파운드라는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이적료에 그를 토트넘 선수로 만듭니다. 그 특이한 액수의 이적료는 그리브스에게 '잉글랜드 최초의 10만 파운드 이적료를 기록한 선수'라는 부담을 안겨주지 않기 위한 이적료였습니다.
그리브스가 토트넘 선수가 됐던 1961년은 토트넘 구단의 입장에서는 1960/61시즌 달성한 '더블'(리그 우승, FA컵 우승)로 팀이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의 더블은 20세기에 들어 최초에 나온 기록으로 토트넘 팬들이 현재까지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두 개의 기록 중 한 가지입니다.
첼시, AC 밀란 두 팀에서 가진 1군 데뷔전에 모두 골을 터뜨렸던 그리브스는 토트넘 홈구장에서 펼쳐진 자신의 데뷔전에서는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바로 첫 경기에서부터 거침없는 골행진을 시작합니다. 그가 토트넘에서 보낸 첫 시즌인 1961/62시즌, 토트넘은 지난 시즌에 이어 다시 한 번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그리브스는 그 과정에서 팀내 최다골인 9골을 터뜨리며 팀의 FA컵 우승을 견인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1962/63시즌, 그는 토트넘 팬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위대한 기록을 그의 발끝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사진=토트넘 시절의 지미 그리브스)
- 1962/63시즌, 잉글랜드 최초의 유럽대회 우승팀이 된 토트넘과 그리브스
토트넘에서 맞이한 자신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62/63시즌, 그리브스는 리그에서만 리버풀, 맨유를 상대로 기록한 해트트릭을 포함해 총 37골을 터뜨리며 자신의 토트넘 커리어 중 최다골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리그에서가 아닌 컵 위너스 컵에서 나왔습니다.
지난 시즌 FA컵 우승으로 컵 위너스 컵 참가 자격을 얻은 토트넘은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 등을 꺾고 결승전까지 진출,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우승을 다투게 됩니다. 당시 유러피언컵, 컵 위너스 컵 등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레알 마드리드가 5년 연속 유러피언컵을 차지한 스페인. 반면 잉글랜드는 아직 단 한 번도 유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도, 대부분의 축구전문가들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우승을 점쳤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양팀의 결승전, 지미 그리브스는 시즌 내내 그랬듯 그 경기에서도 골을 터뜨렸습니다. 전반 16분 만에 그리스브의 선제골로 기세를 잡은 토트넘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그리브스는 후반전 35분에 또 한 골을 추가하며 팀의 승리를 이끕니다. 결국 그 경기는 토트넘의 5-1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토트넘이 '축구 종가'를 자부하는 잉글랜드의 모든 클럽 중 최초로 유럽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토트넘 팬들이 1960/61시즌의 더블과 함께 아직까지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지미 그리브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이었습니다.
- 1966년 월드컵의 불운과 9년 연속 팀내 득점 1위
첼시 시절과 토트넘 시절에 그가 보여준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비 찰튼, 게리 리네커 등의 잉글랜드 출신 스트라이커 들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는 그가 국제무대에서 또 자국 리그에서 겪은 불운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는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 단 한 차례도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보비 찰튼과 함께 의심의 여지없는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였던 그리브스는 1957년부터 국가대표팀에서 뛰기 시작했고 현재도 웨인 루니(51골), 보비 찰튼(49골), 게리 리네커(48골)에 이어 잉글랜드 역대 득점랭킹 4위(44골)에 올라있습니다. 그러나, 출전 경기 당 골 수를 계산해보면 그리브스가 얼마나 순도 높은 공격수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표=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득점 랭킹 TOP 5. 그리브스는 4위에 올라 있으나 경기 당 득점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그리브스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소집되어 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와의 조별 라운드에도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그는 상대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를 대신해 출전했던 지오프 허스트의 맹활약 속에 남은 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보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잉글랜드는 그 해 그토록 염원했던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스쿼드 중 단 한 명 그 우승이 씁쓸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리브스였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에 우리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거라고 믿는 팬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우리가 분명히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은 내가 그 우승을 차지하는 팀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편, 그는 현역시절을 통해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는 득점왕'이라는 쓸쓸한 타이틀도 얻어야했습니다. 그는 선수생활 중 총 6차례 1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그가 뛰는 중에 그의 소속팀은 단 한 차례도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즌은 그가 토트넘에서 리그 37골을 터뜨렸던 1962/63시즌으로 그 해 토트넘은 리그 2위에 그쳤습니다.
