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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회] “선발 청탁? 걔 엔트리에서 빼” 故이광종의 뚝심

youngsports 2016. 9. 27. 11:43

[김현회] “선발 청탁? 걔 엔트리에서 빼” 故이광종의 뚝심


이광종 감독
ⓒ아시아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 축구를 지금껏 너무 훌륭하게 이끌어 왔고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할 별이 졌다.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었던 이광종 감독이 어제(26일)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고인을 기억하는데 이 칼럼이 소중한 자료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로 살아가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총정리하려 한다. 부디 이광종 감독이 하늘에서는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 칼럼을 시작한다.

중앙대를 정상으로 이끈 ‘선수 이광종’
이광종은 196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통진종고(지금의 통진고)를 졸업하고 중앙대에 진학한 그는 사실 돋보이는 선수는 아니었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분하던 대학 무대에서 중앙대는 다크호스 정도로 지목됐고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였던 이광종 또한 그리 주목을 받을 일이 없었다. 1987년 4월 유고에서 열리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프로 무대에 진입한 김주성이라는 슈퍼스타와 여범규(이상 대유) 등이 포진했고 김종건(현대)과 최윤겸(유공) 등이 훨씬 더 주목을 받았다. 대학생인 이광종은 관심 밖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광종은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고 닷새 뒤 깜짝 놀랄 만한 사고를 쳤다. 대학 무대에서 다크호스 정도로만 평가받던 중앙대를 이끌고 봄철대학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아주대에 1-2로 뒤지고 있던 결승전에서 후반 36분 이광종으로부터 추격전이 시작됐다. 이광종의 크로스를 최건택이 문전으로 떨궜고 이를 고만석이 가슴 트래핑 후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다. 이후 중앙대는 후반 종료 직전 고만석이 한 골을 더 넣고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1966년 공동 우승 이후 무려 21년 만에 중앙대가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대회 MVP가 결승전에서 두 골을 넣은 고만석이 아니라 미드필더 이광종이었다는 점이다.

대학 무대에서 기세를 올린 이광종은 쟁쟁한 동료들이 포진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서도 돋보이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첫 경기에서는 김상진의 골을 도와 3-2 승리를 이끌었고 브라질전에서는 한 골을 뽑아내며 5-0 대승에 힘을 보탰다. 이광종은 홈팀 유고와의 경기에서도 통렬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대를 강타하는 등 쾌조의 활약을 이어 나가더니 8강전에서는 숙적 일본을 상대로 또 다시 인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광종이 후반 26분 얻어낸 페널티킥을 여범규가 득점으로 연결하며 승리를 이끈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광종은 중국과의 4강전에서도 중원에서의 패스로 김주성의 중거리 골을 도우며 한국의 결승 진출에 일등공신이 됐다. 비록 결승전에서 소련에 아쉽게 패하기는 했지만 이광종은 한국의 유니버시아드 은메달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광종, 좌절을 딛고 일어서다
이광종은 곧바로 국가대표 B팀에도 발탁됐다. 김풍주(대우)와 이흥실, 유동관(이상 포철), 구상범(럭키금성), 손웅정(현대), 황보관(서울대) 등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20명의 국가대표 B팀 선수 중 대학생은 이광종을 포함해 단 6명 뿐이었다. 이광종은 코스타리카와의 원정경기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는 등 프로선수들에 비해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 그렇게 이광종은 1988년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유공의 지명을 받아 프로 선수로서의 꿈도 이뤘다.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주목받는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중원에서 활동량과 드리블을 바탕으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데뷔 시즌부터 주전으로 도약한 그는 중거리 슈팅이 좋아 팀이 어려운 상황에 몰릴 때면 곧잘 득점도 뽑아냈다. 비록 데뷔 첫해 팀 동료이자 입단 동기인 황보관에게 신인왕 타이틀을 내주기는 했지만 이광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헌신하는 선수로 지도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이광종은 황보관, 조윤환, 최윤겸, 하재훈, 노수진 등과 함께 1989년 팀의 첫 번째 우승을 이끌며 K리그에서도 인정 받기 시작했다. 우승 당시 37경기에 나서 2골 6도움을 기록한 이광종은 이후에도 꾸준히 선발 출장하며 붙박이 주전을 꿰찼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주가가 무릎 부상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1991년 이광종은 무려 두 번이나 무릎 수술을 받으면서 11경기에 나서는데 그쳤다. 운동선수로서 무릎 수술 한 번도 선수 생명을 걸 만큼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그는 두 번이나 수술대에 오르며 선수 생명이 중단될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지옥의 재활을 거쳐 1992년 다시 화려하게 돌아온 것이다. 비록 풀타임을 소화할 몸상태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경기에 나서며 5골을 기록, 재기에 성공했다. 무릎에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1994년에는 35경기에 나서 9골을 기록하며 황보관에 이어 팀내 득점 2위로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비록 국가대표 경력이 부족해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지는 못했지만 유공에서 가장 내실 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1993년과 1994년 2년 연속으로 유공에서 팀내 MVP를 독차지한 것도 이광종이었다.

