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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언어·지체장애 딛고 美 조지메이슨大 최고 교수까지 오른 정유선

youngsports 2013. 9. 15. 17:56

 26년 전, 당신의 편지 한통서 기적은 시작됐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 일, 그게 장애" 

한계라는 굴레를 벗겨준 분 
'아무 것도 겁내지 말고 너를 표현하여라 
한번에 안되면 다시 하고 될때까지 혼신을 다해봐라 
누가 너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여 거기에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도록 해라'이 한마디에 다시 태어났죠

상처뿐인 초등학교… 첫 등교, 자기소개 나섰다 
급우들 웃어대 결국 울음, 매스게임 앞둔 담임선생님 
날 보며 '아유, 큰일났네' 주눅들어 죽은듯 생활했죠 

도전의식 싹 틔운 고교시절… 선생님의 편지받은 후부턴 
'안해보고 포기하는건 없다' 지체장애 불구 체력장 만점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유학 가서 영어공부까지 

보조공학기구 이용해 강의… 호킹 박사 쓰는 프로그램 써 
손으로 입력하면 음성으로 2시간 수업위해 7시간 준비 

천국에는 유머가 없대요… 유머와 행복과 웃음이란 
역경 극복해가는 과정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미국 조지메이슨대 특수교육과 정유선 교수는 뇌성마비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한 학기에 세 과목을 가르치고‘최고 교수상’도 받았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정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신현숙 선생님의 편지(아래 작은 사진)가 삶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26 년 전 편지엔‘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너를 표현하여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위의 작은 사진은 정 교수가 이번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신현숙 선생님을 만나서 찍었다. / 김연정 객원기자

단발머리 여고생 정유선의 집에 1987년 초봄, 편지가 배달됐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사이의 짧은 봄방학을 즐기던 정유선이 봉투를 열자 곱게 접은 편지지 세 장이 나왔다. 검은 수성 펜으로 눌러쓴 편지엔 머뭇거림의 흔적이 맺혀 있었다. '수업 시간에 나도 모르게 유선이 이름을 부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편지를 보낸 사람은 명성여고(현재 동국대사대부속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신현숙 선생님이었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 한 호텔에서 만난 미국 조지메이슨대 특수교육과 정유선(43) 교수는 26년 전 선생님에게 받은, 자신의 삶을 바꾼 편지를 늘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최근 에세이집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를 낸 정 교수는 뇌성마비로 인한 언어·지체 장애를 갖고 있다. 지능 자체엔 문제가 없지만 말이 어눌하고 이야기할 때 얼굴이 일그러지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지적 장애로 오해하기도 한다.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정 교수는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나온 후 1990년 미국으로 유학해 조지메이슨대(학사), 코넬대(석사)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조지메이슨대에서 보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4년 교수가 됐다. 조지메이슨대는 학생 수 약 3만2000명의 공립대다. 그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추천하고 교수들이 최종 심사를 하는 '최고 교수상'을 지난해 받았다.

그는 유학 중 만난 미국 교포로 과학·정책 컨설팅회사에서 일하는 장석화씨와 결혼했고 똘똘한 남매 하빈(15)·예빈(11)이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삶에 간편하게 '인간 승리'라는 명패를 붙인다.

올해로 대학서 강의한 지 10년째인 정 교수는 "되돌아보면 26년 전 선생님에게 받은 편지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만약 선생님이 없었다면 나는 '장애인이 어떻게'라는 편견에 결국 굴복했을는지 모른다"라고 했다. 한 장의 편지는 정 교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긴긴 도전사(挑戰史)를 듣기 위해, 정유선 교수와 마주 앉았다.

◇호킹과 비슷한 보조기구로 강의

이날 인터뷰를 하러 가면서 노트북 컴퓨터, 태블릿 PC, 큰 수첩 등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넣었다. 혹시라도 둘 사이에 '말길'이 막혀 뭔가 도구가 필요한 상황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정 교수는 "혹시나 해서 컴퓨터도 가지고 왔다"고 하자 웃으면서, 느리게 답했다. "사실… 남들 앞에서 말하고 사진에 찍히는 일이 나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일단 말로 해보다가… 혹시 힘들면 컴퓨터의 도움을 받도록 하죠." 인터뷰는 말과 '카카오톡 PC 버전'을 사용한 채팅을 섞어가며 진행됐다.

