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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축구의 시초, 어디까지 알고 있니

youngsports 2016. 9. 2. 21:44

[442.knowledge] 현대축구의 시초, 어디까지 알고 있니


[포포투=Chris Flanagan, Nick Moore]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축구도, 전술도 마찬가지다. 현대 축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여러 갈래로 파생된 계보를 발견한다. 모리뉴 이전에 클러프가, 시메오네 이전에 비엘사가 있다. 은퇴한 명장 알렉스 퍼거슨조차 맷 버스비의 후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월드 No.1 풋볼매거진 <포포투>가 8월호에서 현대축구 선구자들을 추적했다. 


#1. 마르셀로 비엘사: 압박 전술의 대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비엘사다.” 펩 과르디올라의 말이다. 비엘사의 축구는 3-3-3-1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한다. 공격에 전념하는 전술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치밀한 압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압박을 기초로 공격력을 극대화한다. 

압박은 비엘사가 지도자가 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그렇지만 그처럼 공격적이고 집요하게 활용한 감독은 없었다. 언젠가 그는 “수비에 관한 나의 축구 철학은 아주 단순하다. 계속 뛴다”라고 말했다. 시메오네, 마르티노, 삼파올리, 포체티노 등이 이 압박 전술의 계승자다.

후계자: 디에고 시메오네

#2. 맷 버스비: 제국 설계자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감독 역할이란 선수를 사고파는 게 전부였다. 버스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새로운 감독 세대를 열었다. 클럽 훈련과 영입 정책을 통제하며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말 그대로 ‘제국’의 구축이었다.

버스비는 최고 유망주들을 올드트래퍼드로 끌어들였다. 어린 선수들과 의사소통도 탁월했다. 장기 계획에 집중했던 그는 세 차례나 ‘위대한 팀’을 만들어냈다. 1948년 FA컵 정상에 섰던 팀, 1950년대 버스비의 아이들, 뮌헨 참사를 딛고 1968년 유럽 챔피언이 된 팀이었다. 선견지명도 있었다. 1956년 그는 풋볼리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잉글랜드 최초로 맨유를 이끌고 유러피언컵에 참가했다. 유럽 대항전이 축구의 미래 핵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후계자: 알렉스 퍼거슨

#3. 리누스 미셸: 토탈풋볼의 제왕
미셸은 공을 갖고 하는 훈련에 집중했다. 모든 필드플레이어들이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유동적인 플레이를 발전시켰다. 수비수도 공격할 수 있고 공격수도 수비에 가담할 줄 알아야 했다. 혁명적인 접근이었다. 
 
처음 토탈풋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1974년 월드컵에서였다. 미셸이 지휘하는 네덜란드는 뮌헨에서 열린 결승전에 진출했다(독일에 패배). 대표팀 사령탑으로 복귀해 출전한 1988년 유로에서 우승했다.

후계자: 요한 크루이프

#4. 프레드 펜틀런드: 티키타카의 시초
펜틀런드는 1920년 라싱 산탄데르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많은 클럽이 2-3-5 포메이션으로 전형적인 잉글랜드식 ‘킥앤러시(kick & rush)’를 구사했다. 펜틀런드는 숏패스 플레이를 선보였다. 미드필드에서 공을 지키는 데 초점을 둔 2-5-3을 채택했다. 이후 그는 아틀레틱 빌바오를 두 차례 이끌며 클럽 최초의 리그 우승컵 2개를 선사했다. 

1931년 펜틀런드의 아틀레틱은 바르셀로나를 12-1로 때려눕혔다.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악으로 남아있는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누캄프의 팀은 펜틀런드가 스페인에 도입한 숏패스 전술로 큰 이득을 보게 된다. 티키타카라는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된 셈이다.

후계자: 펩 과르디올라

#5. 허버트 채프먼: 축구계 셰익스피어
채프먼은 잉글랜드 스포츠 초창기 가장 현대적 인물로 꼽힌다. 노샘프턴 타운, 리즈 시티, 허더즈필드 타운, 아스널을 거치면서 혁신적인 지도 방식을 선보였다. 그중 으뜸은 선발 라인업을 감독인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고 이사회를 설득한 일이다. 당시는 구단 고위층이 선수를 기용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 이사회가 국가대표팀 선발권을 양보한 것도 1963년이었다.