이광종 감독
이광종은 수원삼성의 창단 멤버로 2년간 활약했다. ⓒ수원삼성블루윙즈

이광종의 발에서 이뤄진 수원의 정규리그 첫 골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1995년 유공에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부임했는데 니폼니시 감독의 축구 철학과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활동량과 드리블을 앞세운 이광종과 달리 니폼니시는 빠르고 짧은 패스 축구를 강조했다. 1995년 니폼니시 감독과 유공에서 한 시즌을 보낸 이광종은 팀에서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나이는 이제 32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선수 생명도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32살의 선수는 노장 취급을 받지만 이때는 이런 풍토가 더 심했기 때문이다. 당장 현역에서 물러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유공에서 8년을 뛴 그는 이제 할 만큼 다 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쯤 K리그 제9구단으로 수원삼성이 출범했고 규정상 기존 구단은 신생팀인 수원에 선수 한 명씩을 내줘야 했다. 수원 창단 감독이 된 김호 감독은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유공에서 뛰는 이광종을 지명합니다.”

김호 감독이 무릎도 성치 않았고 은퇴를 눈 앞에 둔 이광종을 지명하자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1996년 이광종은 계약금 3,000만 원과 연봉 5,760만 원을 받고 유공에서 수원으로 이적했지만 수원에서의 주전 경쟁도 쉽지 않았다. 올림픽 대표선수를 대거 영입한 수원에서 조현두와 이기형 등 쟁쟁한 선수들과 경쟁하기에 이광종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3월 개막한 리그컵에서는 그라운드에 설 기회도 없이 벤치만 지켜야 했다. 하지만 노력하는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5월 정규리그 개막을 앞두고 박충균과 이기형, 고종수, 이운재, 조현두 등 주전들이 대거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돼 개막전에서 선발 출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김호 감독은 박건하와 이기근을 투톱으로 내세우고 그 밑에 이광종, 바데아, 이진행을 배치했다. 역사적인 수원의 창단 첫 정규리그 경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두 번이나 무릎 수술을 받고도, 경쟁에서 밀려 32살의 나이에 팀을 옮기고도 포기하지 않은 그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상대는 전북다이노스였다. 우세하게 전반을 이끌어 가던 수원은 경기 시작 21분 만에 기회를 잡았다. 이진행의 슛이 전북 수비수 몸에 맞고 흐르자 골 지역 오른쪽에 있던 한 선수가 공을 잡았다. 이 선수는 왼발로 떨어트린 공을 오른발 칩샷으로 연결했고 이 공은 전북 골키퍼 알렉세이의 키를 넘기는 절묘한 골로 연결됐다. 수원의 역사적인 창단 후 정규리그 첫 골은 이렇게 완성됐다. 바로 이 영광의 주인공은 ‘집념의 사나이’ 이광종이었다. 그의 발에서부터 수원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신생팀에서 ‘노장’ 이광종은 첫 시즌 30경기에 나서 5골 4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이듬해 13경기에 출전해 제몫을 다한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10년의 험난했던 프로 생활에서 266경기에 나서 36골을 넣고 21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프로 무대에서는 성공한 선수였지만 아쉽게도 대표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지도자 도전
이광종은 현역에서 물러난 뒤 잠시 사업을 손을 댔다. 하지만 평생 해온 축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축구 교실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체계적인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공부를 통해 유소년 선수를 육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0년 대학축구협회가 야심차게 시작한 유소년 전임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낮에는 그라운드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밤에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진행하는 AFC C/B/A급 코칭 코스 및 인스트럭터 코스를 모두 이수했다. 비록 선수로서는 국가대표가 되는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승승장구했다.