토트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인 빌 니콜슨 감독이 이끌고 역대 최다득점자인 지미 그리브스가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토트넘이 1960/61시즌(그리브스가 합류하기 직전의 시즌이자 토트넘이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의 리그 우승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만큼 치열했던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1960년대 잉글랜드 축구계는 맷 버즈비 감독의 맨유가 '뮌헨참사'(1958년)를 겪은 후 서서히 리빌딩에 성공해 다시 리그 우승을 노리고 있었고(1960년대에 리그 우승 2회), 1959년 리버풀에 부임한 빌 샹클리 감독을 중심으로 리버풀 역시 리그 정상을 다투고 있었으며(1960년대에 리그 우승 2회) 돈 레비 감독이 이끈 리즈는 구단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1960년대에 리그 우승 1회).
그 이외에도 전통의 강호인 에버튼, 아스널 등이 항시 우승경쟁을 하고 있었고 1955년 최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한 첼시 역시 1960년대에 들어 리그컵,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런 다양한 팀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지미 그리브스는 자신이 토트넘에서 뛴 9시즌 동안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모든 시즌에서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토트넘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고 1970년에 웨스트햄으로 이적하며 화려했던 토트넘에서의 생활을 마감합니다.
- 토트넘 홈구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미 그리브스의 흔적
(현재 화이트하트레인 인근의 노점상에서 판매하고 있는 지미 그리브스 관련 기념품. 사진=이성모)
토트넘에서 뛰는 동안 그는 총 379경기에 나서서 269골을 기록했습니다. 리그 기준으로는 321경기에 220골. 이는 둘 다 토트넘 역대 최고기록에 해당합니다. 1962/63시즌 그가 리그에서 기록한 37골 역시 현재까지 존재하는 토트넘의 한 시즌 최다골 기록입니다. 그의 이런 엄청난 골 기록은 현재 뛰고 있는 해리 케인이나 손흥민 선수가 득점을 쌓아갈 때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상기될 수 있는 기록입니다.
(표=토트넘 역대 득점 랭킹 TOP 10. 그리브스는 득점수만 1위가 아니라, 경기 당 득점률에서도 위 10명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토트넘이라는 구단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9년을 뛰는 동안 9년 모두 팀내 최다득점을 기록한 그는 현재까지도 많은 토트넘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토트넘의 홈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에 나가보면 현재도 그에 관한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토트넘과 AC 밀란에 앞서 '원더키드'로 불렸던 시절에 그가 뛰었던 첼시의 올드팬들 역시 여전히 그리브스를 사랑합니다. 그는 첼시 1군에서 불과 4년을 뛰었을 뿐이지만, 그가 그 4년 동안 보여준 활약은 현재까지도 언급될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브스가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던 시즌 역시 첼시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리그 기준, 41골).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화이트하트레인을 찾거나, 그의 경기를 TV로 지켜보는 분들은 유심히 한 번 살펴보세요. 화이트하트레인 주변 곳곳에서 그의 선수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견하거나, 토트넘에 대한 각종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그리스브의 전설적인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실지 모릅니다.
글. 네이버 칼럼니스트 이성모
*안녕하세요 축구팬 여러분, 네이버 칼럼니스트 이성모입니다. 이번 지미 그리브스의 이야기 이외에 여러분이 토트넘에 대해 궁금하신 점을 아래 댓글이나 제 페이스북 페이지의 메시지로 남겨주세요. 여러분께서 토트넘에 대해 더 자세히 아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알고 싶으신 점을 모아서 '토트넘 특집'을 통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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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성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