정 교수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 AAC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보완 대체 의사소통기기)라는 보조 공학기구의 도움을 받는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치면 기계가 목소리를 대신 내는 방식이다.

―AAC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데요.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님 아시죠? 루게릭병으로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제가 쓰는 프로그램은 호킹 박사님이 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해요. 저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쳐서 문자를 입력하고, 호킹 박사님은 얼굴 근육을 조금씩 움직여서 문자를 만드는 게 차이예요. 그렇게 문장을 입력하면 기계가 문자를 목소리로 바꾸어 주지요."

―입력 방식은 인터넷 채팅 비슷하네요?

"그것보단 조금 복잡해요. 문장을 입력하면 기계는 똑같은 속도로 단어들을 주욱 읽어 나가요. 학생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려면 쉬어야 하는 시점에 일일이 쉼표를 넣어주어야 해요. 2시간 40분 수업을 하기 위해서 AAC를 준비하는 시간만 일곱 시간 넘게 걸려요."

정 교수는 이번 학기에 세 과목(장애인을 위한 보조공학, 특수교육 개론, 독립생활을 위한 보조공학)을 가르치고 있다. 장애가 없는 사람도 소화하기 쉽지 않은 수업 일정이다. 그는 "그냥 잠을 줄이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느리게나마, 그냥 말로 강의하시면 안 되나요?

"외국어 배워보셨죠? 잘 되다가도 정작 외국인을 만나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하면 말문이 막히잖아요. 비슷해요.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말이 안 나오거나 하는 사태를 미리 예방하는 거죠."

그는 AAC를 시연해보겠다며 노트북 컴퓨터 전원을 켜고 지난 학기 강의 중 하나를 열어 보여줬다. 화면엔 텍스트가 떴고 여성 로봇을 연상케 하는 영어 소리가 컴퓨터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나왔다. "보조공학을 여러분께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이 기계는 호킹 박사가 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저는 호킹 박사만큼 똑똑하지는 않습니다." 기자가 웃자 정 교수는 "기계음이라 딱딱하게 들리기 때문에 유머를 많이 섞으려고 한다"고 했다.

◇"날 주눅들게 했던 배려 아닌 배려"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조지메이슨대에서 보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던 2004년 5월, 정유선 교수가 지도교수인 마이크 베르만 교수와 포옹하는 모습. / 정유선 교수 제공

정유선 교수가 뇌성마비라는 사실은 두 돌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갓난아이 때 앓았던 심한 황달 탓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딸이 뇌성마비 판정을 받자 가수로 활동하던 어머니 김희선씨('울릉도 트위스트'로 이름난 이시스터즈 전 멤버)는 딸 돌보기에 전념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 정현화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딸을 업고 다니며 헌신했다. 어린 시절 3년을 재활원에서 보낸 정교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됐을 때 부모는 갈등하다가 일반학교를 선택했다. 어머니 김희선씨는 "언젠가 유선이가 우리 곁을 떠나 사회에 혼자 힘으로 우뚝 서야 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첫날부터 후회했다. 여덟 살 정유선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자기소개 해볼까"라고 물어보는 선생님, 손을 번쩍번쩍 들고 앞다퉈 교단에 나가는 아이들…. 박수와 웃음이 섞인 첫날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정유선 학생도 손을 번쩍 들었다. 어머니 김희선씨는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안 돼!'라고 외쳤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넘어지며 교단에 오른 유선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자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고 결국 유선이는 엉엉 울었다"고 했다.

―학교에 입학한 후엔 어땠나요?

"거의 '발표 열외 학생'으로 지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 기억에 남아요. 선생님이 칠판에 수식을 몇 개 쓰시더니 '이렇게 더해도 된다는 법칙은 뭐지'라고 물었어요. 저는 그냥 혼잣말처럼 '결합법칙'이라고 중얼거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들었는지 갑자기 '유선이가 일어나서 말해볼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그… 그…' 하다가 그냥 앉았어요. 그때부터 주눅이 많이 들었고, 입을 더 다물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 때문에 상처 받는 일도 많았죠?

"저는 학기 첫날마다 선생님의 눈초리가 두려웠어요. '얘, 뭐야?'라는 그 눈빛이 큰 상처가 됐어요. 초등학교 때 매스게임 하잖아요. 그때 한 선생님이 저를 보면서 무심코 던진 말은 큰 상처로 남았어요. '아유, 큰일 났네'라는 말이었죠."