협회도 유소년 선수 육성에 열정을 보이는 이광종 감독을 높이 평가해 2002년 U-15 대표팀 감독으로 그를 선임했다. 또한 박성화 감독을 보좌해 U-20 청소년 대표팀 수석코치로 2004년 AFC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지도자로서 그는 협회의 인정을 받았다. 2004년부터는 협회 유소년 전임 지도 팀장으로 발탁돼 지도자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 지도자 중 당시만 해도 10여명 남짓한 지도자 자격증 최고 단계인 P라이선스를 따기도 했다. 프로팀 감독을 맡을 수도 있는 자격증이었지만 그는 다른 지도자들이 환경이나 대우가 좋은 프로팀이나 대학팀으로 떠날 때도 유소년 선수 육성을 위해 남았다. P라이선스를 따고 좋은 대우를 받는 동료들에 비해 수입은 훨씬 적었지만 이광종 감독에게는 한국 축구의 뿌리인 유소년 선수 육성이 너무나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광종 감독은 축구계에서 ‘의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대선배 감독이 “우리 애 좀 잘 봐 달라”고 웃으며 청탁(?)을 하면 아예 이 선수를 엔트리에서 빼버릴 정도로 강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니면 아닌 거다. 나는 내 소신대로 선수를 선발할 뿐이다.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대표팀에서 선수 선발 청탁을 들어주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구 집 자식이고 부모가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선수를 선발하기 때문에 내 선수들 모두를 끝까지 믿고 사랑한다.” 이렇게 매정하지만 사실 그에게도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선수 생활을 하다 그만둔 아들이 있다. 누구보다 축구선수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을 잘 아는 그였고 아들 또래 선수들의 좌절을 잘 아는 그였지만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철학과 소신을 지켰다.

연제민
이광종 감독을 향한 제자들의 충성심은 대단하다. ⓒ연제민 SNS

그가 청소년 대표팀에서 일궈낸 성과
밤낮으로 공부한 이광종 감독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였다. 2007년부터 U-16 대표팀을 지도하기 시작한 이광종 감독은 2008년 AFC U-16선수권 대회에서 손흥민(동북고)과 이강(재현고), 이종호(광양제철고) 등을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며 2009년 U-17 청소년월드컵 출전 티켓을 따냈다. 한국은 비록 결승전에서 이란에 패했지만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다섯 경기에서 스무 골을 뽑아내며 막강 화력을 뽐냈다. 하지만 2009년 나이지리아에서 열리는 U-17 청소년 월드컵 조편성은 최악이었다. 이탈리아와 우루과이, 알제리 등 만만치 않은 팀들과 한 조에 속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쉽지 않은 승부를 예상했고 비관적인 전망도 많았지만 이광종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끈기와 뒷심으로 해보겠다.” 이광종 감독은 아시아 무대를 누볐던 손흥민과 이종호를 비롯해 윤일록(진주고), 김진수(신갈고), 김민혁(순천고) 등을 발탁했다. 이광종 감독은 U-15 대표팀에서부터 함께 한 제자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첫 경기부터 놀라움은 시작됐다. 우루과이를 상대로 남승우(부경고)와 손흥민, 이종호가 연속골을 뽑아내며 3-1 완승을 거둔 것이다. 결과는 물론 경기 내용까지도 우루과이를 압도했다. 두 번째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는 비록 1-2로 패하기는 했지만 페데리코 카라로, 피에트로 이에멜로, 지아코모 베레타, 마르코 포사티, 알레산드로 데 비티스, 빈센초 카밀레리, 펠리체 나탈리노 등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치며 박수를 받았다.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인 알제리전에서도 이종호와 손흥민이 전반 연거푸 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거뒀고 2승 1패로 이탈리아에 이어 조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우루과이는 조별예선 마지막 이탈리아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한국에 밀리고 말았다. 신태용, 서정원, 노정윤 등이 나서 1987년 8강에 올랐던 캐나다 대회 이후 무려 22년 만의 조별예선 통과였다.