또 있다.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을 무력화하기 위해 3-2-2-3 시스템의 일종을 고안했다. 효과적인 역습을 가능하게 한 WM 포메이션이다. 아스널 리저브팀을 같은 시스템으로 조련해 클럽 내 선수 기용 폭을 넓혔다. 로테이션의 원형인 셈이다. 전술판을 사용한 최초의 감독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썼다. 음주나 흡연 같은 몸관리 영역이다. 심지어 질레스피 로드의 지하철역명을 아스널로 바꿨다. 조명과 흰색 축구공, 등번호 제도 등을 지지했다. 남들보다 몇 년이나 앞서 유럽 대항전이라는 구상을 옹호하기도 했다. 진정한 선구자. 

후계자: 지미 힐

#6.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통계 전문가
로바노프스키는 축구 분석에서 한 획을 그었다. 1969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지도자 경력 내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축구를 분석했다. 상대를 분석하려고 스카우트를 보냈고, 선수들의 경기력 통계를 관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컴퓨터를 들여왔다.

로바노프스키는 클럽의 지휘봉을 잡는 사이 소련 대표팀을 세 차례 맡았고, 유로88의 결승전에 진출했다. 클럽에서는 12차례나 리그 정상에 올랐고 UEFA컵위너스컵도 2회 우승했다. 

후계자: 샘 앨러다이스

#7. 미겔 무뇨스: 스타 출신으로 성공한 감독
무뇨스는 1948년부터 10년간 레알 미드필드의 일부였다. 클럽이 처음으로 유러피안컵 3개 즉 프리메라와 세군다, 테르세라(the Primera, Segunda and Tercera, 스페인어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를 의미)를 품에 안도록 도왔다. 

감독으로 변신하는 것도 매끄러웠다. 리저브 팀에서 잠시 수련한 뒤 1959년 1군의 지휘봉을 잡았다. 클럽을 지휘하는 15년 동안 9번이나 리그 정상에 오른 팀으로 바꾸어 놓았다. 쿠아르타와 킨타(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역시 그의 업적이다.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만하면 그라운드에서 곧장 감독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후계자: 케니 달글리시

#8. 엘레니오 에레라: 카테나치오의 대사제
최초의 슈퍼스타 감독이라 할 만한 에레라는 선수들에게 쏠리던 시선을 벤치로 옮겨 놓았다. 카테나치오, 즉 빗장을 무자비하게 채운 덕분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에레라는 프랑스에서 뛰던 선수 시절 자신이 스위퍼라는 포지션을 창안했다고 주장했다. 카테나치오는 원래 1950년대 파도바를 이끌었던 감독 네레오 로코가 만들어낸 전술이다. 이를 완벽하게 가다듬은 이가 에레라였다. 그는 팀에서 미드필더 한 명을 빼고 스위퍼를 더해 카테나치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동안 인테르는 사실상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팀이었다.

후계자: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9 기타
- 빌 섕클리(심리전의 달인): 2부에 있던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아 1부 정상으로 세 차례 이끌었다. 유럽까지 지배할 수 있는 위치로 끌어올렸다. 다양한 심리전으로 상대의 혼을 빼놓았다. 상대에 한 수 앞설 전략을 만들어냈던 스태프들의 라커룸 회의가 핵심. 후계자는 알렉스 퍼거슨.

- 브라이언 클러프(동기 부여의 선도자): 신처럼 군림했던 지도자. 기지와 지능, 협박, 카리스마로 중무장한 캐릭터. 클러프의 방식이 제대로 돌아가면 선수들은 그를 위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후계자는 조제 모리뉴.

- 벨라 구트만(원조 ‘스페셜원’): 어떻게 우승하고 어떻게 성공을 이어가는지 잘 알았다. 흠이 있긴 했다. 가는 곳마다 3년을 넘긴 적이 없었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이사회와 냉전, 스타플레이어와 충돌 등이 흔한 이유. 밀란에서는 세리에A 우승을 이끈 뒤 이사회와 논쟁 끝에 해고됐다. 그때부터 구트만은 계약서마다 우승 달성시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었다. FC포르투에서 포르투갈 리그 우승을 맛본 후 벤피카로 갈아탔다. 에우제비우를 영입해 1961년과 1962년 유러피언컵을 차지했다. 후계자는 조제 모리뉴.

- 지미 호건(‘마법의 마자르’에 영감을 준 남자): 호건의 경력은 여러 국가대표팀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선구적 전술이었던 ‘패스하고 움직이기’를 창안했다. 이후 다른 세 나라에서도 비슷한 업적을 쌓았다. 1910년에는 네덜란드만의 방식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건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은 “호건은 독일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편지를 받았다. 후계자는 헝가리 감독이었던 구스타프 세베스.

*현대축구의 선구자들에 관한 특집기사는 <포포투>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