―선생님이 좀 무심하셨네요.

"글쎄요… 그런데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놀림보다는 배려였어요. 배려 아닌 배려라고나 할까요. 선생님들은 저를 '발표 열외'로 분류해 두었어요. 피구 경기가 열리면 '유선이는 빠져'라고 했어요. 물론 선생님들이 좋은 마음으로 그래 주셨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런 배려가 점점 저에게 한계를 만들고 있었던 거죠. 저도 거기에 익숙해져 갔고요."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해라'

정유선 교수에게 말은 '평생 숙제'다. 꿈에서조차 한 번도 유창하게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창하게 말하는 유선이 꿈'을 꿔본 적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국어 교사로 정 교수의 삶을 바꾼 신현숙 선생님이다. 26년 전 그날의 사건은 평화롭고 나른한 여느 여고 교실의 국어 수업 시간에 일어났다. 정 교수는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오후,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던 나에게 닥친 일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신 선생님(지난 봄 퇴직)은 "유선이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한참을 계획했던 일이었다"고 했다.

1986년 봄 명성여고 1학년 국어 수업 시간. '결합법칙' 사건 이후로 거의 7년 넘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발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던 '열외 학생' 정유선을 신 선생님이 불렀다. "유선이가 일어나서 시(詩)를 한번 읽어보자." 정 교수는 "그날은 선생님이 작정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저는 더듬더듬 시를 읽었어요. 시를 다 읽고 앉자마자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고 저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울었어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게 돼서, 그런데 뜻대로 잘 안 되어서… 그래서 울었겠죠. 며칠이 지나자 제게 씌워져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뚜껑'을 치워 주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담아 짧은 편지를 보냈지요."

신현숙 선생님에게 직접 그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달 초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리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26년 전 국어 수업 시간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유선이는 학교에서 자리에 앉아만 있을 뿐이지, 발표에선 제외된 아이었어요. 너무 풀이 죽어 있었다고나 할까… 안타까웠어요. 혹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낭송을 시켰지요."

정 교수는 "책 읽기도 그렇지만, 2학기가 끝나고 선생님이 보내주신 답장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나오는 편지였다"고 했다. 정 교수는 편지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다음은 긴 편지의 내용 중 일부다.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정유선 교수가 유치원 때 쓴 그림일기 / 정유선 교수 제공
〈유선아, 새 학년을 기다리며 알찬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나는 그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편지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에서 열어보기가 망설여졌다. 내 뜻밖의 행동에 대하여 유선이는 어떻게 느꼈을까? 너무 큰 충격을 받았거나 혹시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교무 수첩을 들여다볼 때마다 유선이의 칸이 날짜가 없이 비워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떤 때는 꿈도 꾸었다. '어, 유선이가 아직 한 번도 안 읽었네. 정유선 일어나요.' 유선이는 서슴지 않고 일어나서 유창하게 읽었지. 수업 시간에 수첩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유선이 이름을 부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는 그날까지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지 모른단다.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그날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수업을 들어가서 무심한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또 마음이 흔들려서 마지막 순간에 그냥 넘어갈 뻔하다 이렇게 우유부단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힘을 내어 너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네가 일어나서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읽어가는 동안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고 눈물이 솟아 넘치려는 것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네가 혼자 힘으로 다 읽고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단다. '잘 읽었어요' 하는 소리도 못했지.

유선아. 나는 다만 너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자신과 기쁨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움츠러들지 말고 너를 표현하여라.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하고 또다시 하고, 될 때까지 혼신을 다하여 끈기 있게 해보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게으름을 일으키고 게으름이 쌓이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특별히 누가 너를 생각한다거나 무관심하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유선이에게는 오직 유선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이지, 누가 유선이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여 거기에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해라… 부디 더 큰 기쁨을 경험하고 더 큰 감동을 만나기를 기원하며. 이만 안녕! 1987. 2. 27. 아차산 기슭에서 辛〉

편지의 마지막 장 아래쪽엔 빨간 밑줄이 빼뚤빼뚤하게 그어져 있었다. '누가 유선이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여 거기에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해라'라는 부분이었다. 정 교수는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저는 당시 세상이 장애인에게 쌓은 편견의 벽에 갇혀가고 있었어요. 신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씌우고 있었던 틀을 벗겨주신 거죠."