16강 상대 멕시코도 만만치 않았다. 조별예선에서 브라질을 1-0으로 격파하며 이변을 연출한 멕시코는 한국이 상대하기에 껄끄러운 팀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16강에서 대단한 명승부를 연출했다. 전반 막판 한 골을 허용한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이광종 감독이 대회 전 말한 그 끈기와 뒷심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후반 47분 김동진(안동고)의 천금 같은 동점골로 연장전에 돌입한 뒤 승부차기에서 5-3으로 멕시코를 제압하고 극적인 8강 진출에 성공했다. 1987년 캐나다 대회 이후 처음으로 다시 8강에 오른 것이다. 비록 한국은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인 홈팀 나이지리아에 1-3으로 패하긴 했지만 8강 진출 자체로도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역사를 이룬 셈이었다. 유소년 지도자 육성에 힘을 쏟은 협회와 그런 협회의 기대에 부응한 이광종 감독이 제자들과 함께 일궈낸 성과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팀을 이렇게 불렀다. ‘이광종의 아이들.’

‘역대 최약체’를 ‘감동의 팀’으로
그는 2009년부터는 U-20 대표팀을 맡았다. U-17 대표팀 선수들을 꾸준히 지도해온 그에게 협회는 연속성을 부여했다. 2010년 AFC U-19 챔피언십에서 4강에 진출한 이광종호는 2011년 U-20 월드컵에서도 16강에 진출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특히 이 대회 16강전은 이광종호의 진가를 보여준 한판이었다. 코케와 이스코, 오리올 로메우, 마르크 바르트라, 크리스티안 테요 등 쟁쟁한 스페인 선수들을 상대로 무려 120분의 혈투를 0-0으로 마친 한국은 비록 승부차기에서 6-7로 패하고 말았지만 감동적인 투혼을 선보이며 큰 박수를 받았다. 2012년에는 다시 U-19 대표팀을 맡아 아시아 무대에 도전했다. 당시 한국은 스타 플레이어가 없어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AFC U-19 챔피언십에서 이란을 4-1로 대파하고 우즈베키스탄도 3-1로 제압하는 등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승부차기 끝에 이라크를 꺾고 8년 만의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최약체’라던 팀의 대변신이었다.

AFC U-19 챔피언십 우승 자격으로 2013년 U-20 월드컵에 나서게 됐지만 여전히 선수층은 기대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다. 2010년 U-16 대표팀이 AFC 챔피언십에서 김은철 감독 지도 하에 북한에 1-2로 패하고 태국과 2-2, 베트남과 3-3, 미얀마와 0-0으로 비기는 등 최악의 졸전을 거듭하며 탈락했고 이 선수들을 그대로 이어 받아 팀을 꾸려야 했던 이광종 감독은 답답했다. 지금껏 15세의 어린 선수들을 꾸준히 키워 이 선수들로 U-20 월드컵까지 나가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그였지만 자신이 손대지 않았던 ‘역대 최약체’라는 어린 선수들을 이어받은 그에게는 고민이 많았다. 아무리 이광종 감독이라고 해도 이 팀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나마 아시아 대회에서 고군분투하며 네 경기 연속 골을 뽑아냈던 문창진(포항)은 부상으로 발탁하지 못했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박정빈(그로이터퓌르트) 또한 소속팀의 반대로 합류가 불발됐다. 무게감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 보였다. 여기에 심지어 주전 미드필더 김승준(숭실대)도 대회 직전 급성맹장염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광종 감독은 ‘역대 최약체’라는 이 팀을 이끌고 조별예선에서 쿠바를 2-1로 잡고 포르투갈과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16강에 오른 뒤 남미 U-20 대회 우승팀이자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콜롬비아와의 16강전에서는 1-1 무승부에 이은 승부차기 승리로 8강이라는 기적을 연출했다. 비록 이라크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말았지만 연장 후반 종료 직전 수비수 정현철을 공격에 기용하는 변칙 전술로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축구팬들을 감동케 하는 경기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광종 감독에게 ‘역대 최약체’라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전부터 K리그에서 숱하게 감독직 제의를 받은 이광종 감독에게는 더 많은 러브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광종 감독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프로팀은 일정이 빡빡한데 개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는 홍명보 감독이 성인 대표팀 감독에 발탁되자 공석이었던 U-23 대표팀 감독직을 맡게 됐다. 이 대표팀은 2014년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위한 팀이어서 부담감은 상당했다. 1986년 이후 없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라는 특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손흥민
故이광종 감독의 제자인 손흥민도 고인에게 애도를 표했다. ⓒ손흥민 SNS

‘유소년 축구의 대부’ 그리고 ‘성과왕’
더군다나 협회는 아직도 이광종 감독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일부의 지적을 받아들여 그와 214 인천아시안게임까지만 함께 하는 1년짜리 단기계약을 체결했다. 이 대회에서 성과를 내면 다가올 2016년 리우올림픽 감독 지휘봉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광종 감독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협회의 제안에 응했다. 성적을 통해 그를 향한 시선을 또 한 번 바꿔놓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표팀에는 ‘역대 최약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손흥민은 소속팀 레버쿠젠의 차출 거부로 뽑을 수 없었고 심지어 대회 개막 후에는 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신욱과 윤일록이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이광종 감독은 기적을 연출했다. 7경기에서 13득점 무실점 전승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쓴 것이다. ‘역대 최약체’라던 팀이 퍼펙트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부상 사실을 숨기고 끝까지 아껴놓았던 김신욱 카드를 북한과의 결승전에서 과감히 택한 것도 이광종 감독이었다. 동료들조차 김신욱의 부상 정도를 모를 만큼 이광종 감독은 끝까지 전술을 위해 연막 작전을 폈다. 28년 만의 아시안게임 축구 금메달을 목에 걸자 그에게는 곧바로 2016년 리우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이라는 타이틀까지 내걸렸다. 이광종 감독은 아시안게임 무실점 전승 우승 외에도 숱한 기록을 남겼다. 무려 10번의 한일전을 치러 8승 2무의 무패 기록을 이어갔다는 점도 대단한 업적이다. 이광종 감독이 한일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일전 무패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놓은 적이 있다. “나는 분석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아시안게임 때도 일본과의 8강전을 앞두고 일본이 치른 네 경기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봤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전략을 다 파악하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이광종 감독은 그 누구보다도 더 공부하고 노력하는 감독이었다.

U-15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시작으로 U-17, U-18, U-19,  U-20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모두 역임한 그를 우리는 ‘유소년 축구의 대부’라고 불렀고 2008년 AFC U-16 대회 준우승, 2009년 FIFA U-17 월드컵 8강, 2010년 AFC U-19 대회 4강, 2011년 FIFA U-20 월드컵 16강, 2012년 AFC U-19 대회 우승, 2013년 FIFA U-20 월드컵 8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전승 우승을 차지한 그를 우리는 ‘성과왕’이라고 불렀다. 대표팀에서 뛰는 선수들 대부분을 지도했던 이력 덕분에 ‘XXX을 키운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었지만 이광종 감독은 그럴 때마다 손사래를 쳤다. “그 선수들은 학교에서 잘하는 상태로 성장하고 있었고 나는 좋은 선수를 찾으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그 선수들을 찾았을 뿐이다.” ‘유소년 축구의 대부’이자 ‘성과왕’인 이광종 감독은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리우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팬들의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청천벽력 같은 급성 백혈병 진단
하지만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1월 리우올림픽을 향해 전진하며 태국 킹스컵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태국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더 이상 대회에 임하기가 어려워져 귀국한 그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지만 그는 당장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대회에 참가 중인 제자들이 갑작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을 끝까지 챙겼다. 결국 2016년 리우올림픽을 향해 전진하던 이광종 감독은 신태용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길 수밖에 없었고 곧바로 모 병원 무균실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머리도 빡빡 깎고 먹은 것을 모두 토할 정도로 독한 항암제를 하루에 세 번씩 맞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문병을 온 코치들에게 상대팀 전력 분석을 해주는 등 여전히 제자들을 걱정했다. 신태용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뒤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미 이광종 감독이 리우올림픽 본선 경기까지의 계획서를 다 짜 놓았기 때문이다. 신태용 감독은 이광종 감독이 구성해 놓은 선수 리스트를 최대한 활용해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광종 감독은 늘 공부하는 지도자였다. 그동안 쌓아놓은 데이터도 방대했다. 틈만 나면 K리그와 유소년 축구 경기 현장을 찾아 선수들을 관찰했고 대회를 앞두고서는 매일 새벽까지 전력분석실에서 상대팀 전력을 분석했다. 비디오 분석관도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12세 선수들부터 지도했던 이광종 감독은 우리나라의 대표급 선수 1천여 명 이상의 자료를 컴퓨터에 정리해 보관할 정도로 유소년 축구의 대부로 통한다. “이광종 감독을 찾으려면 비디오 분석실에 가보라”는 말이 청소년 대표팀의 단골 안내 멘트였을 정도다.