얼마 전 정유선 교수가 서울을 찾았을 때, 선생님과 제자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정 교수가 책을 직접 전달하고자 마련한 식사 자리였다. "선생님은 제자를 볼 때 '이 학생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그 바람을 편지에 담아서 종종 제자들에게 보낸다고…. 저한테만 편지를 쓰신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지요, 하하."

◇"장애란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지난해 4월 정유선 교수가 미국 조지메이슨대에서 최고교수상을 받던 날 가족과 함께. 뒷줄 왼쪽부터 남편 장석 화씨, 아들 하빈이, 정 교수. 앞줄은 딸 예빈이. / 정유선 교수 제공
신현숙 선생님의 당부는 이후 정 교수의 신조가 됐다. 그는 유학, 석·박사학위, 결혼, 강의 등에 악착같이 도전해 갔다. 도전한다고 다 이뤄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혹은 남이 하지 말라고 해서 멈추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무조건 열심히 해본 다음에 그만뒀다. 그러자 '체력장 만점' 같은, 눈에 띄는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체력장에는 왜 그렇게 집착했나요?

"엄마도 선생님도 체력장은 그냥 기본 점수만 받자고 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해보다가 안 되면 모를까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를 한다는 게 용납이 안 됐어요. 밤마다 엄마를 졸라 윗몸일으키기를 했어요. 한 달 넘게 매일 운동장을 뛰면서 오래 달리기를 연습했어요.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저는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결국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아냈죠."

―대학 입시에서 체력장이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성적에 연연한 건 아니었어요. '뇌성마비 장애인은 체력장을 대충 해도 된다'는 주변의 배려가 싫었어요. 저는 스스로 마음에 한계를 긋는 일 자체가 장애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결국 한국서 대학을 안 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죠.

"한국 대학에도 원서를 몇 군데 넣었어요. 그런데 대학 입학 면접을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었어요. 미국에 이모가 살고 계셔서 부모님과 상의 끝에 미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제 선택은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어요. 한국 말도 못하는데, 영어로 공부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영어 연수를 하던 유학 초기는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어요."

유학 초기인 1990년, 그가 수첩에 적은 말들은 당시의 암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즘 들어 나 정유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죽고 싶다. 죽으면 아무 고통 안 받을 텐데' '씁쓸함, 우울함, 허망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긴 왜야? 내가 병신이니까 그렇지. 말도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병신이니까. 뭐 병신이 공부만 잘한다고 다 알아주나?'….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죠?

"삶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비법은 없어요. 그냥 견디고 돌파하는 수밖에. 저는 신체 조건에 적합할 것 같아서 대학 때 컴퓨터공학을 선택했지만 '소프트웨어(software)'를 '물렁물렁한 도구'라고 번역할 정도로 컴퓨터에 문외한이었어요. 죽을 만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프로그래밍 숙제를 하려고 씻지도 않고 24시간 넘게 컴퓨터 앞에 붙어 있은 적도 많아요.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건 아주 일상적이었고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학생회관 소파로 가서 밤새워 공부를 했죠. 그렇게 매달린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다섯 과목 모두 A를 받았어요. 너무 좋아 길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죠. 그때 누가 저를 봤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는 책에 '장애가 없었다면 삶이 얼마나 밋밋했을까'라고 썼다. 장애가 있는 삶이 더 낫다고 여긴다는 듯 들렸는데, 믿기 어려웠다.

―선택할 수 있다면, 장애가 있는 삶을 고르겠다는 뜻인가요.

"나에게 언어장애가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과 지금보다 훨씬 잘 어울려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장애가 만약에 없었더라면, 이만큼 열심히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그래서 이만큼 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과정에서 삶은 더 풍성해졌고요."

정 교수는 유치원 때 그림일기를 찍은 사진 파일을 보여줬다. 1976년 8월 5일에 쓴 일기엔 '피아니스트도 되고 싶고 문학가도 되고 싶고 의학박사도 되고 싶다'라고 적혀 있다. "피아노도 칠 줄 알고 책도 썼고 교수도 됐고… 이 정도면 꽤 많이 이뤘죠? 엄마는 가끔 웃으면서 '넌 못하는 게 뭐니'라고 하세요. 그럼 제가 그러죠. '말 빼고 다 잘해'라고, 하하."

인터뷰하는 내내 정 교수는 유쾌했고, 많이 웃었다. '유머 감각이 좋은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인용했다.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고 하잖아요. 유머와 행복과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역경, 그리고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