최근 대표선수 중 그가 배출한 선수를 찾는 것보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선수를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지금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 대부분은 모두 이광종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역대 최약체’라는 팀을 이끌었지만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고 어느 리그, 어느 팀에서 뛰느냐보다는 실력을 갖춘 선수들을 중용해 오로지 성적으로 축구팬들의 기대에 보답했다. 대표적인 예로 북한과의 2014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임창우는 2부리그 챌린지에서 활약하는 선수였다. 다른 스타 플레이어 출신 지도자들이 부족한 경력에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좋은 환경의 팀을 맡을 때에도 이광종 감독은 차근차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결과가 좋지 않다면 언제든 팽 당할 수 있는 지도자였지만 그는 늘 ‘역대 최약체’를 세계 무대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팀으로 성장시켰다.

이광종 감독
ⓒ아시아축구연맹

故이광종 감독이 한국 축구에 선물한 것
이광종 감독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응원이 전해졌다. 킹스컵 태국과 3차전에서 신들린 선방으로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 수문장 이창근은 “선수들이 신경 쓸까봐 감독님께서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선수들도 뉴스에서 감독님의 병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선수들이 태국전 전반이 끝난 뒤 ‘감독님을 위해 뛰자’고 격려했다. 이광종 감독님은 아버지와 같다. 덕분에 나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우승 소감을 대신했다. 수비수 연제민은 자신의 SNS에 ‘감독님 빠른 쾌유 기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게재하면서 “우리가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야 감독께서 쾌차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수원삼성 팬들이 창단 멤버이자 창단 후 정규리그 첫 골의 주인공인 이광종 감독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혈증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리우올림픽 출전 직전에는 올림픽축구 대표팀 코치진이 협회에서 받은 격려금 3천만 원을 모아 이광종 감독에게 전달했다.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던 이광종 감독은 점차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졌지만 결국 안타깝게도 어제(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상에서 올림픽을 지켜보면서도 “유소년 시절부터 지도했던 선수들이 올림픽 본선에까지 진출하게 돼 기쁘다”며 “본인들의 잠재력을 믿고 자신 있게 플레이해서 멋진 경기를 펼쳐주기를 바란다”고 응원할 만큼 축구와 자신들의 제자가 전부였던 故이광종 감독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한국 축구를 위해 지금껏 많은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일이 더 많았던 고인의 죽음에 축구계 전체가 애도를 표하고 있다. 고인이 있었기에 우리는 대표팀을 꽉 채워주는 수많은 선수를 만날 수 있었고 감격적인 경기를 함께할 수 있었다. 고인 덕분에 기적과도 같은 아시안게임 무실점 우승이라는 감격을 누릴 수도 있었다. 비록 고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인이 남기고 간 감동과 환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故이광종 감독은 늘 불리함과 싸웠다.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선수 시절 경력이 초라해 지도자로서의 출발부터가 뒤쳐졌던 그는 성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늘 ‘역대 최약체’라는 선수단을 이끌고 감동적인 경기를 선사한 것도 그였다. 고인은 ‘주류’가 아니어도 능력이 있고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분야에서 ‘비주류’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위대한 지도자였다. “의리가 없다”는 볼멘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의 철학이 확고했던 고인이 생전에 남긴 말 중에 가장 뇌리에 박힌 메시지를 전달하며 칼럼을 마무리하려 한다. 故이광종 감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팀을 맡는 동안 ‘이광종의 황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한 故이광종 감독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